1999년에 쓴 종말론을 다시 읽는다. “사는 동안 우리는 많은 죽음을 지켜보고 육체의 스러짐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면 너무나 허망하다. 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에 희망을 건다. 따라서 영혼은 곧 희망이요 영혼의 구제란 모든 종교의 공통분모다.” 그렇다면 문제가 생긴다. 주님은 영혼의 신원을 어떻게 알아보실까? 용모라면 간난 아기·소년·젊은이와 노인의 생김새가 평생 변하는데, 그렇다면 혹시 유전자 검사라도?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정신상태도 당연히 변한다. 설명의 편의를 위하여 또 공인이라는 의미에서, 전 국민이 잘 아는 한 분을 예로 들자. 장모님을 도와서 천막 교회에서 열심히 전도하던 청년 조용기. 이적(異蹟)의 소문이 꼬리를 물어 교인이 구름같이 모여들고, 떨어진 믿음을 충전하려고 20세기의 이인(異人) 빌리 그레이엄과 부시 대통령이 찾아와 안수기도를 받았다는 영성이 충만하던 시절. 교회 상속문제로 언론의 집중조명에 당혹했던 노후. 천진한 유아기와 꿈으로 가득한 소년기를 더한다면, 생애 전환기의 몇 고비씩을 넘겨야 하는 인생에서, 어느 시점의 ‘영적 상태(靈的狀態)’를 조 목사의 진면목(眞面目)으로 볼 것인가? 다수
독실한 신자가 하늘나라로 갔다. 주님이 힐끗 보고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저기 앉아라.” 같은 교회 집사가 오자 반갑게 웃음으로 맞는다. 한참을 지나서 목사가 들어서니 버선발로 달려나가 와락 끌어안는다. 신자가 참다못해, “아니, 여기서도 인간을 차별합니까?” 따지니까, “그게 아니고, 목사가 천국에 온 건 백 년 만에 처음이니라.” 해묵은 우스개지만 교회가 회화화(戲畫化) 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유럽 여행 때 교회를 둘러보며 신도 수가 적은 데에 놀랐다. 서구 발(西歐發) 신도 감소문제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요, 오히려 대한민국 대형교회의 성장이 하나의 불가사의였는데, 그마저 코로나 직격탄과 한편으로는 정치적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사회의 대변혁 때마다 늘 그랬듯이, 종교는 4차 산업혁명, 특히 인공지능의 폭발적 진화에 대처도 해답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사이비 종교만 발호한다. 교회가 힘을 잃자 팬데믹을 기화(奇貨)로, 자유와 인권의 외연을 넓혀오던 자유민주주의가 독재 전체주의로 회귀하고, 역사와 문명의 수레바퀴는 역회전 중이다. 안식 이야기에 종교를 건너뛸 수 없으니, 혹시 비 종교인의 실수가 있어도 사전 양해를 구한다. 이천 년간 체제와 정통성을 지
밤길 걷던 아일랜드 술꾼이 쿵 넘어졌다. 겨우 몸을 일으키는데 다리에 뭔가 죽 흘러내린다. “아, 이것이 제발 피라면 좋겠네.” 바지춤에 찬 술병이 깨지느니 차라리 피가 나기를 바랄만큼 애주가는 못 되지만 필자도 위스키를 즐긴다. 최고의 호강은 백화점에서 백만 원한다는 발렌타인 30년산으로 면세점가격이 $320 정도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발렌타인의 반값이 채 안 되는 조니 워커 블루를 더 좋아한다. 첫째로 블루는 담백하다. 꼬냑 딱 한 잔이라면 모를까, 여러 잔 즐기려면 향 짙은 위스키는 별로다. 둘째는 블렌딩(blending)의 마술. 블루는 5 - 60년까지 노소동락의 배합으로, 평균 30년의 부드러운 목 넘김이 예술이다. 셋째로, 위스키 숙성(Aging)은 포도주를 담았던 오크통을 재활용한다. 희미한 셰리주*와 참나무 향이 어우러지고, 살아 숨 쉬는 나무통 속에서 매년 2%씩을 천사에게 바치며(Angel’s Share: 증발), 30년 동안을 푹 익은 맛. 호텔등급을 낮추고 기념품을 포기해서라도 백여 달러를 아껴 한 병을 사 온다. 옛날부터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았으니, 나보다 다음 세대를 위하여 빚은 배려와 사랑의 술이 아니던가. 떠나는 사람에게 이
1999년 초,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종말론’ 칼럼에, 침대머리 기도문을 넣었다. “이제 잠자리에 들려 하매/ 주여, 이 영혼을 지켜주소서/ 잠들어 깨어나지 못한다면/ 주여, 이 영혼을 거두어 주소서.” Sleep과 keep, wake와 take로 운율도 좋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Soul & Body)를 나누는 유일한 동물이다. 그러므로 영육분리는 인간만이 누리는 언어·사고(思考)·문화와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다. 서양에서는 영혼을 다시 영과 혼으로 동양에서는 혼과 백으로 나누는데, 모두가 불가지(不可知)인 삶과 죽음의 갈림길을 풀어내어, 지푸라기 잡듯 ‘영원불멸’의 한 자락을 쥐고 싶은 간절한 안간힘이 아닐까? 휴머니스트로서 온 프랑스국민의 사랑을 받은 문호 빅토르 위고는 신부의 임종 미사를 거절했고, 20세기 위대한 물리학자 아인슈타인과 호킹은 천국과 사후세계를 믿지 않았다. 공상과학소설의 거장인 아더 클라크도, 과학자 겸 작가로 아폴로계획을 적극 밀어준 칼 세이건도 무신론자였다. 현대문명 최고 반열의 사색가(思索家)들 모두가 영혼의 세계는 풀어내지 못한 것 같다. 1993년 월간지에 ‘치과인의 영화감상’을 쓰면서, ‘All That Jazz’에
생전에 물 맑아 쌀 좋고 인심 후한 진천서 살고, 죽어서 명당(明堂) 많은 용인에 묻힌다는 말이 있다(生居鎭川 死居龍仁). 옛날 한 사또의 명 판결에서 유래한 말로, 집과 무덤 공히 살 거(居) 자를 쓰니, 주택 유택(幽宅) 두루 택(宅)이라는 ‘이어짐’의 생사관이 엿보인다. 친구들과 제주 S리조트 회원권을 사서, 휴가 때 네 부부가 16인승 미니버스를 렌트하기로 했다. 나만 빼고는 모두 법조계 전 현직 중진, 소위 영감들인데 “일당 5만원!” 했더니, 석 달 만에 셋이 다 운전면허 2종을 1종으로 바꿔 왔다. 즐거운 일화가 많았다. 이틀에 나누어 3백여 회원이 참가하는 골프대회에서 안식구가 홀인원 황금 골프공을 탔고, 필자는 퀴즈대회에서 신라호텔 2박3일 숙박권, 다음 해에는 왕복 비즈니스 항공권을 탔다. 항공권은 비수기 본인에 한한다는 규정 탓에 그림의 떡이었고, 장모님이 쓰려던 숙박권은 예약한 날 호텔의 전관봉쇄로 무용지물이 되었다. 갑자기 외국 정상과의 회담 일정이 잡혀 출입금지란다. 마땅한 대통령 전용별장도 없는 형편에 졸속외교를 하니까, 호텔을 예약한 국민과 바이어(buyer) 등 외국 손님들에게 민폐(民弊)를 끼치는 현장이었다. 사진동호회 ‘인상
마추픽추 출발이 늦어 쿠스코 식당(Don Antonio)에 도착한 것이 밤 9시, 식탁에 준비된 술에 아무도 손을 대지 않는다. 고산병 걱정으로 이틀간 술이 고팠던 터에 비프스테이크가 일품이니, 옆자리 몫까지 맥주 두 병에 데킬라 다섯 잔을 마셨다. 마추픽추(2,430m)와 쿠스코(3,400m) 높이를 반대로 알아 다 내려왔다고 안심한 것. 침대에 누워 봐도 심장이 제멋대로 뛰고 호흡은 거칠어 구심(求心)도 듣지 않는다. 환갑여행 길에 사단이 나나 싶어 가부좌 틀고 앉아 전에 배워둔 정각도 단전호흡을 시작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30분 쯤, 호흡과 맥박이 잡혀 겨우 잠이 들었다. 선친은 청산거사 설법을 듣고, 치과 4층에서 수련을 하던 요가(공인 사범)도장을 정각도로 바꾸셨다. 청산거사의 단전호흡은 ‘호지흡지(呼止吸止)’, 즉 ‘그침’에 방점을 찍는다. 천천히 들이쉬어 길게 멈추고, 느리게 내쉬고 또 멈추고... 자신의 사부인 청운거사는 입신의 경지에 들어 한 시간에 한 호흡으로 족하단다. 물론 그 주장이나 차력시범을 100% 믿지는 않는다. 무의식으로 기능하는(vegetative) 호흡을 인위적으로 강제하면, 장기적으로 심각한 결과를 낳을지도 모르니까. 무
사이언스 빌리지(사빌) 식당은 최대 200명쯤 수용한다. 두 명의 셰프와 위생사가 가성비 높은 건강 식단을 편성하여 보름 전에 고지하고, 매주 한 번 입주민 대표와 ‘맛남의 만남’ 회의를 갖는다. 쟁반에 부식을 담고, 끝으로 밥과 주 요리를 받아 편한 식탁에서 식사 하는데, 가끔 나오는 별식도 불만이 없다. 며칠 전 막 수저를 드는데 누가 옆에서 한마디 한다. “마스크 쓰십시오.” 마스크 쓰고 어떻게 먹나, 의아하여 돌아보니, 얼굴이 항상 정월초하루인 최씨다. 아, “맛있게 드십시오.”를 잘못 알아들었구나, 하고 씩 웃었는데, 이제는 식당에서 ‘쓰십시오’가 농담 반의 인사말이 되었다. 어찌 그 뿐이랴, 먹고 씻고 잠 잘 때 빼고는 전 국민의 입을 덮어놓았으니, 그러지 않아도 말수가 뚱하던 남자들은 아예 입을 다물었다. 발음이 흐릿하고 청력도 떨어진 노인들은 절반은 입술모양을 보고 말귀를 짐작하는데, 코로나가 그걸 가려놓았으니 실로 무성영화가 따로 없다. 나이 탓뿐일까? 한글이 배우기 쉽다고 하지만, 소통의 첫걸음인 ‘듣기’는 꽤나 어렵다. 필자는 영어회화 공부에 가장 훌륭한 교재로 디즈니 만화(Animation)를 추천한다. 첫째 Diction 즉 원본의 말
코로나 19로 전 국민이 ‘방콕’ 모드에 들어가면서 TV 시청시간이 늘어났다. 그러나 경제는 멈춰 서고 제작이 어려워져, 한류의 선봉장격인 드라마의 새 작품 공급은 동면상태다. 국민의 체감과는 동떨어진 뉴스 보도로, 공중파 1, 2위 방송이 시청자들에게 외면당한 측면도 있다. 그 틈에 흘러간 드라마와 스포츠 재방송으로 짭짤한 재미를 본 종편방송이, 직접 드라마제작에 뛰어든다. 종편답게 막장 여부를 가리지 않으니, 괴기나 환상의 장르가 뜨고 아라비아 숫자 ‘15’가 고정불변의 시그널로 자리를 잡았다. 밑에는 잔글씨로 “15세 미만 청소년이 시청하기 부적절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주제·언어·모방위험) 보호자 시청지도가 필요합니다.”란다. 영화 ‘19 禁’의 안방 버전이다. 한국영상물등급위원회(Korea Media Rating Board: Rating System)는, P에서 NC-17R까지 5등급인 미국식을 원용, 전체·12·15세 이상 관람 가에서 청불:(청소년관람불가: 19禁)까지 네 가지다. 미국은 평범한 사람들이 심사하여 조언(Advise)에 그치는 데에 반하여, 우리는 권위자(?)들이 평가하고 규제(Enforce) 성격이 강하다. 여가부(女家部) 산하
“사이언스 빌리지(사빌)는 과학·기술인의 실버 하우스입니다. 제 몸 추단이 힘에 겨우면 우리는‘돌봄’이 있는 요양원에 가고, 다시 의사의 ‘진료’까지 필요하면 요양병원에 입원합니다. 우리 모두 건강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 사빌에서 더 오래 행복한 여생을 보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피트니스에서 비지땀을 흘리고, 요가와 태극권과 등산과 산책으로 몸의 건강을 가꾸고 있지 않습니까?. 얼마 전 칼럼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경을 헤매는 사람을 격려할 때 ‘정신 차려, 정신 줄 놓지 마!’하는 말은, 몸이 아무리 건강해도 ‘마음의 건강’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마음의 건강은 정서적인 공유와 참여, 이웃과의 행복한 만남을 통하여 다져집니다. 주고받는 대화와 웃음 속에 마음은 더욱 더 건강해진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이 시 낭송 이벤트가 바로 그런 자리입니다. 직접 낭송을 하지 않아도, 객석에 앉아 손뼉을 치고 함께 웃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참여’가 됩니다. 오늘 이 ‘학부형 없는 학예회’를 끝까지 즐기시고, 마음의 근육을 기르십시오. 혹시라도 마음이 내키시면, 다음 기회에 꼭 한 번 무대에 올라와 보시기를 권합니다. 참석해
고3 때 문과와 이과로 갈라져 사이가 뜸했던 정외과(政外科) K군을, 서울대 연건동 캠퍼스에서 마주쳤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예의 가느다란 눈으로 내려다보며, “어때, 학교 댕길만 하냐?” 문리대 문과나 법대 아닌 의치대(醫齒大)는 직업학교(School)지 그게 어디 사나이가 다닐 대학(College)이냐는 투다. 하기야 이제는 법대도 Law School이다. 주구장창 친구와 어울려, 막걸리 마시며 호연지기를 뽐내던 그 친구의 오버코트는, 한 겨울 삼 개월을 빼고는 일 년 내내 전당포 주인 소유였다 소문에 의하면 당시 발행부수 최고를 자랑하던 D일보 청탁으로, 가끔 사설을 쓰고 술값을 얻어 썼다고도 한다. 이러한 문과계열에 비하면 이과계는 확실히 풍토가 다르다. 예과(豫科) 유기화학 실습시간에, 성분의 존재 유무를 찾아내는 정성분석은 그나마 견딜 만한데, 소수점 세 자리까지 계산하는 정량분석은 정말 죽을 맛이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남의 손을 빌릴 수 없고, 혼자서 끙끙대며 몇 시간을 매달려도, 결과는 항상 알쏭달쏭 했다. 전공은 그렇게 제2의 천성을 만드나 보다. 운동권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온갖 고생을 겪은 K군은, 훗날 청와대 교문수석을 지냈다. 초딩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