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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중 칼럼

실버 통신 9 : 내려놓는 연습

[임철중의 거꾸로 보는 세상] - <256>

 

   “사이언스 빌리지(사빌)는 과학·기술인의 실버 하우스입니다.  제 몸 추단이 힘에 겨우면 우리는‘돌봄’이 있는 요양원에 가고, 다시 의사의 ‘진료’까지 필요하면 요양병원에 입원합니다.  우리 모두 건강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 사빌에서 더 오래 행복한 여생을 보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피트니스에서 비지땀을 흘리고, 요가와 태극권과 등산과 산책으로 몸의 건강을 가꾸고 있지 않습니까?. 
 얼마 전 칼럼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경을 헤매는 사람을 격려할 때 ‘정신 차려, 정신 줄 놓지 마!’하는 말은, 몸이 아무리 건강해도 ‘마음의 건강’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마음의 건강은 정서적인 공유와 참여, 이웃과의 행복한 만남을 통하여 다져집니다.  주고받는 대화와 웃음 속에 마음은 더욱 더 건강해진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이 시 낭송 이벤트가 바로 그런 자리입니다.   직접 낭송을 하지 않아도, 객석에 앉아 손뼉을 치고 함께 웃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참여’가 됩니다.  오늘 이 ‘학부형 없는 학예회’를 끝까지 즐기시고, 마음의 근육을 기르십시오.  혹시라도 마음이 내키시면, 다음 기회에 꼭 한 번 무대에 올라와 보시기를 권합니다.  참석해주신 여러분들, 마음껏 즐기시고 편안한 밤 되십시오.  고맙습니다.”

 

   윗글은 지난 10월 22일 ‘詩와 기타의 밤에’라는 시 낭송 모임에서 드린 인사말씀이다.  재단 주최의 행사지만 직접 주관할 단체가 필요하다고 해서, 그 역할을 아직은 유일한 동호회인 음악 감상 모임 ‘해피 LP’가 맡았기에, 회장인 필자가 인사를 하게 된 것이다.  서로들 사양을 하는 바람에 네 명의 낭송자 중에도 끼어들었고, 아내의 작품인 ‘외갓집 풍경’을 낭송하면서 아내의 하모니카로 배경음악까지 깔았으니, 부부가 무대에 올라가 북 치고 장구치고 다 한 꼴이 되어버렸다. 
 먼저 소월의 ‘가을 아침에’를 낭송하면서, 손바닥만 한 시집을 꺼내 들었다. 
 “이 책은 최초의 소월 전집 ‘초혼’입니다.  단기 4291년 박영사(博英社) 출판, 정가 5백 환이네요.  고교 입학 기념으로 두 살 위의 누님이 단풍잎까지 끼워 준 선물인데, 용케 살아 남았어요.  누렇게 변색한 종이에 깨알 같은 활자가 보일락 말락 하지만, 계속 간직하렵니다.”  ‘살아남다’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건평 120평에 광까지 딸린 개인주택에서 80여 평 빌라로 옮기자니, 구석구석 숨어있던 세간이 끝이 없다(1995년).  아내의 눈치를 보며 아끼던 SP 판 13박스와 비구다(Victor) 축음기가 처형(處刑) 1호요, 나머지들도 눈 딱 감고 일사천리로 포기한 대 학살극이었다.  채색 창(Stained Glass)을 통하여 아침 햇살이 예쁘던 넓은 이층 거실에서 삼남매의 꿈이 영글었고, 지하 홈시어터·홈바·서재는 필자의 놀이터였다.
 다행히 이 집을 산 젊은 부부가 미술과 음악학원 교실로 운영하겠다며 좋아하니, 서운함을 적이 덜었다.  토지개발공사가 분양한 땅에 필자가 직접 설계하고, 집 장사하는 당숙과 고종사촌들이 직접 시공하여, 아주 작은 비용으로 지을 수 있었다.
 “이제 이사는 끝, 끔찍한 악몽이여 안녕.”은 말 그대로 꿈일 뿐, 적령기(適齡期?)가 되니 실버하우스가 기다린다.  살림살이를 다시 1/5로 줄이는 제2의 대학살이다. 
 오디오세트는 전에 칼럼 ‘해피 LP’에서 밝혔거니와, 책은 전공·교양 가릴 것 없이 대부분 넘겼고, 사전류(事典 類) 더하기 기타 몇 권만 ‘살아남은’ 것이다.  

 

   그러기에 내려놓는 연습은 버리기가 아니라 고르기다.  지난 삼 년 간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이라든가 만져 봐도 가슴이 뛰지 않는 물건, 하는 식의 한가한 분류나 정리가 아니라, 소수정예만 남기는 ‘떨이’(Sunset Sale)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
 선전포고 없이 내 인생에 쳐들어온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다.  Memento mori!
 인간은 태어날 때 이미 빨간 명찰의 수인(囚人)이다.  종교는 죽음을 삶의 한 통과의례로 받아들여 현재의 이 시간에 충실하라고 가르치고, 법정스님의 ‘무소유’는 알기 쉽게 풀어놓은 ‘집착 내려놓기’다.   마지막까지 지니고 갈 물건은 고가의 귀중품이 아니라, 시집 ‘초혼’처럼 가까운 이와 살갑게 정을 주고받던, 손때 묻고 마음이 담긴 소품이다.  아케론 나루터의 뱃사공에게 건네주고, 미련 없이 돌아설 선물이니까.

 

 

 

글: 임철중 
전 대한치과의사협회 대의원총회의장 
 임철중 치과의원 원장 

전 대전고등법원 민사조정위원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