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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중 칼럼

안식(安息) 이야기 1 : 쉼표

[임철중의 거꾸로 보는 세상] -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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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추픽추 출발이 늦어 쿠스코 식당(Don Antonio)에 도착한 것이 밤 9시, 식탁에 준비된 술에 아무도 손을 대지 않는다. 고산병 걱정으로 이틀간 술이 고팠던 터에 비프스테이크가 일품이니, 옆자리 몫까지 맥주 두 병에 데킬라 다섯 잔을 마셨다.
 마추픽추(2,430m)와 쿠스코(3,400m) 높이를 반대로 알아 다 내려왔다고 안심한 것. 
 침대에 누워 봐도 심장이 제멋대로 뛰고 호흡은 거칠어 구심(求心)도 듣지 않는다.   환갑여행 길에 사단이 나나 싶어 가부좌 틀고 앉아 전에 배워둔 정각도 단전호흡을 시작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30분 쯤, 호흡과 맥박이 잡혀 겨우 잠이 들었다. 
 선친은 청산거사 설법을 듣고, 치과 4층에서 수련을 하던 요가(공인 사범)도장을 정각도로 바꾸셨다. 청산거사의 단전호흡은 ‘호지흡지(呼止吸止)’, 즉 ‘그침’에 방점을 찍는다. 천천히 들이쉬어 길게 멈추고, 느리게 내쉬고 또 멈추고... 자신의 사부인 청운거사는 입신의 경지에 들어 한 시간에 한 호흡으로 족하단다. 물론 그 주장이나 차력시범을 100% 믿지는 않는다. 무의식으로 기능하는(vegetative) 호흡을 인위적으로 강제하면, 장기적으로 심각한 결과를 낳을지도 모르니까. 무협소설에 나오는 주화입마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명상과 수련, 운동 전후의 준비·정리운동(warm up & cool down), 또는 격한 감정 기복에서 심신을 다스리는 방법으로는 그침, 즉 ‘쉼’의 효과가 뛰어남을 인정한다. 운기조식의 내공심법이라고 할까?

 

   골목치과의 구인난이 심각한데, 인터뷰 할 때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 과거에는 페이가 주제였다면, 이제는 그보다 얼마나 쉴 수 있느냐는 것부터 먼저 묻는다. 
 칼 퇴근·휴진일·휴가, 다시 말해서 워라밸이 포인트다. 복지천국인 북유럽처럼, 점점 휴가를 즐기기 위해서 일을 하는 세상으로 변하고 있다. 악보에서도 쉼표가 음표보다 중요할 때가 많다. 백세시대를 맞아 제2의 인생설계를 많이 한다. 때맞춰 시니어를 위한 시민교육열에 불이 붙었다. 시류를 거스를 수도 없어 ‘나의 애창곡 만들기’라는 강좌에 등록했다. 흥이 나면 아무나 부르는 유행가·트로트에 비하여, 성악창법에는 교육이 필수적임을 뼈저리게 실감하였다. 더구나 처음부터 길들이기를 못한 엔진처럼 고음 불가의 음역과, 기관지를 40년간 굴뚝으로 써먹은 탓으로 호흡이 짧아진 연료부족 현상이 발목을 잡는다. 음역은 중 저성(中 低聲)용 악보로, 호흡은 선생님 코치로 자주 끊어가며, 그럭저럭 ‘언덕에서’ ‘그 집 앞’을 지나 ‘성문 앞 우물 곁’까지는 왔다. 슈베르트가 뮐러의 시에 곡을 붙인 연가곡집 ‘겨울 나그네’ 제5번 ‘보리수(Der Lindenbaum)’는, 고1때 독일어선생님이 악보 없이 가르쳐준 탓인지, 정작 악보와 피아노반주에 맞추기에는 ‘오차’가 심각했다. 
 3/4 박자인 것도 처음 알았고, 전주(前奏)가 6소절 2.5/3 박(拍) 이요 간주 세 번의 쉼표 길이가 제각각이니, 들어갈 타이밍을 찾다가 음정을 놓치고 발음은 버벅댄다.
 이 나이에 왜 사서 고생을 하나 싶어, ‘보리수’에서 드디어 두 손을 들었다. 
 쉼표의 매운 맛을 톡톡히 배운 셈이다.

 

   격투기는 라운드마다 1분씩을, 구기는 전 후반-피리어드-쿼터별로 쉬는 시간을 갖는다. 숨을 고르고 힘을 재충전하며 새 전략을 짠다. 선수는 제 역량을 발휘하고 관객은 최선의 경기를 즐겨, 스포츠 정신 “May the better one win!”에 부합한다.
 학교 수업도 시간마다 10분씩 쉬어야 두뇌가 효율적으로 회전한다. 교수나 연구원이 안식년을 갖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휴식은 마치 한국화의 여백처럼 그 자체로 스포츠-학습-인생의 중요한 부분이다. 결국 강좌는 탈락했지만 한가할 때면 나는 여전히 보리수를 흥얼거린다. 시 속에 사랑에 실패한 청년의 괴로운 방랑처럼, 슈베르트도 평생을 가난과 약한 몸에 시달렸다. 작곡가가 피아노를 겨우 장만한 것이 31세, 그해 11월 티푸스로 짧은 생을 마감한다. 시의 마지막 구절이 너무 좋다.
 “살랑대는 속삭임이 들린다, 보리수 곁으로 와서 ‘안식’을 찾아라(Du faendest Ruhe dort, du faendest Ruhe dort)!” 석가여래도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으셨다.

 

 

 

 

글: 임철중 
전 대한치과의사협회 대의원총회의장 
 임철중 치과의원 원장 

전 대전고등법원 민사조정위원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