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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중 칼럼

안식 이야기 4 : 한 울타리

[임철중의 거꾸로 보는 세상] - <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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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길 걷던 아일랜드 술꾼이 쿵 넘어졌다. 겨우 몸을 일으키는데 다리에 뭔가 죽 흘러내린다. “아, 이것이 제발 피라면 좋겠네.” 바지춤에 찬 술병이 깨지느니 차라리 피가 나기를 바랄만큼 애주가는 못 되지만 필자도 위스키를 즐긴다. 최고의 호강은 백화점에서 백만 원한다는 발렌타인 30년산으로 면세점가격이 $320 정도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발렌타인의 반값이 채 안 되는 조니 워커 블루를 더 좋아한다. 
 첫째로 블루는 담백하다. 꼬냑 딱 한 잔이라면 모를까, 여러 잔 즐기려면 향 짙은 위스키는 별로다. 둘째는 블렌딩(blending)의 마술. 블루는 5 - 60년까지 노소동락의 배합으로, 평균 30년의 부드러운 목 넘김이 예술이다. 셋째로, 위스키 숙성(Aging)은 포도주를 담았던 오크통을 재활용한다. 희미한 셰리주*와 참나무 향이 어우러지고, 살아 숨 쉬는 나무통 속에서 매년 2%씩을 천사에게 바치며(Angel’s Share: 증발), 30년 동안을 푹 익은 맛. 호텔등급을 낮추고 기념품을 포기해서라도 백여 달러를 아껴 한 병을 사 온다. 옛날부터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았으니, 나보다 다음 세대를 위하여 빚은 배려와 사랑의 술이 아니던가.

 

   떠나는 사람에게 이별의 괴로움은 8할이 잊히는 두려움이란다. 영화 쉬리가 불을 붙인 한류 드라마의 정점에 윤석호 PD의 ‘겨울연가’가 있다. 준상(배용준)은 기억을 잃었던 긴 세월, 변함없이 자신을 기억하고 사랑한 유진(최지우)과의 소중한 ‘기억’을 간직하려고 ‘빛’을 포기한다. 시력회복 수술은 뇌 기억중추에 손상을 입힌다는 설정이다. 죽음은 궁극적인 이별이기에 두려움도 더욱 격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부모 자식이나 배우자와 사별로 남겨진 사람은 비탄 반응(Grief Reaction)을 경험한다. 비탄 반응은 죽음이라는 상실에 따르는 애도(哀悼)로서, 보편적 일상적인 동시에 매우 개인적이다. 가족제도 등 사회관습이나 애정의 깊이, 그리고 개인적인 감수성에 따라 반응 정도가 달라진다. 슬픔·불안·우울증·무력감·집중력 장애·주위와의 괴리감 등, 심하면 시간이 가도 상실감이 지속 되어, 일상생활로 복귀에 정신과 의사의 도움이 필요할 때도 있다. 어머님은 낙상에 의한 뇌 손상으로 손쓸 사이도 없이 돌아가셨다. 며칠 전에, “아비야, 요 며칠 자꾸만 무섭다.” 하셔서 “무슨 일이야 있겠어요?”하고 넘어갔다. 갑자기 엉뚱한 일로 은행과 국세청을 정신없이 뛰어다닐 때였다. 큰일을 당한 뒤에야 신경 써드리지 못한 죄책감에 몹시 시달렸다. 새벽 2시에 궤연(几筵) 방에 혼자 꿇어앉자 방성대곡이 절로 터지고, 한 시간쯤 오열하다가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아침 6시, 마음이 한결 진정되어 장례절차를 무탈하게 마치고, 마음으로 보내드렸다. 부끄러운 개인사를 털어놓는 것은, 힐링이건 카타르시스건 간에, 비탄을 극복하는 길이 다양함을 이해하고 공유하는 것이, 누구에겐가 도움이 되고 의미가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떠나는 이의 두려움과 보내는 이의 비탄, 종교는 여기에 집단면역을 제공하고, 교인은 종교적인 울타리 안에서 ‘삶의 평온’이라는 은혜를 입는다. 제사장이 주재하고 신도가 모인 엄숙한 ‘의식(儀式)’을 통하여, 두려움과 비탄은 누그러지고 죽음은 경건한 ‘안식의 통과의례’로 수용된다. 우리 조상들도 주자가례에서 비롯한 초종범절을 종교의식처럼 지켜서, 고조부터 부모까지 사대봉사로, 기제사(奉祀·忌祭祀)마다 가신 분들을 기억하고 위로 드리는 의식을 가졌다. 4대 x 30은 120년.
 혼이 올라가고 백이 흩어진다 한들 그 누가 노여워할까? 한 울타리 안에서 삼대가 동거하던 대가족의 식구들은, 내가 가도 아들 손자 증손자가 제삿밥을 올리리라고 굳게 믿었다. 적어도 3대는 직접 대화와 스킨십을 나누던 사이요, 숱한 ‘기억’을 공유한다. 가까웠던 누군가의 기억에 남아있는 한 그 영혼을 살아있는 것 아닌가?
 맏이와 막내의 나이차를 합산하면 사대봉사에는 그렇게 절묘한 지혜가 숨어 있다.
 가족제도에 핵분열이 일어나고,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세배(歲拜)에 이르기까지, 지구촌의 장래에 대한 비관론이 대세다. 그러나 세계적인 추세인 폭군·악당 전성시대를 끝내고, 다음 세대를 위한 배려와 사랑의 울타리를 조금씩만 더 넓혀간다면, 지구촌의 앞날이 반드시 어둡지 만은 않을 것이다.

                                        
* 무역품 포도주는 주로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팔로미노 포도로 빚은 셰리주였다. 알코올 강화 포도주는 제법 혀끝이 짜릿하다.      

 

 

 

글: 임철중 
전 대한치과의사협회 대의원총회의장 
 임철중 치과의원 원장 

전 대전고등법원 민사조정위원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