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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중 칼럼

안식 이야기 5 : 흔들리지 않는

[임철중의 거꾸로 보는 세상] - <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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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실한 신자가 하늘나라로 갔다. 주님이 힐끗 보고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저기 앉아라.” 같은 교회 집사가 오자 반갑게 웃음으로 맞는다. 한참을 지나서 목사가 들어서니 버선발로 달려나가 와락 끌어안는다. 신자가 참다못해, “아니, 여기서도 인간을 차별합니까?” 따지니까, “그게 아니고, 목사가 천국에 온 건 백 년 만에 처음이니라.” 해묵은 우스개지만 교회가 회화화(戲畫化) 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유럽 여행 때 교회를 둘러보며 신도 수가 적은 데에 놀랐다. 서구 발(西歐發) 신도 감소문제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요, 오히려 대한민국 대형교회의 성장이 하나의 불가사의였는데, 그마저 코로나 직격탄과 한편으로는 정치적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사회의 대변혁 때마다 늘 그랬듯이, 종교는 4차 산업혁명, 특히 인공지능의 폭발적 진화에 대처도 해답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사이비 종교만 발호한다. 교회가 힘을 잃자 팬데믹을 기화(奇貨)로, 자유와 인권의 외연을 넓혀오던 자유민주주의가 독재 전체주의로 회귀하고, 역사와 문명의 수레바퀴는 역회전 중이다. 

 

   안식 이야기에 종교를 건너뛸 수 없으니, 혹시 비 종교인의 실수가 있어도 사전 양해를 구한다. 이천 년간 체제와 정통성을 지켜온 유일한 종교 가톨릭으로 얘기를 풀어보자. 먼저 사회변화에 항상 지각했던 역사가 있다. 진리를 독점한 마녀사냥, 숱한 생명을 앗아간 종교개혁, 살상과 수탈로 얼룩진 중남미 식민지, 산업혁명의 그늘에서 공산주의를 방치한 나태, 파시스트들과 짬짜미로 이차대전 방조의 의혹 등. 
 과거의 행위에 오늘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무리라고 하지만, 교황은 이러한 역사에 포괄적 사과를 한 바 있고, 흑 역사를 통하여 가톨릭의 영적 권위(Almighty Spiritual Dignity)도 조금씩 손상을 입었다. 반대로 변화에 한발 앞서간 역사도 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고향인 폴란드를 방문, 1989년 민주화운동에 기폭제가 되었다.
 베네딕토 16세는 동성애와 낙태문제에 보수적으로 접근하다가 선양(禪讓)을 했고, 후임은 남반구 최초의 프란치스코 교황으로, 결국 가톨릭에 두 개의 태양이 떴다.
 중남미는 진보적 종속이론과 도시산업선교회의 진원지 아닌가. 슈퍼 급 지도자가 실종한 세상에서, 이라크 방문 등 교황이 세속에 참여하는 광폭 행보가 바람직하다고는 해도, 이 또한 가톨릭의 신성(神性)이나 종교적 구심력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국 신비의 베일이 벗겨지기 때문이다. 광우병 난동에 촛불 들고 앞장섰던 정구 사제단이, 사기가 들통 난 뒤에 변변한 사죄라도 했던가? 사회변천에 발맞춰 일찍 진화한 개신교에도 구심력 상실 사례가 흔히 발견된다. 어렵게 건물을 마련한 개척 교회 목사와 집사 간 소송에 조정을 해본 적이 있다. A가 진술하면 B가 “오, 주여!”요, B가 정반대 주장을 하면 A가 “오, 주여!”한다. 분명히 ‘주님’은 한 분이실 텐데, 시각과 입장에 따라 해석이 다르다. 같이 걷는 도반(道伴)이 서운하다며 술 퍼마시고 절에 불을 지른 땡초 사미도 있다. IT 시대를 맞아 모든 비밀이 노출·공개되자 개인 신상(身上)도 종교의 신상(神像)도 탈탈 털리면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던 신도는 물론 종교인들마저 믿음이 흔들리는 조짐은 아닌지? 

 

   대전시가 확장되어 인근 어른들의 묘소가 불안해지자, 선친은 충북 현도에 산 8천 평을 매입하여, 당신이 가실 자리에 치표(置標)까지 하셨다. 묏자리를 미리 잡아 표적을 묻고 봉분까지 만들어 두신 것이다. 필자도 산 밑에 논(位畓) 두어 마지기를 사서 보탰다. 1979년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고는 생각이 바뀌셨다. 다음 해에 스텐트가 도입되었으나, 혈전증 문제로 아직은 시술이 불안했던 탓이다. 현도를 포기하고 공원묘원에 20위의 자리를 마련하여 고조부모부터 이장(移葬)을 시작하셨다. 어머님은 50이 되던 해에 두 분이 입고 가실 수의(壽衣)를 손수 장만하셨다. 3년 상을 치르고 정초 한식 중추 차례와 기일에 기제사 등, 매년 열 번이 넘는 의식을 갖는다.
 생활도덕 기준은, “죄를 지으면 죽어 무슨 낯으로 조상님들을 만나 뵈랴?”이고, 믿음의 상징은 ‘천지신명(天地神明)’이다. 우리 조상의 생활 속에는 신적 존재와 도덕규범과 의식(Ritual)의 엄중함, 그리고 죽음을 대하는 경건한 자세(Memento mori)에 이르기까지, ‘흔들리지 않는 종교’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글: 임철중 
전 대한치과의사협회 대의원총회의장 
 임철중 치과의원 원장 

전 대전고등법원 민사조정위원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