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지 역이나 환승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릴 때면 스크린 도어의 시에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광고판에 눈이 가듯, 꼼꼼히 읽지는 않아도 무심결에 쳐다보게 되는 것이지요. 2년 전 자유칼럼에 임철순 님이 쓴 지하철은 시집입니다에 의하면 서울 지하철 시는 2008년에 처음 등장했고 스크린 도어 설치 확대와 더불어 2011년에는 293개 전체 역에 4,500여 편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더 늘어났을 수도 있겠습니다. 임철순 님은 “스크린 도어의 투명 유리판에 붙여진 시는 ‘시가 흐르는 서울’을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서울시는 '서울의 지하철역은 시집입니다'라는 말로 일상 속의 문화향유 정책을 홍보하고 있습니다. 모든 시가 다 만족스러울 만큼 빼어난 것은 아니지만, 늘 이용하는 노선이나 역이 아닌 곳에 가면 일부러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스크린 도어를 훑어볼 만큼 나도 지하철 시에 관심이 많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글에는 또 시 선정은 어떻게, 누가 하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을 위해 서울시가 시인협회 등 문인 단체에 의뢰해 시를 추천 받아 편당 5만원의 작품 사용료도 지급하지만 자기 시가 소개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며 사례비를 마다하는 경우
여 동성애자 커플이 정자를 제공받아 아이 둘을 낳았으나 두 사람이 결별하게 되면서 정자 제공자까지 뒤늦은 양육권을 주장하는 ‘세 부모 양육권 분쟁’이 최근 호주 사회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사회 복지사인 레스비언 커플이 정자 제공으로 낳은 9, 11세 두 딸과 함께 한 지붕 아래 살다가 지난 2008년 두 사람이 헤어지면서 딸들을 낳은 여성, 즉 아이들의 생모(A)와 아이들의 아버지 역할이자 A의 남편 격이었던 동성 파트너(B), 두 아이의 생물학적 아버지인 정자 제공자(C)까지, 도합 세 명이 자녀들을 사이에 두고 힘을 겨룬 것입니다. A와 헤어진 후 아이 둘을 둔 여의사와 다시 동성애 관계에 들어간 B가 ‘전처(?)’ 사이에 낳은 두 딸을 자주 만날 수 없게 되자 정기적으로 아이들을 만날 수 있게 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하면서 분쟁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정자 제공자 C씨는 비록 친부로서 법적 지위는 없지만 생부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밝히고 아이들과 지속적으로 만나 왔고, A씨가 혼자된 후 보다 적극적으로 양육에 개입했으며 아이들도 그를 잘 따랐다고 합니다. 아이를 낳지도 않았고 생부까지 가까이 지내니 자녀들과의 관계에서 설 자리가 없어진 B가 존재감
저는 요즘 아들애와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일을 마치면 자정 가까이 집에 들어가지만 늦은 저녁을 한 술 뜨는 제 옆에 아들애가 슬그머니 자리를 잡으면 새벽 두 세시를 넘기는 것은 예사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부모 자식 간에 대화하는 일이 특별할 게 뭐냐고 하겠지만 아들애와 저와의 대화는 그저 대화가 아닙니다. ‘나는 방황한다, 고로 존재한다’ 는 명제를 붙여줘야 할 것만 같던 아들이, 머언 먼 길을 돌아와 이제는 마치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듯 제 옆에서 노란 꽃잎을 피우고 있으니까요. 이민 2세대 특유의 정체성 혼란과 타고난 예민함으로 생모를 찾아 헤매는 입양아마냥 ‘나는 누구인가’를 끈질기게 묻는 10대 아들의 처절한 몸부림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저는 그 무렵 이런 글을 썼습니다. 가정주부들의 화제는 그저 남편이나 아이들에서 맴돌게 마련인데, 특히 자식들 이야기는 온종일 한대도 지침이 없다. 아이가 갓 났을 때부터 자랄 때, 학교 다닐 때, 시집 장가가서 자식 낳아 기르는 거며, 그야말로 내 목숨 다할 때까지 숨차게 이어진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밥을 잘 먹네, 말을 잘 듣네 어쩌네 하다가 학교엘 들어가면 공부를 잘하네 못하네, 안달
유난히 하늘 푸른 요즘, 속된 말로 ‘뻑하면’ 소풍을 갑니다. 인근 국립공원의 광활한 숲 속을 신물나게 헤매다 산끝자락 물가 천렵에도 지치면 가끔씩은 새 맛으로 시내 나들이를 합니다. 집에서 40분이면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와 하버 브리지에서 놀다 올 수 있기 때문에 일정에 없다가도 물병 하나 챙겨 들고 불쑥 길을 나서곤 합니다. 시드니의 두 아이콘을 받치고 있는 투명 녹빛 바다가 가을 태양볕을 받아 뒤챌 때면 마치 수천 수만 개의 전구를 수면에 흩뿌린 채 불을 밝힌 듯 반짝입니다.봉숭아 꽃대처럼 발그레한 다리와 물갈퀴, 립스틱을 찍어 그린 듯한 눈과 부리를 제외하곤 온몸을 보얗게 표백한 것 같은 갈매기들도 망망한 태평양을 가슴에 안고 도도한 자세로 고개를 곧추세웁니다. 외모도 외모지만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 때문인지 갈매기는 참새나 비둘기 따위와는 견줄 수 없는 고고한 구석이 있어 보입니다. 조류 가운데 갈매기에서 유독 ‘창조,가능성, 잠재력,영혼, 자유, 비상’ 등의 형이상학적 단어들을 연상하게 되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웬걸, 가까이서 잠시만 관찰해도 그네들의 그 소란스러움과 천격스러움에 인간의 지적 상상력과 영적 감수성이 투사된 고상한 이미지
엊그제 스마트 폰을 장만했습니다. 그간 주위에서 왜 스마트 폰 없이 사냐고 물을 때면 “ 사람이 스마트하니 전화는 좀 덤(dumb- 모자란, 멍청한)해도 괜찮습니다.”라며 농으로 넘기곤 했습니다. 실은 붙박인 듯 일상이 단순하기 때문에 스마트 폰이 없어도 아무 불편을 못 느낀다는 것이 진짜 이유이지만요. 오는 전화 받고, 필요한 전화 걸 수 있는 것으로 휴대 전화기의 용도는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또 다른 이유입니다. 지인 중에는 스마트 폰은 고사하고 휴대 전화 자체를 소유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데 그분은 스스로 이 시대의 마지막 아날로그 형 인간으로 남고자 하는 몸부림 같은 거라고 했습니다. 휴대전화를 지니지 않음으로 해서 거기에 매이지 않는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을 덧붙여. 그 정도는 아니라 해도 저 역시 시간을 도막내고 종당엔 가루로 만들어 버릴 듯, 매 순간 집중력을 흩트리는 스마트 폰에 이리저리 끌려다니지 않으려고 지금껏 구식 전화기를 고수해 왔던 게 사실입니다. 스마트 폰을 가지는 순간, 스스로 더 외로워지고, 더 허전해지고,더 공허해진다는 것을, 주변을 더 외롭게 하고, 더 허전하게 하고, 더 공허하게 만든다는 것을 타인들을 통해 충분
요즘 한국은 난데없이 ‘갑을 관계’ 공방이 한창입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고 쥐도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더니 갑의 횡포에 숨소리도 못 내고 살아온 을이 생존의 올가미에 걸려 쌓이고 쌓였던 분노를 걷잡을 수 없이 토해내고 있습니다. 분야에 따라서는 그냥 갑도 아닌 ‘슈퍼 갑’이 존재한다니, 그로 인해 자살까지 하게 된다니 한국 사회가 그 정도까지 정도(正道)를 벗어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정도를 지나 기괴스럽기조차 합니다. 3년 전, 제 경험을 바탕으로 자유칼럼에 ‘갑도 을도 아닌 것이’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말장난을 한 것 같아 실제 고통을 겪는 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저는 그때 “군림하고 군림당하는, 지배하고 복종하는, 승자와 패자가 극명히 구분되는 현실 구조 속에서도 한 가지 공평한 것은 갑도 을도 삶이 혼돈스럽고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란 점입니다. 경쟁과 욕망으로 점철된 현실의 삶에만 코 박고 있는 한, 한순간도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둘은 공평하게 불행하며, 기쁨은 찰나적일 뿐, 허다한 시간이 공허와 허무로 메워지는 것도 똑같습니다. 반짝 의욕이 생기는듯 하다가 이내 좌절의 나락에서 뒹구는
늘상 다니는 동네 마트 앞에 가면 주인을 따라 산보를 나왔다가 주인이 장을 보는 동안 밖에서 기다리는 개들을 볼 수 있습니다. 마트 안으로는 개를 데리고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입구 기둥에 잠깐 묶어 두고 얼른 장을 보고 오는 것입니다. 개를 무척 좋아하는 저는 ‘마트 앞 기둥 나들이’를 즐겨합니다. 개들의 지루함도 덜어줄 겸, 가능하다면 나쁜 사람들의 해코지도 막아줄 겸,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그네들과 노는 것입니다. 길면 20분, 짧으면 5분가량 기둥에 묶인 채 주인을 기다리는 개들의 태도는 대략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주인이 자리를 뜨기 무섭게 낑낑 신음을 하고 온 몸을 발발 떨어대며 불안과 초조로 일관합니다. 겁이 나는 상황을 벗어나 보려는 몸부림으로 깡깡 짖어대지만 그럴수록 두려움과 공포에 압도됩니다. 처음부터 천애고아였던 듯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주인이 있다는 사실조차 믿으려 하질 않아 보입니다. 성마르고 예민함이 지나쳐 패닉과 공황 상태에 빠져 불행해하는 이런 개들과는 함께 시간을 보내는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관심을 보이며 안심을 시키려 해도 소용없으니 그저 측은하게 바라볼 밖에요. 두 번째는 주인이 등을 돌리자마자 헤프게
제가 낸 책 중에 호주에 살면서 틈틈이 기록한 우리 가족과 이웃의 이민생활 이야기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이 있습니다. 여러 편의 글 중에 복잡하고 경쟁 심한 한국과 비교하면 두루 살기 좋은 호주는 말 그대로 천국인데 이질 문화와 정서상의 걸림을 생각하면 ‘심심한’ 천국이요, 비리와 사고로 편할 날이 없는 한국은 꼭 지옥같지만 그래도 말과 정서가 통하고 볼 것도 많고 갈 곳도 많아 시끌벅쩍 정신없이 돌아간다는 뜻에서 ‘재밌는 지옥’이라는 내용이 있는데, 그 글의 제목을 책의 제목으로 사용했습니다. 우스갯소리에서 따온 책제목이 뜻밖에 인구에 회자되면서 호주만 ‘심심한 천국’이 아니라 뉴질랜드도 그렇고, 캐나다도 그렇고, 미국도 그렇다는 식의, 이른바 한국보다 생활 환경이 나은 나라에 사는 한국 이민자들의 ‘고국과의 비교 공감어’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그 책을 낸 지 12년이 지난 지금, 다른 나라는 어떤지 몰라도 단언컨대 호주는 더 이상 ‘심심한 천국’이 아닙니다. 그 동안 저와 한국 이민자들이 이국 문화에 멋들어지게 적응해서 남의 나라에 살아도 더 이상 소외감을 느끼거나 심심하지 않게 되었대서가 아니라 살기가 너무 팍팍해지고 부대끼게 되어 이제는 ‘천국
서울에 머무는 동안 친정 조카들한테서 얻어 쓰고 있는 컴퓨터가 무슨 이유에선지 ‘ㅃ ㅉ ㄸ ㄲ ㅆ’ 등 된소리를 못 내는 통에 지금은 피시방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갑자기 ‘된소리’를 못하니 ‘된서리’를 맞아 못 먹게 된 푸성귀처럼 이렇게 말해도 안 되고 저렇게 표현해도 말이 안 되는, 된소리 없이는 한 문장도 완성하기가 몹시 어렵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나사 빠진 사람처럼 어리숙하고 얼뜨고 바보 같고 답답해서 자다가 매번 남의 다리 긁는 느낌입니다. ‘아빠’는 ‘아바’ 대신 ‘아버지’라 할 수 있지만, ‘빨리 빨리’ 할 것을 ‘발리 발리’라고 하니 '빠른 감'이 하나도 안 옵니다. ‘때문에’를 ‘대문에’라 하고 ‘똘똘’ 뭉칠 것도 ‘돌돌’ 뭉칠 수밖에 없습니다. ‘오바의 달’은 ‘오빠의 딸’로 문맥상 새겨들어 줄 것을 호소합니다. 무엇보다 오랜만에 한국에 왔으니 지인들에게 눈부신 서울의 모습을 전하고 싶은데 ‘우둑우둑’ 선 빌딩, ‘비가번적’한 거리 등, 나사 ‘바진’ 소리만 ‘자구자구’ 하게 되니 미칠 노릇입니다. 이 지경이니 된소리 없이 전할 수 있는 말은 ‘자장면’뿐인 것 같습니다. 그조차 '짜장면'도 맞는 말이라는 전제 하에 그렇지만. 저의 고충
“주소가 어떻게 되세요? 우편번호는 몇 번이시구요? 티켓은 내일이면 나오시구요, 공항세는 320불이세요, 지난 달까지는 270불이셨는데 이번 달부터 50불이 오르셨어요.” 한국에 가는 큰애의 비행기표를 구하기 위해 대한항공에 발권 문의를 했습니다. 몇 차례 변동이 생겨 세 번 통화를 하고 마지막으로 표를 찾을 때까지 다섯 담당자들과 연결이 되었지만 단 한 명을 빼고는 주어와 주체가 무엇이든 마구잡이로 모든 술어를 경어체로 말했습니다. 그네들의 해괴한 말법이 귀에 거슬려 도통 집중을 할 수가 없어 옆에 있었다면 정말이지 한 대 쥐어박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내용만 알아들으려 해도 손톱 거스러미처럼 자꾸 신경이 쓰여 대화 내내 은근히 화가 났습니다. 우스개로 옛날, 갓 상경한 어떤 촌사람이 말끝이 상냥한 서울 말씨를 흉내내려다가 푸줏간에서 “돼지고기 계세요?”라고 실수를 했다더니 이제는 그런 식의 우스운 말이 일상화되었으니 말입니다. 그 중에서 올릴 때 올릴 줄 알고 그대로 두어야 할 때 둘 줄 아는 단 한 명이 그렇게 대견하고 귀하게 여겨질 수가 없었습니다. 요즘 세대들의 혼탁하기 그지없는 언어환경에서 어찌 그리도 독야청청 올곧게 우리말을 구사할 수 있는지 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