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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연 칼럼

글 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

[신아연의 공감]- ⑤

서울에 머무는 동안 친정 조카들한테서 얻어 쓰고 있는 컴퓨터가 무슨 이유에선지 ‘ㅃ ㅉ ㄸ ㄲ ㅆ’ 등 된소리를 못 내는 통에 지금은 피시방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갑자기 ‘된소리’를 못하니 ‘된서리’를 맞아 못 먹게 된 푸성귀처럼 이렇게 말해도 안 되고 저렇게 표현해도 말이 안 되는, 된소리 없이는 한 문장도 완성하기가 몹시 어렵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나사 빠진 사람처럼 어리숙하고 얼뜨고 바보 같고 답답해서 자다가 매번 남의 다리 긁는 느낌입니다.

‘아빠’는 ‘아바’ 대신 ‘아버지’라 할 수 있지만, ‘빨리 빨리’ 할 것을 ‘발리 발리’라고 하니 '빠른 감'이 하나도 안 옵니다. ‘때문에’를 ‘대문에’라 하고 ‘똘똘’ 뭉칠 것도 ‘돌돌’ 뭉칠 수밖에 없습니다. ‘오바의 달’은 ‘오빠의 딸’로 문맥상 새겨들어 줄 것을 호소합니다.

무엇보다 오랜만에 한국에 왔으니 지인들에게 눈부신 서울의 모습을 전하고 싶은데 ‘우둑우둑’ 선 빌딩, ‘비가번적’한 거리 등, 나사 ‘바진’ 소리만 ‘자구자구’ 하게 되니 미칠 노릇입니다. 이 지경이니 된소리 없이 전할 수 있는 말은 ‘자장면’뿐인 것 같습니다. 그조차 '짜장면'도 맞는 말이라는 전제 하에 그렇지만.

저의 고충 아닌 고충을 전해들은 한 지인은 ‘야, 이 나븐 놈아, 대려죽일 녀석, 돼지 새기, 덕두거비,’ 라는 말을 나열하며 가만 보니 욕 중에서 유독 된소리가 많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분은 그래도 미끄러운 눈길에 ‘꽈당’ 넘어지지 않고 ‘과당’ 넘어진다면 덜 아프고 덜 다칠 거라고 저를 위로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짜고 매운 자극성 음식처럼 우리말의 된소리도 밍밍한 말에 자극을 주고 맛을 내는 역할을 하나 봅니다.

간기 없는 맹탕 같기도 하고, 벙어리장갑 낀 손이나 김 서린 안경 너머의 감각 같기도 한 된소리 없는 자판을 두드린 지 어언 한 달, 이 없으면 잇몸이라고 된소리를 되도록 피하기 위해 같은 의미, 유사한 뜻을 담은 단어와 표현을 찾아 쓰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빼라’할 것을 ‘지우라’고 하거나 ‘나 대문에’ 할 것을 ‘나로 인해’ 따위로 표현하면서 어휘도 다양해졌지만 글에서 된소리가 사라지면서 시나브로 ‘경화’된 마음도 부드럽게 풀어지는 걸 경험합니다. 말이 순화되자 심성도 착해졌다고 할까요, 부들부들해진 마음이 꼭 노전에서 파는 버터구이 오징어나 눌러 놓은 문어 다리 맛 같습니다. 합죽 할멈 입 속의 삭은 밥알처럼 무력하지만 폭신폭신한 세계가 내면에 새로 들어차는 느낌도 있구요.

이번에 낸 책의 제목은 ‘글 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입니다. 처음에는 책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출판사와 설왕설래를 했더랬습니다. ‘밥 짓는 여자’라는 말이 싫었던 것입니다. ‘집에서 밥이나 하는 아줌마가 아닌, 그럴 듯하고 고상한 캐릭터를 가진 여자의 글’로 보이고 싶은 허황된 심리가 제 속에 있었던가 봅니다. 내심 ‘흥, 날 뭘로 보길래, 내가 왜 밥하는 여자야?’ 라며 뾰로통하니 심사가 꼬인 거지요.

그러다 이제는 그 제목이 좋아졌는데, 곰곰 생각해 보면 ‘된소리’의 영향이 아닌가 싶습니다.
글에서 된소리가 빠지면서 마음까지 착해지고 순해진 느낌이 들었던 것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책의 제목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있는 척, 아는 척, 잘난 척 뻐기고 싶었던 ‘마음 속 된소리’가 힘을 잃고 잦아든 탓입니다.

‘밥’이란 실상 ‘삶’이 아닌가요? 한 끼니의 밥을 얻기 위해 일평생 고생하며 흘린 눈물이 얼마이며, 밥 한 그릇에 팔아버린 양심과 저버린 책무, 외면한 진실은 또 얼마인가요. 신산하고 고단한 삶이든 허풍스레 탐욕적인 삶이든 결국 ‘밥’, 그 이상의 사연을 담지는 못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밥’은 밋밋하나 소중한 일상이며 애면글면 이어가는 생명의 원천입니다. 더구나 단순히 밥을 ‘하는’ 게 아니라 ‘짓는’ 일임에야…

밥을 ‘짓는’ 일은 삶을 ‘짓고’ 생을 ‘짓는’ 일이니까요. 자기 생을 ‘지어가는’ 사람은 본능과 감정에 끄들리며 되는 대로 '반응하는' 사람이 아닐 테지요. 애초 설계도면을 바탕으로 세워진 집과 마구잡이로 얽은 움막이 같을 수 없듯이 밥을 ‘하는’ 일과 ‘짓는’ 일도 그처럼 엄연히 구분될 것입니다.

책 제목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니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제목이 오히려 과분하게 느껴집니다. 내 삶, 내 생인 ‘밥’을 지금까지 제대로 지어왔나 하는 부끄러운 성찰을 해봅니다. 행여 글 쓰는 여자는 못된다 해도 죽을 때까지 ‘밥 짓는’ 여자로는 살아야겠다는 속 다짐과 함께 말입니다.

 

 

필자 신아연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1992년 호주로 이민, 호주 동아일보 기자, 호주 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을 거쳐 지금은 같은 신문의 편집위원이다.
시드니에서 프랑스 레스토랑 비스트로 메메 www.bistromeme.com 을 꾸리며 한민족 네트워크, 두란노 아버지학교, 부산일보 등 다양한 매체에 글을 쓰고 있다.
이민생활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글 쓰는 여자 밥 짖는 여자>,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을 냈다.

블로그 http://blog.naver.com/shinayo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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