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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연 칼럼

사랑은 믿어주는 것

[신아연의 공감]- ⑫

 

저는 요즘 아들애와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일을 마치면 자정 가까이 집에 들어가지만 늦은 저녁을 한 술 뜨는 제 옆에 아들애가 슬그머니 자리를 잡으면 새벽 두 세시를 넘기는 것은 예사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부모 자식 간에 대화하는 일이 특별할 게 뭐냐고 하겠지만 아들애와 저와의 대화는 그저 대화가 아닙니다.

‘나는 방황한다, 고로 존재한다’ 는 명제를 붙여줘야 할 것만 같던 아들이, 머언 먼 길을 돌아와 이제는 마치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듯 제 옆에서 노란 꽃잎을 피우고 있으니까요.

이민 2세대 특유의 정체성 혼란과 타고난 예민함으로 생모를 찾아 헤매는 입양아마냥 ‘나는 누구인가’를 끈질기게 묻는 10대 아들의 처절한 몸부림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저는 그 무렵 이런 글을 썼습니다.

 

<가정주부들의 화제는 그저 남편이나 아이들에서 맴돌게 마련인데, 특히 자식들 이야기는 온종일 한대도 지침이 없다. 아이가 갓 났을 때부터 자랄 때, 학교 다닐 때, 시집 장가가서 자식 낳아 기르는 거며, 그야말로 내 목숨 다할 때까지 숨차게 이어진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밥을 잘 먹네, 말을 잘 듣네 어쩌네 하다가 학교엘 들어가면 공부를 잘하네 못하네, 안달복달 각양각색의 화제를 이어가지만 결국은 내 기쁨의 원천은 내 새끼이며, 내 삶의 존재 이유는 자식이라는 것을 거듭거듭 확인하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 말 그대로 '그대 있음에 내가 있는' 것이다.

어미된 자로서, 특히 한국 어미로서 자식과 나는 나눌 수 없는 한 덩어리라는 신념을 깨기란 어쩌면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한 덩어리에 차츰 균열이 가기 시작하는 듯한 낌새를 알아차리기도 여간해서 쉽지 않다.

"딸애한테 며칠 전 티셔츠를 사다 줬더니 얘가 이러는 거야, '엄마, 이 옷은 왠지 내 스타일이 아닌 것 같아, 그리고 앞으로는 내 옷은 내가 직접 샀으면 좋겠어.' 제 딴엔 조심스레 꺼낸 말이었지만 듣자니 참 황당하데… 엊그제까지만 해도 내가 골라주면 무조건 예쁘다고 하던 애였는데."
"자기 친구들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러쿵저러쿵하지 말라고 퉁명스레 말하더니, 밖에서 놀다가도 집에 들어가 엄마 얼굴 볼 생각하면 숨이 턱 막힌다며 한술 더 뜨는 거야, 글쎄."

대학 2학년 딸과 사춘기에 접어든 10대 아들을 둔 친구들이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자식들의 태도변화가 황당하기 그지없다며 쏟아낸 하소연들이다.
"우리 아무개는 아직도 엄마밖에 몰라. 누굴 만나는지, 무슨 이야길 하는지, 어딜 가는지 꼭 나한테 보고하고, 옷 입는 거나 머리 모양이나 모두 내 맘에 들게 하고 다니잖아."

자기 옷은 자기가 고르고 싶다는 딸의 말에 충격을 받아 상심하고 있는 친구에게, 또 다른 친구는 자기 아들은 대학생임에도 아직도 자기 품 안에서 천진난만 노닌다며 만족과 안도를 표했다.

앞의 친구가 자식의 '반란'으로 인해 자기 존재와 정체성의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을 불안해하고 있다면, 나중 친구는 반석같이 든든한 변함없는 자신의 존재감을 재확인했다는 뜻이리라.

그렇다면 함께 있던 내 경우는 어땠는가. 친구들과 같은 또래의 두 아이가 있음에도 그날 모임에서 '왕따'를 당할 수밖에 없었던 내 경우는, 자식과 한 덩어리란 믿음에 틈새고 균열이고 감지할 짬도 없이 한순간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린 경우였다.

미성년인 두 아이를 품에서 잃은 후 애지중지 키우던 화초의 중턱이 예고도 없이, 여지도 없이 갑자기 잘려나간 듯 아리고 쓰라렸다. 나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존재가 난데없이 찢겨져 나간 자리의 상처와 상실감은 어미로서의 밑도 끝도 없는 책망과 우울감으로 이어지면서 나라는 존재의 무가치함과 수치심마저 느끼게 했다. 하지만 힘든 시간과 전쟁을 치르며 아들 아이처럼 어쩌면 나 역시 나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을 더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해거름 어둑한 거실 창가에 서서 나는 묻는다. 도대체 언제 떠나야 가슴 아프지 않겠느냐고. 대학생 딸에게 아직도 내가 사 준 옷을 입히고 싶고, 직장을 가진 자식도 한 지붕 아래 그냥 있었으면 한다면,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모여 있어야만 직성이 풀릴까.

사랑은 상대와 내가 하나되는 것임에도 부모 자식간의 사랑은 두 존재가 완전히 분리될 때 비로소 완성되는 역설적 개념이 아닐까. 몸뚱이만이 아니라 심리적, 정서적으로 온전히 떠나보낼 때 둘의 사랑은 평온하고 아름답다.

자식 가진 여자라면 누구나 한번은 완전한 별리의 격렬한 아픔을 통과해야 하지만, 그 서럽고 낯선 상실감은 결국 '자신과의 조우'를 준비케 하는 내면의 배려였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

 

떠났을 때의 아들과 돌아온 아들은 제게는 다른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그 아이에게 저는 어떤 엄마일까요. 엊그제 아들애가 혼잣말처럼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랑은 믿어주는 거지, 끝까지 믿어주는 것, 그게 사랑이야.”

엄마가 자기를 믿고 끝까지 기다려주었다는 뜻인지, 아니면 자기를 사랑한다면 그랬어야 했다는 뜻인지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어쨌거나 저는 지금 아이와 더불어 행복합니다.
 

 

필자 신아연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1992년 호주로 이민, 호주 동아일보 기자, 호주 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을 거쳐 지금은 같은 신문의 편집위원이다.
시드니에서 프랑스 레스토랑 비스트로 메메 www.bistromeme.com 을 꾸리며 한민족 네트워크, 두란노 아버지학교, 부산일보 등 다양한 매체에 글을 쓰고 있다.
이민생활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글 쓰는 여자 밥 짖는 여자>,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을 냈다.

블로그 http://blog.naver.com/shinayo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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