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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연 칼럼

꿈을 잃은 갈매기들

[신아연의 공감]- ⑪

 

유난히 하늘 푸른 요즘, 속된 말로 ‘뻑하면’ 소풍을 갑니다. 인근 국립공원의 광활한 숲 속을 신물나게 헤매다 산끝자락 물가 천렵에도 지치면 가끔씩은 새 맛으로 시내 나들이를 합니다.
집에서 40분이면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와 하버 브리지에서 놀다 올 수 있기 때문에 일정에 없다가도 물병 하나 챙겨 들고 불쑥 길을 나서곤 합니다.

시드니의 두 아이콘을 받치고 있는 투명 녹빛 바다가 가을 태양볕을 받아 뒤챌 때면 마치 수천 수만 개의 전구를 수면에 흩뿌린 채 불을 밝힌 듯 반짝입니다.봉숭아 꽃대처럼 발그레한 다리와 물갈퀴, 립스틱을 찍어 그린 듯한 눈과 부리를 제외하곤 온몸을 보얗게 표백한 것 같은 갈매기들도 망망한 태평양을 가슴에 안고 도도한 자세로 고개를 곧추세웁니다.

 

외모도 외모지만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 때문인지 갈매기는 참새나 비둘기 따위와는 견줄 수 없는 고고한 구석이 있어 보입니다. 조류 가운데 갈매기에서 유독 ‘창조,가능성, 잠재력,영혼, 자유, 비상’ 등의 형이상학적 단어들을 연상하게 되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웬걸, 가까이서 잠시만 관찰해도 그네들의 그 소란스러움과 천격스러움에 인간의 지적 상상력과 영적 감수성이 투사된 고상한 이미지는 저만치 물러가고, 염치없고 뻔뻔한 바닥 상것 같은 본색이 금방 드러납니다. 그저 온종일 먹잇감 앞에 다투고 경쟁하며 서로 상처를 내는 그악스런 본성 속에 고단하고 질 낮은 생명을 이어가는 존재로 보일 뿐입니다.

특히 호주 갈매기들은 사시사철 관광객 밥 얻어먹는 데 길들여져 많은 숫자가 스스로 먹이 잡는 법을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사람이 음식 부스러기를 던져주지 않으면 굶어죽는 걸로 갈매기 자신이 정말 믿고 있다면 하루하루 연명을 위해 얼마나 치열하고 비참하게 몰두해야 할지 상상이 가고도 남습니다.

 

그날 저는 패스트 푸드 점에서 무심코 햄버거를 하나 사 먹다가 갈매기 떼에게 봉변을 당할 뻔 했습니다. 햄버거와 감자칩이 든 봉지를 들고 가게를 나설 때부터 두어 마리가 미행하듯 따라 붙는 낌새를 느꼈지만 그러려니 했는데 햄버거를 먹으려고 벤치에 앉으니 종횡으로 도열한 수십 마리 갈매기들이 사열이라도 받을 자세로 저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닙니까. 마치 제가 그 자리에 앉을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마치 수업을 듣는 학생들 마냥 세어보니 칠, 팔십 마리는 좋이 되는 갈매기들이 그때부터 일제히 햄버거를 뜯는 제 입을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습니다. 개중에 몇 마리가 제 손에 쥐어져 있는 햄버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저와 간격을 좁혀 올 땐 히치콕 감독의 영화 <새>에 나오는 여주인공의 공포가 그대로 전달돼 빵을 문 채로 오금이 저렸습니다. 만약 그 중에서 단 한 마리가 내게 먼저 달려든다면 나머지도 순식간에 나를 덮칠 것이라는 상상에 차라리 햄버거를 포기하고 갈매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해야 하지 않을까 갈등했습니다.

그때 마침 옆 벤치에 음식 봉지를 가진 다른 사람이 왔고 갈매기들은 순식간에 그 쪽으로 자리를 이동했습니다. 옆 사람 덕에 일단 위기를 벗어나 심호흡으로 여유를 되찾으니 중뿔나게 움직이는 갈매기들 꼴이 과목 따라 이동 수업을 하는 학생들 같아 같잖은 웃음이 나왔습니다.

 

벤치 앞을 왕복하며 사람들이 이따금 먹이를 던져줄 때면 삽시간에 뒤엉겨 아비규환을 벌이는가 하면, 무리 중에 약간 몸집이 크거나 다소 불량기가 있어 보이는 것들은 주변의 약해 보이는 것들을 부리로 구박하며 내쫓는 시늉을 하거나 깃털을 부풀려 겁을 주면서 공연히 시비를 걸었습니다.

오페라 하우스와 하버 브리지가 위치해 있는 바다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시내 초입에서 벌어지는 갈매기들의 생존 경쟁은 요즘 흔히 말하는 ‘블루 오션’과 ‘레드 오션’을 연상케 했습니다.

코 박고 있는 현실에서 잠깐 시선만 돌리면 문자 그대로 ‘블루 오션’이 펼쳐져 있건만, 게으름과 타성, 두려움과 고정관념에 젖어 치열한 경쟁으로 피빛 얼룩이 진 ‘레드 오션’에서 허우적대는 갈매기들이 불쌍했기 때문입니다.

그날 이후,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처럼 저 녀석들도 저 푸른 대양을 높이, 더 높이 날아 오르게 하여 저 아름다운 생명의 바다로 되돌려 보낼 수는 없는 건지, 갈매기 본연의 고상하고 우아한 이미지를 되찾아 줄 수는 없을지 지금껏 생각 중입니다.

 

필자 신아연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1992년 호주로 이민, 호주 동아일보 기자, 호주 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을 거쳐 지금은 같은 신문의 편집위원이다.
시드니에서 프랑스 레스토랑 비스트로 메메 www.bistromeme.com 을 꾸리며 한민족 네트워크, 두란노 아버지학교, 부산일보 등 다양한 매체에 글을 쓰고 있다.
이민생활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글 쓰는 여자 밥 짖는 여자>,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을 냈다.

블로그 http://blog.naver.com/shinayo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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