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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연 칼럼

“돼지고기 계세요?”

[신아연의 공감]- ④

 “주소가 어떻게 되세요? 우편번호는 몇 번이시구요? 티켓은 내일이면 나오시구요, 공항세는 320불이세요, 지난 달까지는 270불이셨는데 이번 달부터 50불이 오르셨어요.”

한국에 가는 큰애의 비행기표를 구하기 위해 대한항공에 발권 문의를 했습니다. 몇 차례 변동이 생겨 세 번 통화를 하고 마지막으로 표를 찾을 때까지 다섯 담당자들과 연결이 되었지만 단 한 명을 빼고는 주어와 주체가 무엇이든 마구잡이로 모든 술어를 경어체로 말했습니다.

그네들의 해괴한 말법이 귀에 거슬려 도통 집중을 할 수가 없어 옆에 있었다면 정말이지 한 대 쥐어박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내용만 알아들으려 해도 손톱 거스러미처럼 자꾸 신경이 쓰여 대화 내내 은근히 화가 났습니다.
우스개로 옛날, 갓 상경한 어떤 촌사람이 말끝이 상냥한 서울 말씨를 흉내내려다가 푸줏간에서 “돼지고기 계세요?”라고 실수를 했다더니 이제는 그런 식의 우스운 말이 일상화되었으니 말입니다.

그 중에서 올릴 때 올릴 줄 알고 그대로 두어야 할 때 둘 줄 아는 단 한 명이 그렇게 대견하고 귀하게 여겨질 수가 없었습니다. 요즘 세대들의 혼탁하기 그지없는 언어환경에서 어찌 그리도 독야청청 올곧게 우리말을 구사할 수 있는지 마치 오염되지 않은 청정수를 대하는 것 같았습니다.

며칠 전 한인이 경영하는 동네 일식당에 갔을 때였습니다.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나르는 동안 말끝마다 돕겠다며 부자연스럴 정도로 예의롭게 구는 태도가 밉살스럽던 차에 음식값을 치르려 할 때 “계산 도와드리겠습니다, 손님.” 하는 소리에 기어이 한마디가 나왔습니다.“계산은 나도 할 줄 아니까 그것까지 도와 줄 건 없어요.” 밥 한 그릇 사먹는 걸 가지고 뭘 자꾸 도와준다고 하니 듣기가 영 거북했습니다.

그렇다고 엉터리 말하기가 요즘 세대들만의 심각한 문제는 아닌가 봅니다. 어떤 여자가 TV 토크쇼에 나와서 “저 같은 경우는 52세이고 남편 같은 경우는 54세예요.”라고 했다니 낫살이나 먹은 사람도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저는 52세고, 남편은 54세예요.”라고 왜 못할까요.

‘기분이 좋은 것 같다’거나 ‘예쁜 것 같다’는 말로 자기 감정이나 느낌을 표현하는 것을 두고 “ 지가 좋으면 좋고, 지 눈에 예쁘게 보이면 예쁜 거지, ‘같다’는 건 또 뭐냐”며 핀잔을 주는 사람도 있지만 요즘의 언어혼란 사태에 비춘다면 그 정도는 약과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정적 표현으로 쓰여야 하는 ‘너무’가 ‘너무’ 오용되다보니 이제는 ‘너무 예쁘다’ 고 하거나 “기분이 너무 좋다”고 해도, 너무 예뻐서 오히려 좋지 않게 느껴진다고 해석하거나 기분이 너무 좋아서 불쾌할 지경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듯이 말입니다.

이민와서 아이들이 어렸을 때 존댓말을 가르치느라 또래 부모들이 애를 먹은 기억이 납니다. 어려운 말법에 스트레스를 받은 저희들끼리 무조건 말끝에 ‘요’자를 붙이는 것으로 “존댓말 공부 끝”하는 바람에 한바탕 웃곤 했는데 “엄마는 시장 갔다요, 할머니 안 계시다요, 나는 모른다요.” 하는 식이었습니다.
요즘은 이 말이 ‘역이민’을 했는지 한국에 사는 아이들도 이렇게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요즘은 인터넷 탓에 어느 곳에 살든 한국의 같은 세대들끼리 연합하고 더불어 우리말을 파괴하고 있으니 차라리 고립된 이민 환경에 놓여 있던 한 세대 전 이민 자녀들의 한국어 구사가 가장 올바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전에도 같은 주제로 글을 쓴 적이 있지만 영어식으로 말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생각에 이번에도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한된 우리말 환경에 있는 제 경험도 이 정도이니 한국에서 경험하는 우리말의 파괴 정도는 말해 뭣하겠습니까.

우리말이 이렇게 잘못 사용되고 있는 것이 매우 걱정스럽고 이런 상황이 결국 고착될 것이라 생각하면 답답하고 절망스럽습니다. 이제는 저처럼 말이나 글을 통해 개인적으로 한 번씩 ‘강조’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회적, 제도적, 교육적으로 젊은 세대, 다음 세대들의 잘못된 말법을 고쳐주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과 장치가 마련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장 간단하고 쉽게는 국어 시험에 올바른 문법과 회화 문제를 집중해서 내면 될 것 같은데 대입시를 위한 국어 교육에는 그것이 하나도 안 중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글: 신아연

신아연은 1963년 대구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1992년부터 호주에서 살면서 호주동아일보 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을 거쳐

지금은 같은 신문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한국의 신문, 잡지, 인터넷 사이트, 방송 등에

호주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블로그 http://blog.naver.com/shinayoun 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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