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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연 칼럼

우울한 천국

[신아연의 공감]-⑥

제가 낸 책 중에 호주에 살면서 틈틈이 기록한 우리 가족과 이웃의 이민생활 이야기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이 있습니다.

여러 편의 글 중에 복잡하고 경쟁 심한 한국과 비교하면 두루 살기 좋은 호주는 말 그대로 천국인데 이질 문화와 정서상의 걸림을 생각하면 ‘심심한’ 천국이요, 비리와 사고로 편할 날이 없는 한국은 꼭 지옥같지만 그래도 말과 정서가 통하고 볼 것도 많고 갈 곳도 많아 시끌벅쩍 정신없이 돌아간다는 뜻에서 ‘재밌는 지옥’이라는 내용이 있는데, 그 글의 제목을 책의 제목으로 사용했습니다.

우스갯소리에서 따온 책제목이 뜻밖에 인구에 회자되면서 호주만 ‘심심한 천국’이 아니라 뉴질랜드도 그렇고, 캐나다도 그렇고, 미국도 그렇다는 식의, 이른바 한국보다 생활 환경이 나은 나라에 사는 한국 이민자들의 ‘고국과의 비교 공감어’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그 책을 낸 지 12년이 지난 지금, 다른 나라는 어떤지 몰라도 단언컨대 호주는 더 이상 ‘심심한 천국’이 아닙니다.

그 동안 저와 한국 이민자들이 이국 문화에 멋들어지게 적응해서 남의 나라에 살아도 더 이상 소외감을 느끼거나 심심하지 않게 되었대서가 아니라 살기가 너무 팍팍해지고 부대끼게 되어 이제는 ‘천국’이라는 말 자체가 무색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호주는 아직도 지구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라고들 하니 꼭 ‘천국’ 타이틀을 고집해야겠다면 ‘ 우울한 천국’ 내지는 ‘궁색한 천국’, 나아가 '암울한 천국', '비참한 천국'으로 전락시켜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낮은 잿빛 하늘의 음울한 겨울 날씨 탓이라고 하기엔 너남없이 쪼들리는 살림살이의 체감 온도가 너무 낮습니다. 수지를 맞추지 못해 상가마다 빈 점포가 늘어나고 그러다 건물이 통째로 비며 그 일대가 유령 거리화되는 현상이 마치 도심 속의 마른 버짐처럼 번져갑니다. 그나마 꾸려가고 있는 가게들도 당장 닫을 수는 없으니 마지못해 열어 둔다는 한숨을 섞어 원가에도 못 미치는 세일에 세일을 단행하지만 그나마 경쟁이 심해 박리다매도 옛말입니다. 그러니 살아남기 위해 비용 절감 등으로 안간힘을 쓰는 업주들의 눈치를 보며 품삯에 의지하여 하루하루 연명하는 삶도 안쓰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한 학생들이나 수입이 변변찮은 노동자들은 살인적인 집세, 방세와 교통비 등 꼭 써야 할 곳으로 돈이 다 들어가 버려 빵 한 조각으로 끼니를 때우거나 한 끼쯤 굶는 일도 예사라고 합니다.

전기나 가스, 물 같이 사는 데 꼭 필요한 자원은 기본적으로 국가에서 맡아 안정적으로 관리해 주면 좀 좋으련만 어찌된 것이 돈 많은 '괴물 집단'에서 마구잡이로 사용료를 올려 버리니 날씨는 이렇게 차가운데 난로 한번 변변히 켜기도 무서워 올겨울이 유난히 춥게 느껴집니다.

현재가 불안하고 미래가 불투명한 사회에 범죄가 늘어나는 것은 수순처럼 당연하고 세상이 흉흉해질수록 몸을 도사리게 되어 나 자신, 내 식구 단속부터 하게 되는 방어적 생존 본능만 키우게 됩니다.
더구나 2백개가 넘는 다민족 국가임에도 각자 자기 커뮤니티에 똬리를 틀고 그 한계에 갇혀 타 이민자 그룹들을 돌아볼 관심도 겨를도 없으니 사건, 사고가 터져도 자기나라 사람 일이 아니면 냉담과 무심으로 일관하는 고질적 버릇도 이렇게 살기 힘든 때는 잠재적 위험 요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살기 좋은 나라에 살아도 이렇게 힘든데 다른 곳은 말해 무엇하랴 싶지만 서민들의 삶이 이렇게 고달프고 피폐해지는 원인은 몇몇 지나치게 배가 부른 사람 탓이라는 원망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호주 최고 부자인 광산 여주인은 1초에 550달러가 넘는 돈을 번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눈 깜짝 하는 새’에 600달러 가까운 돈이 순간순간 쌓인다는 뜻인데 그 여자는 그것으로도 만족이 안돼, 일찍이 정치인을 좌지우지했듯이 이번에는 언론계를 장악할 태세라고 합니다.

돈 많다고 다 행복한 건 아니라는 따위의 ‘여우의 신 포도’식 사고도 싫고, 어차피 차등있는 세상, 환경을 탓하기엔 생이 너무 짧다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사는 데 돈만 소중한 것도 아니고 실상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니까요. 또한 스스로 돌아보아 자족 못하고 감사할 조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 '그 사람은 그 사람, 나는 나' 라고 생각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화가 나는 것은 신도 부러워할 그 좋은 운에 감사하며 나누기는커녕 그렇게 많은 돈을 어떻게 자기 능력으로만 벌은 듯 저다지도 오만무도할 수 있으며 갈수록 더 노골적으로 탐심을 부풀리는가 하는 점입니다.

나아가 그런 ‘독식하고 포식하는 괴물들’은 결국 갈 데까지 간 천박한 자본주의가 낳은 기형아임에도 본래 정신을 상실한 자본주의 자체를 수술대에 올리는 근본 방안에 대해서는 무지와 외면으로 일관하는 것에 대해 분노하게 됩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 것일까요.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품위, 기본적 자존감, 본성적 양심과 적당한 사랑을 잃지 않는다면 그럭저럭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즘 사회는 그런 기본 심성마저 지키기 힘들 정도로 사람을 볶아채며 고단하게 합니다. 그 이유는 지나치게 욕심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비참할 지경에 이르도록 못살게 굴기 때문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필자 신아연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1992년 호주로 이민, 호주 동아일보 기자, 호주 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을 거쳐 지금은 같은 신문의 편집위원이다.
시드니에서 프랑스 레스토랑 비스트로 메메 www.bistromeme.com 을 꾸리며 한민족 네트워크, 두란노 아버지학교, 부산일보 등 다양한 매체에 글을 쓰고 있다.
이민생활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글 쓰는 여자 밥 짖는 여자>,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을 냈다.

블로그 http://blog.naver.com/shinayo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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