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오피아는 극심한 3년의 가뭄 끝에 대 기근으로 백만 명이 목숨을 잃는다(1984). 급속한 인구 증가와 산림훼손과 사막화도 큰 몫을 했지만, 국제사회의 원조를 횡령한 공산정부가 재앙을 키웠다. 스탈린 공산정권에도 똑 같은 전례가 있다. 세계 3대 곡창지대(우크라이나 흑토, 북미 프레리, 남미 팜파스)인 우크라이나에 ‘집단농장’을 세우자 대기근이 발생했는데, 스탈린은 전처럼 계속 식량을 수출하여 결국 250 – 350만 명이 굶어죽었다. 똑같은 잘못으로 ‘인민공사’를 강행한 중국 모택동은, 1960년대에 자연재해까지 겹치자, 대국답게 3년 동안 2 – 4천만 명을 굶겨 죽였다고 한다. 1990년대 후반 김정일의 북한은, ‘고난의 행군’중에 수백만이 굶어죽고, GNP가 $239까지 떨어졌다. 시간이 갈수로 부패하는 ‘절대독재 국가경영’의 경직된 공산체제에서 무엇을 기대할까? 에티오피아 참상이 미디어로 알려지자, 마이클 잭슨은 자신이 쓰고 라이오넬 리치가 공동작곡한 노래 ‘We are the World(우리는 하나)’의 악보를 제작자 퀸시 존스에게 넘긴다. USA(United Support of Artists) for Africa의 굶주림을 없애자는 운동으
자코페티 감독의 다큐 ‘몬도카네’에는(1962), “화려한 제복, 그러나 연전연패의 군대”라는 자학적인 멘트가 나온다. 찬란했던 로마제국의 후예들이 어쩌다가? 게르만 침입으로 무너진 이래, 이탈리아는 국가 정체성을 상실한 채(메테르니히) 오랜 세월 ‘외세 지배와 분열의 역사’를 거쳐, 뒤늦게야 통일을 이룩한다(1870). 식민지 따먹기 경쟁에 지각한 무솔리니는, 독가스까지 동원한 현대무기로 맨주먹의 에티오피아를 무자비하게 점령하고(전사만 275,000; 1936), 솔로몬과 시바 여왕 사이에 태어난 3천년 혈통을 자랑하는 셀라시에 황제는 망명한다. 이탈리아 역사상 유일한 승전(?)이다. 아무도 돕지 않았던 뼈아픈 기억을 간직한 황제는, 김일성 남침으로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돕자는 UN의 파병요청에 응하여, 6천의 병력을 보낸다(1951). 이들은 5백여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고, 123명의 전사자 가운데 한명도 포로로 항복하지 않아, ‘검은 전사들’의 용명을 날린다. 그러나 귀국한 영웅들을 맞은 것은 7년의 가뭄이었다. 재앙 뒤에 항상 악마처럼 따라붙는 공산당의 쿠데타로 $3,000의 중진국은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하고(1974), 한국전쟁
인류역사상 최악의 인간백정 스탈린도 그 미소(微笑)는 인자하다. 김정은을 ‘위인’으로 존경한다는 얼뜨기가 번식하는 이유다. 대전충남치과의사신협 소식지의 이름이 ‘미소’인데, 최근에 경제학자들이 주목하고 있는 ‘사회적 기업’을 일찌감치 일궈낸, ‘미소(微小) 금융’이라는 좋은 뜻을 담고 있다. 요즘은 또 다른 미소와 만날 계획에 들떠있다. 내년 5월 “시간이 멈춘,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미소(美小)국 12일” 여행이다. 리히텐슈타인 산마리노 모나코 안도라 등... 풍광이 아름다워 화려한 그라비어 우표를 수출상품으로 찍어내는 나라들이다. 헤밍웨이 고흐 세잔느 샤갈의 체취를 더듬는 즐거움은 덤이요, 겸사겸사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다시 한 번 곱씹어 보려한다. 시간이 멈춘 듯 내일에 대한 불안을 잊고, 오롯이 사람답게 사는 사람들, 인구 4만 명 이쪽저쪽의 동화처럼 작은 나라들... 그러나 무심한 나그네들은 그들이 영구적인 평화를 위해, 주변 강대국들 간에 절묘한 힘의 균형을 가늠해가며 얼마나 어렵게 노력 해왔는가? 라는 외교적 노력에는 별로 관심도 이해도 없이 지나친다. 평화와 안정을 위한 국력의 적정 규모는? 대부분이 서구 복지국가들을
Memento mori! 고고한 동양철학으로 무장하여 생사를 초월한 척해 봐도, 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셔서 나이를 잊자는 망년(忘年)회야말로, 죽음의 공포 앞에 나약한 속내의 노출이 아닐까? 서양에서는 종무식처럼 그냥 종년(Year-end) 파티라 한다. 다행히 요즘은 묵은해를 보내는(Bid the old year out) 송년회로 통일이 되고, 가족이나 지인과 함께 음악회를 찾는 인구도 늘었다. 필자가 빠뜨리지 않는 콘서트의 으뜸은 베토벤의 교향곡 #9 환희의 송가다. 130여명이 우렁차게 외치는 ‘인간 승리’의 심장 떨리는 합창은, 한 해 동안 속에 맺힌 응어리를 풀고, 새로운 다짐에 가슴 부풀게 하는 인생응원가다. 다음, 가족동반이면 발레 ‘호두까기 인형’이다. 러시아 민요의 정수만을 뽑아낸 차이코프스키의 선율과 환상적인 율동에 이끌려 한바탕 꿈결에 잠겼다가 깨어나면, 아이들은 평생 간직할 아름다운 꿈을 적립하고, 어른들은 연말선물로 푸짐한 힐링을 챙긴다. 부부나 연인사이라면 다소 어둡지만 오페라 ‘라보엠(La Boheme)’이 좋다. 프랑스인들이 체코 중서부 주민들을 집시 같은 유랑민족으로 착각하여 붙인 이름이 보헤미아(Bohemia)이지만, 여기서
영화 ‘맨발의 청춘’은 한국판 ‘젊은이의 양지’였다. 라스트 신은 허름한 리어카에 아무렇게나 둘둘 말은 거적때기 밖으로 삐죽 삐져나온 신성일의 맨발. 땅이 꺼지는 좌절감, 방향 모를 분노, 다시 두 주먹을 불끈 쥐게 하는 도전의욕 등등... 문득 재킷 그림만 보고 벅의 CD 한 장을 사게 된 사연을 엮은 칼럼(1997)의 한 대목이다. 며칠 전 영원한 청춘스타 신성일씨가 우리 곁을 떠나갔다. 그가 혜성처럼 등장했을 때, 한국영화계에는 신파의 끝물 김진규와 최무룡, 그리고 이미 몸매가 팡 퍼진 신영균 아재의 사극(史劇) 밖에 없었다. 청춘남녀들은 세련된 외국영화에 비해 왠지 유치한 한국영화 상영관에 들어가기를 망설였고, 고무신 부대만으로 객석을 채우자니 영화계는 배가 고팠다. ‘맨발의 청춘’으로 젊은 남녀가 극장에 오기 시작했으니, 한국 영화계에 ‘스타’가 등장한 것이 아니라, 신성일이 “슈퍼스타가 있는, 당당하게 두발로 선 한국영화계”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가 다시는 나타날 수 없는 영원한 청춘스타인 까닭이다. 중앙일보 “남기고 싶은 이야기”는 대한민국 개발연대의 속내를, 당시의 주연들로부터 직접 보고 듣는 기록이었다. 전직 대통령을 포함하여, 열 쪽
몇 년 전 대전에서 경찰의 실수로 인질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설득 끝에 인질에게 칼을 겨눈 채 나온 범인을 죽도(벨 수 없는 연습용 대나무 칼)로 내려쳤다. 범인은 반사적으로 인질을 찔렀으니, 경찰이 무고한 사람을 죽인 셈이다. 선진국에서는 이렇게 ‘미련한’ 사고를 막으려고 현장교본(Field Manual)을 만들고, 실전 같은 모의훈련을 한다. 인질사건은 확실한 인질보호와 범인‘제압’이 최우선이다. 오래전 얘기지만 사슴목장에 초대를 받아 피를 먹은 적이 있다. 어차피 잘라야 할 사슴뿔(鹿茸)이요 그 때 흐르는 피를 술에 타서 마신다. 철망을 두른 공간에 말만한 엘크를 몰아넣고 수의사가 파이프 총으로 마취약을 쏘는데, 연거푸 세 발을 맞고도 쓰러지기까지 족히 5분쯤이 걸렸다. 지난 9월 18일 대전의 한 동물원에서 퓨마 한 마리가 우리를 탈출했다. 마취 총을 맞고 포획했다는 소식에 안심했는데, 한 시간쯤 지나 결국 사살했다는 정정뉴스가 나오자, 전국의 네티즌들은 후끈 달아올랐다. “평생 갇혀만 살던 불쌍한 퓨마, 마취 총으로 생포를 해야지, 아름답고 우아한 동물을 왜 잔인하게 쏘아죽였느냐? 이건 동물학대다.” 비난이 쏟아졌다. 마취 탄을 맞출 만
명랑소설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조흔파씨의 ‘얄개전’에서, 두수는 누나를 짝사랑하는 백선생에게 온갖 양념을 섞은 ‘맵짜시쓰달 차’를 먹인다. 맛의 기본은 감산고(甘酸苦) 세 가지라고 한다. 쓴맛은 짠맛과 통하고 여기에 통각을 더하면 매운맛, 해서 오미(五味)다. 그래서 매콤 달콤 짭짤한 떡볶이가 맛있는 음식이 아니라는 황교익의 주장은 지극히 편협하고 주관적이다. 온 국민이 사랑할뿐더러 심지어 ‘황실’ 떡볶이는 맵지도 않다. 그분 주장대로라면 냉면도 미식과는 거리가 멀다. 동치미국물에 식초 겨자의 양념과 메밀향이 살짝 풍기는 시원한 막국수일 뿐이다. 필자는 어렸을 적부터 메밀향이 진한 온면(溫麪)이 더 좋았다. 6·25 전 겨울에 유성온천 냉면집은, 냉면·온면을 거의 반반쯤 팔았지 싶다. 1960년대 을지로 버드나무집에서는, 냉면 대신 불고기 국물에 냉면사리를 뜨겁게 익혀먹었고, 우래옥이 이어받은 이 방식을 지금은 사리원면옥에서 산내 산 사리로 즐긴다. 그래서인지 2000년 금강산 길에 온정리에서 맛본 냉면은, 그저 “제법이네.” 정도였다. 치열한 자본주의 경쟁에서 살아남은 셰프의 솜씨나, 풍성하고 질 높은 식자재를 따라갈 수 없는 북한에서, 어차피 정식
경제가 어려워지니 광고가 줄어 방송계가 고전 중이라는데 종이언론(일간지)은 말할 것도 없다. 그나마 대기업 가전제품과 자동차가 명맥을 잇고, 인구 노령화에 맞춰 효과가 알쏭달쏭한 건강식품·대체의학 제품들이 틈새를 채운다. 그런 중에 제법 내용이 쏠쏠하고 가격도 실한 상품을 잇달아 히트시키는 광고계의 효자 M사가 있는데, 최근 “전통의 아름다움과 멋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 했다는 ‘M 생활한복’을 출시하였다. 1980년대 초 주택공사에 수용되기 전 필자의 본가와 외가(용운동과 법동)는 중농고택(中農古宅)이었는데 큰 사당(祠堂)이 있었다. 큰집에 입양된 증조부 유훈으로 4대 봉사(奉祀) 제사 끝에 4년 전에 매혼(埋魂)을 하였다. 잔을 올릴 때마다 길게 늘어진 도포 소매가 가로 걸쳐, “이렇게 불편한 의관 탓에 조선조가 망했지.”라고 중얼대다가 선친께 눈물이 쏙 빠지도록 훈계를 들었다. 까다로운 의관정제(衣冠整除) 자체가 조상님을 뵙는 마음가짐이요, 다른 제물(祭物)을 건드리지 않도록 왼손으로 소맷자락을 받쳐주는 자세가 조신한 몸가짐이라는 것이다. 의관정제란 “옷을 격식에 맞게 차려입고 매무시를 바르게 함” 아니던가? 의관정제는 조선 오백 년을 이
대전 역 앞에 명품(?) 중고의류 가게가 있다. 상호가 ‘건빵 * 빈티지’ 이니 별표는 아마도 옛날 건빵 봉지에 들어있던 별사탕인가보다. 제복(Uniform)에 대한 인간의 이중 심리, 기피와 선망을 교묘하게 이용한 마케팅은, 밀리터리 룩(Military Look)으로 일류 메이커들의 효자상품이 되었다. 유리문에 붙인 글은 더 재미있다. “가격은 대화입니다(Price is Conversation).” ‘협상의 기술’이 아니라 ‘거래의 진수(眞髓)’다. “말만 잘하면 공짜”와 일맥상통한다. 그렇다. 민주국가에서 서로 뜻이 맞으면 그만이지 거래에 제3자가 왜 끼어드나? 회의석상에서 모든 발언이 사실상 ‘동의(動議)’이듯 일상의 대화는 결국 거래다. 예를 들어 “아빠 구두 잘 닦아놓으면 용돈 2천원.”도 거래다. 여기에 공정위가, “부모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미성년자 노동력 착취하는 불공정거래를 시정하고 과징금 2만원을 내라!” 하면 되겠는가. 지난해 여름 고용노동부가 ‘제빵사(士)의 본사 직고용’을 명령한 파리바게뜨 사태는 ‘긁어 부스럼’ 식 끼어들기였다. 양측이 서로 돕도록(相助) 권장하기는커녕, 둘 다 죽음(喪弔) 직전까지 몰아간 고약한 해프닝이었다.
1995년 여름 치과기공사회에서 기공료 인상요구가 있었다. 대전광역시가 아니라 전국적인 차원에서 일종의 ‘선발대’라는 설이 있어, 초반부터 확실하게 매듭 지어야 한다는 말이 돌았다.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지부장으로서 해당부서에 유권해석을 구했는데, ‘공정거래위원회’는 답변이 아니라 심사결과를 보냈다. 기공사회는 ‘담합행위’를 즉시 중단하고, 치과의사회도 집단으로 대응했으므로, 3 대 1 즉 기공사회 4억5천만 치과의사회 1억5천만 원의 과징금을 부과한다는 내용이었다. 대전지부도 1년 예산이니 날벼락이요, 기공사회 회장은 사색이 되어 대책을 부탁하였다. 장문의 해명·진정서를 썼다. 첫째 유권해석 요구에 심판으로 대답한 ‘절차상’의 하자, 둘째 회원의 연회비로 운영하는 사단법인의 지부로서 수익모델이 없는데 기업체처럼 과징금 부과는 ‘행정 과잉’이라는 점, 셋째 두 단체 모두 납부능력이 없어 전 회원이 ‘심판무효’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었다. 2주 후 엄중한 경고와 함께 과징금 취소 공문을 받아 겨우 한숨을 돌렸고, 기공사회장으로부터는 감사 인사를 받았다. 그 후로 현재까지 전국적인 협회차원의 인상요구는 자취를 감춘 것으로 안다. 1993년 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