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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원가

'살면서 문득문득 그때가 좋았다는 생각이..'

[설날 이야기] '떡국 한 그릇'

부엌에선 어머니와 숙모와 누나들이 차례 상에 올릴 음식들을 준비하고 계셨고, 아버지는 사랑에서 먹을 갈아 지방을 쓰고 계셨습니다. 마당을 쓰는 일은 언제나 내 담당이었으므로, 소담스레 쌓인 눈을 온 몸에 촉촉이 땀이 배어나도록 가래로 밀고 빗질을 하면서도 난 마냥 즐겁기만 했습니다.

언 손을 호호 불며 마당가에 봉긋하니 눈 무더기를 만들고선 삽작 밖을 내다보면 거기에도 온통 하얗게 눈이 덮여 있었고…, 싸리비를 팽개치고 얼른 부엌으로 달려가 아궁이 바짝 손을 내밀면 일렁이는 불빛이 투명하도록 발갛게 조막손을 비추는 모양이 신기해 한참을 이리 저리 장난을 쳤었습니다. 때 맞춰 구수하게 코끝을 스미는 떡국 익는 냄새란….

검정 두루막에 검정 털신을 신은 동네 어른들이 하얀 눈과 묘한 대비를 이루며 뒷짐을 진 채 어기적어기적 삽작을 들어섰습니다. 아버지와 삼촌이 제상 차리기에 분주할 무렵 난 어머니를 졸라 막 솥에서 건져낸 떡국 몇 잎을 미리 맛보곤 했는데,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욕심이 한창이던 그때, 떡국을 먹으면 한 살을 더 먹는다는 어른들 말씀에 난 두 그릇 세 그릇 맛나게 떡국을 비워 댔었습니다.

지금에야 그 차례 상이 모두 설날로 옮겨왔지만, 나라에서 2중과세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신정 나기를 권장했던 시절, 유난히 눈이 많았던 그 겨울의 포근했던 기억들이 나이를 먹을수록 짙은 그리움으로 다가섭니다. 새해의 감흥이란 유년의 색 바랜 기억에서 먼저 찾아드는 건 아닐는지.

 

 

먹고 입고 잠자는 모든 것들이 지금보다 부족했음에도 지금보다 훨씬 쉽게 웃을 수 있었던 시절. 모자라면 나누면 그만이고, 없으면 안 쓰면 그만인 넉넉한 생활철학 덕분에 국민학교에 들어가서야 겨우 검정 고무신을 흰 고무신으로 바꿔 신을 수 있었지만 그런 것들은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 관계에선 전혀 흠이 되지 않았습니다.

내게 귀한 것들은 남들에게도 똑같이 귀했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은 남들도 가지지 못했으므로, 가난은 차라리 절대적인 것일지언정 상대적이지는 않았으며, 서로가 사는 속내를 비교할만한 정보 또한 폭이 좁아 겨우 ‘동네 앞 물 안 드는 논 몇 마지기를 어느 집에서 샀다더라’가 부러움의 대상이 될 뿐이었습니다.

나이를 먹은 만큼 세상도 많이 변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도 못할 일이 없어졌다는 것이 이런 변화의 핵심인데, 상당 부분 삶의 질에 기여하기도 했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멀티미디어가 말을 대신함으로써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면서 얻을 수 있었던 많은 것들을 잃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옛날 우리의 어른들이 찰흙 같은 끈끈함으로 주변을 엮어 가진 것 없이 한 세상을 여유롭게 살았다면, 지금의 우리는 서로 엉키기를 싫어하는 모래알처럼 각자의 공간에서 의미 없는 풍요에 마음 졸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복고주의자는 아니지만, 살면서 문득문득 그때가 좋았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마음이 통하면 모든 것이 통해서 나눌 것도 많았던 정 많던 시절, 내남없이 생각하는 바가 복잡스럽지 않아 자연스레 일상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었고, 이 예측가능한 일의 시작과 끝이 늘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푸근하게 해줬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면서 또 한 그릇의 떡국을 먹게 됩니다.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물리적 의미 이상의 어떤 것을 우리는 여기서 찾을 수 있을까요. 혹, 어제보다 작고 초라해진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더라도 놀랄 일은 아닙니다.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이 많을수록 정신은 왜소해지게 마련이지만 세상 자체가 하고 싶고 갖고 싶도록 만들지 못해 안달이니 누굴 탓할 바도 못됩니다.

한 가지 바랄 것이 있다면 가끔씩은 순수의 시절을 떠올려 보라는 점입니다. 그때, 떡국 한 그릇이 내게 준 즐거움과 지금 가진 것들을 비교하다 보면 어렵지 않게 다시 행복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