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조선의 치과계는 환희 속에서 당면 문제에 대응하느라 분주했습니다. 치과계 최초의 종합지로 1946년 5월 1일에 발간된 『朝鮮齒界』 창간호에는 당시 치과계 구성원들이 어떤 생각을 하였고 무엇을 위해 노력했는지 생생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 내용을 연재하면서 70년 전 선배들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당시의 맞춤법이 지금과 적잖이 다르지만 원문 그대로 두었습니다. 정리: 조영수■ 치과의무행정에 대한 소감 조선이 해방된 이후 전민족은 경천동지의 환희를 느끼는 동시에 전승연합국에 滿腔의 감사를 표시하였다. 우리는 이 감격으로 출발하여 각계각층을 막론하고 協心戮力, 신조선 건설을 위하여 노력하여 오든 중 민족해방과 국가건설에의 千載一遇인 호기를 의식치 못하여 사리사욕에 충만한 모리배와 악덕 奸商人의 암약으로서 물가는 점차 폭등하여 가고 經濟攪亂과 사회 무질서를 야기케 함은 실로 遺憾한 現狀이며 과도기의 健民운동도 막대한 방해를 받고 있음은 사실이다.따라서 의무계로서의 중요한 일부문인 치과의료기계 及 재료도 악덕 간상배들로서 말미암아 무자격 의료업자들에게로 輾轉 賣買되어 치과의료계에 일대 충격을 이르키고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조선의 치과계는 환희 속에서 당면 문제에 대응하느라 분주했습니다. 치과계 최초의 종합지로 1946년 5월 1일에 발간된 『朝鮮齒界』 창간호에는 당시 치과계 구성원들이 어떤 생각을 하였고 무엇을 위해 노력했는지 생생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 내용을 연재하면서 70년 전 선배들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당시의 맞춤법이 지금과 적잖이 다르지만 원문 그대로 두었습니다. 정리: 조영수■ 치아근관치료의 역사적 고찰 치아신경치료 및 발치술은 상고시대로부터 있었던 모양이다. 其後 1세기에 이르러는 치수실을 開口하는 방법과 또한 치수질환을 치료할 목적으로 발수하는 법까지 있었다 한다. 그러케 치수를 죽이고 근관을 치료하는 방법이 있었기는 하나 18세기 초까지도 보통 개업에는 하지 못하였엇다.Fauchard에 제1회 출판에도 근관치료에 관하여난 별로 발표가 없었고 1746년 Fauchard 제2회 출판에야 비로서 측절치 及 尖齒에 치수실을 노출식히는 방법과 치수를 죽이는 방법이며 핀이나 鐵絲를 가지고 신경을 빼낸 후에는 棉花에다가 「Cinnamon」 柚나 丁香油를 묻혀가지고 消毒하는 방법을 기록하였섯다. 然이나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조선의 치과계는 환희 속에서 당면 문제에 대응하느라 분주했습니다. 치과계 최초의 종합지로 1946년 5월 1일에 발간된 『朝鮮齒界』 창간호에는 당시 치과계 구성원들이 어떤 생각을 하였고 무엇을 위해 노력했는지 생생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 내용을 연재하면서 70년 전 선배들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당시의 맞춤법이 지금과 적잖이 다르지만 원문 그대로 두었습니다. 정리: 조영수■ 조선치과상공계에 대하여조선치과상공계의 과거와 현재 又는 장래를 약술함으로써 건설기에 있는 斯界에 참고가 된다면 幸이 될가한다. 해방 후 국내에는 치과재료상이 우후죽순격으로 많이 생겼으니 그 원인은 舊 치과 재료상, 조합 사무원, 日人치과상점에 근무하든 점원, 만주에서 치과 재료상을 하든 귀환인, 기업 정비로 폐업 중에 있는 자 등이 개업한 까닭이다.그러나 치과재료의 생산기관이 없고 다만 舊 조합 재고품의 일부, 日人 치과의의 방매품이 약간 있을 뿐이요, 미국제품을 수입하지 안는 한 고갈 상태에 陷入하고 있는 오늘날 商人만이 늘었다는 것은 건전치 못한 奇現象이다.그러면 치과 상공계는 엇지될 것인가!!! 이 문제를 말하기 전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조선의 치과계는 환희 속에서 당면 문제에 대응하느라 분주했습니다. 치과계 최초의 종합지로 1946년 5월 1일에 발간된 『朝鮮齒界』 창간호에는 당시 치과계 구성원들이 어떤 생각을 하였고 무엇을 위해 노력했는지 생생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 내용을 연재하면서 70년 전 선배들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당시의 맞춤법이 지금과 적잖이 다르지만 원문 그대로 두었습니다. 정리: 조영수■ 齒科醫 사명의 재인식과 질적 진보 향상에 대하야온세계를 털어 유례가 없은 폭학 奸忍 搾取的인 일본 팟오는 1945년 8월 15일로 완전 자취를 감추고 우리 삼천리 강토에는 따듯한 春光이 빗취었으니 이로서 우리 삼천만 동포에게는 해방의 날이 오게 된 것이다.과도기에 있어서 신조선 국가 건설에 딸어 진보된 후생부문은 건설 도정에 있고 조선치과의사회는 대동단결되야 씩씩한 발전을 보이고 임에 우리 민족 유일한 치과의학부는 선배 제 선생의 진력으로 착착 再建 草創의 잇어 머지않은 장래 歐美치과의학에 나란히 됨에 至함을 빌어 축복한다.이 모-든 씩씩한 進步이야말로 모-든 건설 일부인 후생부문 건설에 日子 단축에 도움 됨이 지대한 것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조선의 치과계는 환희 속에서 당면 문제에 대응하느라 분주했습니다. 치과계 최초의 종합지로 1946년 5월 1일에 발간된 『朝鮮齒界』 창간호에는 당시 치과계 구성원들이 어떤 생각을 하였고 무엇을 위해 노력했는지 생생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 내용을 연재하면서 70년 전 선배들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당시의 맞춤법이 지금과 적잖이 다르지만 원문 그대로 두었습니다. 정리: 조영수■ 시골 齒科醫 한 사람의 생각현대의 치과의사는 金冠 義齒의 治術 이외에 口顎炎 질환의 진료의무가 있다. 방금의 환자는 齒性 질환의 全部를, 전부의 치료법을 치과의사에게 切望하고 있다.頰部가 腫脹되었다, 人中부가 종창되었다. 어서어서 외과의사에게 가시오, 소생은 금관 의치가 전문입니다. 이래서는 환자는 만족치 않을 것이다. 문명은 개발되어 치과는 의학의 分科이며 안과이니 이비과이니 산부인과 등과 비하여 대등의 인식을 갖게 되는 現時에 회피 타령 말고 뜻한 바보담 그 報酬 적음의 口顎炎 환자는 날로 우리 眼前에 나타날 것이외다. 금관 의치 제작에 兩手를 더럽히며 분주한 우리 치과전문의인 이상 萬難을 忍耐코 以上의 질환을 치료하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조선의 치과계는 환희 속에서 당면 문제에 대응하느라 분주했습니다. 치과계 최초의 종합지로 1946년 5월 1일에 발간된 『朝鮮齒界』 창간호에는 당시 치과계 구성원들이 어떤 생각을 하였고 무엇을 위해 노력했는지 생생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 내용을 연재하면서 70년 전 선배들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당시의 맞춤법이 지금과 적잖이 다르지만 원문 그대로 두었습니다. 정리: 조영수■ 해방 전후의 적십자병원 치과 적십자병원 치과 노희서해방 전후의 本院 치과를 간단히 소개하려 합니다. 1944년에 본인이 취임하였으며 本치과에 조선인이 근무키는 이것이 처음인가 봅니다.당시 서울종합병원 치과 중 조선인 의사의 有在 활동을 볼 수 없는 곳은 적십자병원 치과 뿐이었읍니다. 이 때 나는 몇가지 장래 일을 생각하고 本치과에서 일하기 주저치 않으며 間或은 本意 안인 복종을 한 때도 잇었습니다. 당시 本科에는 치과의사 2人(日男), 조수(日女) 1人, 합 3人인데 과장(志田)이란 자는 사무장 무슨 長을 겸하야 實上 병원을 총지휘하는 인물로 치과와는 별 관계 없는듯이 환자 한 명도 진료치 않고 助手란 女子난 도로혀 妨害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조선의 치과계는 환희 속에서 당면 문제에 대응하느라 분주했습니다. 치과계 최초의 종합지로 1946년 5월 1일에 발간된 『朝鮮齒界』 창간호에는 당시 치과계 구성원들이 어떤 생각을 하였고 무엇을 위해 노력했는지 생생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 내용을 연재하면서 70년 전 선배들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당시의 맞춤법이 지금과 적잖이 다르지만 원문 그대로 두었습니다. <정리: 조영수> ■ 대구 3월 2일 대구 착, 3일 정오에 이두영씨를 방문... 씨는 경남 咸安 출생으로 경성치전을 맞치고 세브란쓰 병원에 근무 후 대구에 개업하야 20년이 된다고 한다. 당년 51세 담배를 조와하고 술은 한두잔 정도 頭腦가 緻密하고 이론이 탁월하야 만사에 실패는 없겠으나 경북치과의사회의 지도적 책무를 負擔한 앞 길에는 대범한 행정 수완의 발휘가 기대되는 바 크다. 이하는 치료에 분망하면서 往訪한 기자에게 준 談話다. 1. 경북치과의사회 결성에 대하야 = 현하 제 情勢로 결성하지 못 하고 과도적 대행기관으로 대구치과의사회가 그 기능을 대행하는 중인데 4월에는 총회를 개최하야 완전한 새 출발을 하게 될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조선의 치과계는 환희 속에서 당면 문제에 대응하느라 분주했습니다. 치과계 최초의 종합지로 1946년 5월 1일에 발간된 『朝鮮齒界』 창간호에는 당시 치과계 구성원들이 어떤 생각을 하였고 무엇을 위해 노력했는지 생생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 내용을 연재하면서 70년 전 선배들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당시의 맞춤법이 지금과 적잖이 다르지만 원문 그대로 두었습니다. 정리: 조영수■ 3시간 연착, 17시간만에 부산에 도착하다 부산과 대구 치과의사회의 동향을 打診코저 2월 27일 아침 부산행 46열차를 타고 보니 입추의 여지없이 초만원이다. 이곳저곳 유리창이 깨져서 바람이 술술 들어오기는 하나 담배연긔와 떠드는 소리에 가슴이 메질듯이 답답하다. 15분 延發로 7시 10분 서울역을 떠나자,『사람 떠러져 죽겟소, 조금만 들어갑시다』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닌다. 용산, 노량진, 영등포에서는 깨진 유리창으로 연달아 사람이 들어온다, 그래도 못 탄 사람이 수백명이다. 시흥이 가까워질 때 한 부인네가 땀을 뻘뻘 흘니며 애원을 한다. 『조금만 비켜주세요』『비키다니, 당신도 보다싶이 이러케 꼭 백여있는 형편에 어듸로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조선의 치과계는 환희 속에서 당면 문제에 대응하느라 분주했습니다. 치과계 최초의 종합지로 1946년 5월 1일에 발간된 『朝鮮齒界』 창간호에는 당시 치과계 구성원들이 어떤 생각을 하였고 무엇을 위해 노력했는지 생생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 내용을 연재하면서 70년 전 선배들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당시의 맞춤법이 지금과 적잖이 다르지만 원문 그대로 두었습니다. 정리: 조영수■ 8․15 후 치과의사회의 동향 서병서경기도 치과의사회 총무부 위원. 同 한성지부회 서무부 위원 작년 8월 15일, 이 날은 우리 삼천만 동포가 역사적 해방의 깁붐과 즐거움을 늣긴 날이다. 과거 사십년간 일본제국주의의 압박과 멸시는 재론할 여지조차 없을만치 甚하였거니와 보건후생적인 치과계에도 소위 대동아전쟁이 이러나자 강압적 정책은 益甚하였다. 즉 우리 白衣 동포의 同樂者로 조직된 한성치과의사회를 강제적 명령 하에 해산시키고 韓日合倂 식으로 日人 치과의사회에 편입을 강요하야 조선인을 구속하고 압박하고 멸시함으로써 치과의사회란 그들의 독무대로 醜技를 연출하고 있었든 것이다.물론 표면으로는 內鮮一體니 무엇이니 하여 명목상 일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조선의 치과계는 환희 속에서 당면 문제에 대응하느라 분주했습니다. 치과계 최초의 종합지로 1946년 5월 1일에 발간된 『朝鮮齒界』 창간호에는 당시 치과계 구성원들이 어떤 생각을 하였고 무엇을 위해 노력했는지 생생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 내용을 연재하면서 70년 전 선배들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당시의 맞춤법이 지금과 적잖이 다르지만 원문 그대로 두었습니다. 정리: 조영수■ 창간사 8.15를 기하야 해방된 조선에 새 世紀的 환희의 첫 봄이 왔다. 봄은 건설의 상징이다. 과거에 있어서 日政 하에 건실한 발달을 일으지 못한 조선 치과계는 바야흐로 건설기에 돌입하였다. 건설 의욕에 불타올으는 齒科醫人, 齒科商人의 품속에서『조선치계』는 탄생한다.오늘날 우리 치과계를 우리 손으로 재편하여 운영한다는 현실성은 朝鮮齒科史에 대서특필할 감격적 경사 아닐 수가 없다. 치과의인은 優生 부문에 있어서 치과의학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그 學理를 究明하고 추구하고 파악함으로써 씩씩한 조선 인민의 보건을 確守할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세계적 치과의학 수준에의 향상 到達을 도모하고 있으며, 치과상인은 치과기재의 생산 促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