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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수씨가 경성치과상회로 자미를 보자 日人재료상은..'

[朝鮮齒界로 읽는 해방일기 8] 해방직후의 조선치과기재상공조합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조선의 치과계는 환희 속에서 당면 문제에 대응하느라 분주했습니다. 치과계 최초의 종합지로 1946년 5월 1일에 발간된 『朝鮮齒界』 창간호에는 당시 치과계 구성원들이 어떤 생각을 하였고 무엇을 위해 노력했는지 생생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 내용을 연재하면서 70년 전 선배들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당시의 맞춤법이 지금과 적잖이 다르지만 원문 그대로 두었습니다.  <정리: 조영수>

 

 

조선치과상공계에 대하여

조선치과상공계의 과거와 현재 又는 장래를 약술함으로써 건설기에 있는 斯界에 참고가 된다면 幸이 될가한다.
해방 후 국내에는 치과재료상이 우후죽순격으로 많이 생겼으니 그 원인은 舊 치과 재료상, 조합 사무원, 日人치과상점에 근무하든 점원, 만주에서 치과 재료상을 하든 귀환인, 기업 정비로 폐업 중에 있는 자 등이 개업한 까닭이다.

그러나 치과재료의 생산기관이 없고 다만 舊 조합 재고품의 일부, 日人 치과의의 방매품이 약간 있을 뿐이요, 미국제품을 수입하지 안는 한 고갈 상태에 陷入하고 있는 오늘날 商人만이 늘었다는 것은 건전치 못한 奇現象이다.

그러면 치과 상공계는 엇지될 것인가!!! 이 문제를 말하기 전에 과거를 회고해 보자.

내가 치과 재료계에 관계한 것이 1933년 3월 3일이었다. 그 당시 국내에 재료상이 10개 처가 있었으니 조선인 상점은 서울에 세부란쓰병원내 치과 재료판매부와 중앙 조선치과상회가 있었고 평양에 한일치과상회가 있었으며 日人 상점은 서울에 滿鮮,  八木, 森田, 風雲堂이 있었고 부산에 金剛, 대구에 內野 등이 있었으며 이 때가 조선 치과상界의 초창시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934년 중앙치과상회는 조선인 中의 제1인자로써 만주까지 진출하여 일시 활약하였엇다.

1935년에 한남수씨가 경성치과상회를 개업하여 滋味를 보자 日人재료상은 이들 嫉視하야 앞으로 조선인 개업을 방지코저 경성치과재료상조합을 결성하였으니 이것이 재료상 조합의 시초요 조선상인에 대한 압박의 제1보이엇다.

그러나 1936,7년에 昭和, 朝日, 天一, 共榮,ㅡ 三京 등이 개업하야 기세를 올니고 중일전쟁을 전후로 재료상이 20여개소 지방을 합하면 4,50이 되었으니 이떄가 재료상의 황금시대라 하겠다.

왜놈들이 우리 동포의 개업을 억제치 못하야 목적을 달성치 못 함을 꺠닫자 경성치과재료상조합을 해소하고 조선치과재료상조합으로 발족하여 국내업자를 그 산하에 너코 이번에는 경제적으로 착취코저 일본에 있는 大상점과 밀약 제휴하야 조선인에게 직접 매도치 안코 日人의 손을 거쳐 나오게 함으로써 중간도매 이득을 음모한 사실을 내가 일본 가서 알았다.

즉, 왜놈 00이 동경 00상전에 가서 조선인이 재료 기계 주문을 하거든 보내지 말고 자기(왜놈) 상점으로 보내서 팔게 하라 하였으니 한없는 증오를 늣기지 안을 수 없다. 이 사실을 糾明할여 하였드니 그보다 압서서 天一이 일본 가서 조선사람이 주문하면 보내지 말고 天一로만 보내라 하였다고 孟浪한 虛說를 유포시켯다. 착취를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안코 또 그 음모가 발각되자 惡辣한 離間策으로 탈바가지를 쓰는 것이엇다. 그놈들이 조합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로 우리 동포를 경제적으로 민족적으로 착취와 압박을 하였으나 阿O하고 협력하는 조선인에게는 힘없는 지위를 주기도 하였다.

중일전쟁을 거쳐 소위 대동아전쟁이 되자 치과재료가 통제되고 보니 조합은 한층 더 왜놈 중심이 되고 조선치과용품조합으로 개조하야 실적이니 세금표준이니 여러가지 口實로 배급율을 정하되 조선인 협력자만은 다소 후하게 하고 其他는 侮辱적 비율이었다. 즉 배급원 총수 33인 중 조선인이 25인이고 日人이 8인인데 배급 비율은 조선인측 백분지 40이요 日人측 백분지 60이었으니 이 수자만 보드라도 얼마나 억울하얏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뿐 안이라 다시 최후 발악으로 기업 정비라는 명목하에 조선인업자를 축소 합동시켜서 6인으로 만들고 日人업자는 겨우 2인만 정리하였거늘 이처럼 악독하게 하고 그들의 압날이 도저히 長久치 못하리라 생각하엿드니 드디어 패망하고 말엇다.

우리는 일제의 O鎖를 끄ퟋ어버렷다, 과거의 모든 苦生사리는 일시적 악몽이고 시련이었다. 해방이 되자 너무 조와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그러나 덥허놓고 열광적으로 조와 날뛸 수 없는 현실이다. 아직 독립도 되지 못한 이 땅에서 치과재료도 없이 商人만 만어졌으니 무엇이 조와서 날뛰겠느냐

우리는 냉정히 현실을 直視하자.!!! 첫째 양심적 자본주를 흡수하고, 둘째 일본서 활약하는 조선인 치과기계재료 제조기술자의 총력을 집결하야 생산에 노력하는 한편, 미국제품을 수입하야 치과재료를 원활히 유통시키고 품질의 수준을 일본제 이상으로 향상시키는 것이 우리 치과상공인의 책무로 생각한다.
조선 치과 상공계의 前途는 多難하다. 그런 건설을 위한 희망에 넘치는 싸홈이고 고생이다, 치과 상공계를 위하야 싸우는 일은 또 建國大路에도 연결될 것이다. 엇지 싸우지 안으랴!! 

                                                <조선치과기재상공조합 총무위원 이덕현>

 


치과재료 확보에 대한 소감

우리는 36년간 倭敵에게 가진 압박 하 눈물을 머거가며 비참한 생활을 계속하야 왔다. 눈이 있쓰나 正視하야 보지 못하야쓰며 귀가 있쓰나 듯지 못하엿고 입이 있스나 자유롭게 말을 못하며 37년간 장구한 시일에 산송장의 생활을 여지업시 하야 왔다. 우리 치과 상공계도 왜적에게 좌우되여 말할 수 없는 눈물과 쓰라림을 바더왔다.

天佑神助라할가 우리 백의민족에도 자유에 종소래가 높이 외쳐 자유롭게 해방의 깁붐을 엇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만 해방이 된 것을 깁버만 하고 잇을 시기는 안니다. 우리 앞에는 조선치과재료를 自作自給하지 안으면 안이 될 크나큰 중대한 임무가 삼팔도선 문제 이상의 난관이 잇다는 것을 자각하지 않으면 안이 될 것이다.

과거는 100%를 倭敵의 지배 하에 一品일지라도 치과재료를 완성함이 업시 금일에 이르게 된 것은 세상에 발표를 못할 수치라 아니 할 수 없다. 이것은 물론 독자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는 바와 갗치 가진 壓政 하에 경제적 기술적 허다한 방면을 물론하고 자유가 없는 가온대 創意와 발전이 잇을 理致가 없엇다. 우리 치과 상공업자는 오래 前붙어 이것을 해결을 하려 하엿스나 항상 왜적이 독단적으로 지배한 연고로 뜻을 이루지 못하엿다.

그러면 해방이 된 금일의 우리들 사명은 舶來品만 의존할 것이 안이라 全 기능을 발휘하야 시급히 우리 손으로 自作自給의 길을 찾지 안으면 안니된다. 치과의사 제씨를 고객으로만 생각지 말고 유기적 연락을 취하며 제품에 創意를 연구하지 안으면 안이 된다.

제일 긴급을 요하는 자작자급에 해결책은 박래품을 의존치 안코 최초에는 빈약하나 우리 손으로 수요자 손에 제공함이 우리들의 임무이며 사명이라 하겠다.

그러나 長久한 시일 동안 자력갱생을 찾지 못 한 우리 상공업계는 구체적 안을 결정하랴면 물론 一朝一夕에 해결을 못할 것이다. 이상의 문제를 해결하랴면 다음의 조건이 절대로 필요함을 늣기고 잇다.

가. 해외에 散在하엿든 기술자들을 편성할 일.
나. 필요 資材의 적극적 확보.
다. 소규모라도 전문적 부문에서 작업소를 창설할 일 등의 조건이 필요하다.

이상의 조건을 吸收하랴면 우리 상공조합은 물론이고 치과의사와 公的으로나 私的으로나 유기적 협력에 정신으로 遭遇한다면 빈약한 우리 치과 재료계일지라도 O所成大에 크나큰 역할을 하리라 자신한다.

그리고 특히 원하는 것은 각자가 이윤만 취득할 생각을 버리고 희생적으로 건설 도중에 잇는 조선치과재료계를 위한다는 그륵한 정신만 있다면 아모리 큰 障害物이 잇다하드라도 용이히 목적달성에 凱旋을 올이며 助長에 산파역을 할 것이며 개척에 曙光을 엇을 것이다..

다음에 貴紙가 창간함에 대하야 경하함을 마지 안으며 머~ㄹ지안은 장래에 우리 치과재료계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은 물론이며 貴誌를 통하여 四海諸位와 갗이 학술적 기술적으로 연구한 諸방면에 종합한 意見의 논설을 발표함으로 창의적 치과재로가 출현될 것을 확실히 밋는 바이다. 따라서 貴誌 창간을 위하야 물심양면 에 노력을 아기지 않코 奮鬪하시는 관계자 제씨에게 감사함을 마지 안으며 아울너 과도기에 잇는 조선치과상공계에 발전의 目標의 的서이 되어주기를 굿게 바라는 바이다.

사랑하는 3천만 동포들에게 구강외과 치료상 없지 못할 치과재료를 왁보하려면 학술적 기술적 연구위 논설을 절이 광고함에 있다, 以上의 領導에 記事를 우리 삼천리 강산 방방곡곡에 貴誌가 전하야진다면 貴誌의 사명은 완전이 다-하였다고 볼 것이다. 

                                          <조선치과기재상공조합 부위원장  車文軾>

 

                                                         

 

'朝鮮齒界'는 해방된 조국의 첫 치과전문지로 1946년 5월에 탄생했습니다. 발행인은 황영기, 편집장은 최효봉 그리고 발행처는 조선치계사로 되어 있습니다. 표지까지 110쪽 정도의 분량이지만, 이 안에는 해방을 맞은 한국 치과계의 박동이 느껴지는 글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각 지역치과의사회 소식은 물론 치과의무행정에 대한 소감 그리고 당시의 임상과 치과기재상공에 관한 이야기까지.. 덴틴은 광복 70년을 맞아 이 소중한 사료들을 연재의 형식으로 독자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치과계 각 분야가 70연 전의 초심을 회복하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 연재를 기획하고 직접 정리까지 맡아주신 조영수 선생께 감사의 인사 전합니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