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조선의 치과계는 환희 속에서 당면 문제에 대응하느라 분주했습니다. 치과계 최초의 종합지로 1946년 5월 1일에 발간된 『朝鮮齒界』 창간호에는 당시 치과계 구성원들이 어떤 생각을 하였고 무엇을 위해 노력했는지 생생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 내용을 연재하면서 70년 전 선배들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당시의 맞춤법이 지금과 적잖이 다르지만 원문 그대로 두었습니다. <정리: 조영수>
■ 치아근관치료의 역사적 고찰
치아신경치료 및 발치술은 상고시대로부터 있었던 모양이다. 其後 1세기에 이르러는 치수실을 開口하는 방법과 또한 치수질환을 치료할 목적으로 발수하는 법까지 있었다 한다. 그러케 치수를 죽이고 근관을 치료하는 방법이 있었기는 하나 18세기 초까지도 보통 개업에는 하지 못하였엇다.
Fauchard에 제1회 출판에도 근관치료에 관하여난 별로 발표가 없었고 1746년 Fauchard 제2회 출판에야 비로서 측절치 及 尖齒에 치수실을 노출식히는 방법과 치수를 죽이는 방법이며 핀이나 鐵絲를 가지고 신경을 빼낸 후에는 棉花에다가 「Cinnamon」 柚나 丁香油를 묻혀가지고 消毒하는 방법을 기록하였섯다. 然이나 근관 充塡에 관하야난 一言도 기록하지 않았섯다.
其後 1757년에 Bowerdet는 치아 再植 시에 어떠케 拔髓할 것과 또한 齒根端까지 근관충전할 것을 말하였으나 此는 再植할 치아 즉 발치한 치아에 대한 말이고 구강 내에 생활치에 발수와 근관충전문제에 대하야서는 19세기 초까지 별로 새로운 방법이 없시 지내어 왓섯다.
19세기 초(1800-1835년)에 현미경의 발달과 동시에 Thomas Bell이 치수에 대한 현미경적 소견 즉 혈관신경에 분포 또한 其조직에 반응, 치근막에 존재를 설명하였고 또한 치수는 상아질을 통해서 치근막과 연결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命名하기를 치조골에 부튼 치근막을 External Periosteum(외골막)이라 하엿고 또한 근관에 연결된 것을 Internal Periosteum(내막근)이라 하엿다.
그리해서 상아질은 External Periosteum을 통해서 영양을 섭취한다고 하엿고 금관은 Internal Periostum을 통해서 영양을 엇는다고 하엿다. 그리하여 만흔 사람들이 당시에는 이 학설을 굿게 밋고 일반치료에까지도 此 학설에 의하야 치근치료를 행하엿섯다.
1821년 Leonard Koecker씨는 신경 죽은 치아는 전부 발치하여야 한다고 하엿다. 其 이유는 우치의 전염, 치아연부조직의 질환, 치근단의 膿瘍 及 전신적 질환까지도 죽은 치아로 인하여 전염된다고 하여서 모-든 신경 죽은 치아는 발치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해서 19세기 초에 Leonard Koecker는 Thomas Bell의 학설과 자기학설에 의하여 여러 가지 치료방법을 주장하엿섯다.
其 <1>은 치수覆卓法이고 <2> 발수 及 근관충전 <3> 치관제거법이엇다. 치수노출한 경우에 치아를 구하는 방법은 치수覆卓법 외에는 없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만흔 치과의사들이 치수복탁법을 행하엿다. 그리고 화농된, 치수나 기외 복탁법으로 치료할 수 없는 치아난 치관을 파절하고는 치은에다가 Post 를 삽입하여 Post Crown 모양에 인공치관을 하엿섯다.
其 이유는 치근은 External Periosteum으로 말미암아 영양을 섭취하기 때문에 생활하는 줄 알엇고 치관은 Internal Periosteum으로 인하여 영양을 섭취하느니만틈 치수가 실활됨과 동시에 치관은 其 생활기능이 없어질터이니까 Koeoker의 죽은 부분은 제거하여야 된다는 학설에 의하여 치관을 파절하여 버리고 인공치관을 만드럿다고 한다. 그리고 此 술식에 사용하는 모든 기구는 自家제작품이엇섯다.
발수 급 근관확대용으로는 <피아노> 00線으로 가늘게 칼을 만드러 사용하엿고 치관제거에는 <줄>과 조고마한 겸자를 만드러 사용하엿섯다.
치수는 0酸 Creosoto 其外 酸으로 죽여가지고 발수아얏지만 물론 완전히 신경을 죽이지 못하였었기 때문에 발수時에 환자의 其 고통이란 말할 수 업섯고 동시에 완전히 치료를 못 하야섯기 때문에 Absess로 인하여 계속적으로 근관치료를 하지 안으면 안 된 경우가 만허섯다. 그리해서 인광치관을 만든 후에도 齒顎部 적당한 부위에 구멍을 만들어 가지고 얼마 만에 한번씩 계속적 근관치료를 하엿다고 한다.
如此한 치료는 단근근관에만 시행하엿고 대구치에는 하지 못하엿섯다. 그러나 1840년 Denning, 1854년 Cherry 氏등에 의하여 대구치근관치료방법도 발표하였스며 그 방법으로는 棉花에 丁香油나 「시나모」를 찍어서 근관내에 點布하는데 지나지 못하섯다.
1840년에 Baker에 의하면 발수한 후에는 청결히 하고 완전히 건조식힌 후에 반다시 곳 金으로 근관을 充塡하라고 하엿다. 좌우간 이때까지의 근관치료는 치료 후에 급성치근단 膿瘍 혹은 其外 치통으로 인하여 일시 중전하요든 충전물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되였섰고 계속적으로 근관치료할만한 구멍을 치경부에다 만들지 않으면 안될 형편이었섰다.
其後 치과조직학이 발달함과 동시에 1836년에 Spoouer씨가 치수실활을 목적으로 亞砒酸을 사용키 시작한 후로 만흔 치과의사들이 임상에 아비산을 사용하였섯다.
이것이 아마 현대치과근관치료의 기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일시는 부근 골조직 及 軟部組織에 壞疽를 일으키고 혹은 전신적 아비산 중독을 발생하는 일이 많았섰기 때문에 일반에 불평이 있었지만 사용상 부주의로 인한 것을 안 다음에는 일반이 만히 사용하게 되엿다. 그후에 아비산과 Cocain 혹은 Phenol에 合劑를 사용하게 된 후에는 아조 무통적으로 발수할 수 있었다. 이것이 치수실활에 아비산을 사용한 시초일 것이다.
1860년에 Oxychloride Cement의 발명과 동시, 치수복탁에 큰 도움이 되었었다. 그후 1874년~1879년을 통하여 Adolf Witzel, Chase, G. V. Black 등 치수치료법에 대하여 좀더 세밀히 발표하였스나 근관충전에 대하야서는 별로 발표가 없었다. 비상시에 근관충전재료로서는 Cresota, 金箔 「Gutta Percha」, Oxychloride of Zinc 등을 사용하였섰다. Gutta Percha를 사용키 시작하기는 1860년경이다, 그리고 Gutta Percha 포인트를 사용하기는 1874년부터 시작하였고 Chloro Percha는 1848년에 Colburn이 사용키 시작하였다. 然이나 당시에 근관충전은 여러가지 모양이였었다. Gutta Percha만 사용하는 사람도 있었고 Chloro Percha와 金箔을 섞어서 충전하는 사람, Chloro Percha만 사용하는 사람, 여러 가지 모양이였었다.
그리고 이때까지는 소독에 대한 관념은 없었다. 連中 1882년 경에 Miller와 Underwood의 세균감염과 치수질환 관계를 연구하고 『치수의 화농, 또는 치수간의 농양 형성은 순전히 세균의 작용으로써 此等 세균을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질병을 예방할 수 있으며 또한 此等 세균은 강력에 침투성 소독약으로써 손쉽게 소독할 수 있다』는 발표를 한 후부터는 치과게에 一大 轉換을 초래하였다.
그후 G. V. Black, Thopmas Truman 1886년, Gallipe veganls 1889년, Schreier 1893년, Miller씨 1894년 등의 세균학과 근관치료에 관련한 연구에 의한 결과, 근관치료는 Rubber Dam 장치下 절대소독 하에 행하ᄋᆥ될 것을 발표하였었다. 그후 금관치료는 급속도로 발전되었었다.
그후 1882년부터 1910년 사이에는 치수질환의 병리, 아비산의 생물첵에 대한 작용의 연구, 其外 국부마취에 의한 치수 적출 등의 연구라고 할 수 있다.
1894년 Dr. Miller는 아비산의 생물체에 대한 연구를 한 후 아비산의 효과가 근첨공을 넘어 치근단 外에 치근막에는 잘 작용을 못한다는 것을 실험, 발표하엿고 Prings는 아비산의 사용량에 대하여 연구 발표하였다.
1884년에 Koller와 1890년에 Briggs는 Cocain 분말을 가지고 노출한 치수에 압박마취하에 발수법을 발표하였고 1906년에 Harold S. Vaugham은 Procain의 침윤마취 하에 발수하는 법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사용하는 강한 발수 소독약으로써 Creosoto, phenol, Iodoform, Form aldehyde 등은 당시에 발표된 것이다. 1893년에 Dr. Miller는 치수절단법과 또 치수覆卓法을 발표하였스나 당시에는 발수를 완전히 하고 근관을 완전히 충전하여야 경과가 조타고 생각하여섯기 때문에 覆卓法에 대하여서는 그리 주요시하지 안었었다.
또 1917년 Percy R. Howes씨는 硝酸銀용액으로 근관에 작용하여 遊離銀膜을 근관벽에 형성식혀서 상아질을 완전히 소독함과 동시에 근관충전도 되게 하는 방법을 발표하였섯다.
1895년에 X광선 기계가 발견되어 가지고 치과에 점차 사용하게 되자 1910년 경에는 두 가지의 신경향을 발견하였다. 其一은 완전한 근관충전은 하기 어렵다는 것과 其二는 근관충전 후에 치근단 농양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해서 1911년에 William Hunter은 치아질환이 전신에 조치못한 영향을 준다고 강조하였고 또한 일반의사도 동의하였섰다.
그리해서 A. D. Black은 6백인의 구강내에서 약 6천의 근관충전한 치아의 X선 사진을 검사한 결과 약 63%가 치근단 농양이 생긴 것을 발견하였섰다. 또 그뿐 아니라 치근단 농양이 X광선사진에 보이지 안은 근관충전한 치아라도 발치하여 여러 방법으로 세밀히 세균배양을 하여 검사한 결과 만흔 치아가 세균이 발생되고 또 일반 임상적 보고에도 주근 치아가 전신질환과의 관계가 잇다는 보고가 있은 후에는 일반치과의사 중에는 2黨派가 생기게 되었다.
즉 한편은 치수가 한번 尖出이 되면 근관치료할 것업시 발치하자는 사람과, 또 다른편은 근관충전을 비교적 완전히 할 수 있는 前齒와 갓흔 치아는 근관치료를 하야도 조타는 2당파가 생기게 되엇다. 그리해서 상당한 시일을 두고 서로 논쟁을 하며 동시에 모든 難문제에 대하여 다시 검토하고 다시 연구하였다.
치수와 부근조직을 再연구하였고 지금까지 근관치료에 사용하는 재료, 기계, 치료법, 근관충전법, 其外 세균학적 입장에 있어서도 세균의 종류, 치근단에 칩입경로, 또한 감염에 관하여 세밀히 더 연구하고 재검토하였섰다.
그리해서 1916년부터 1925년까지에는 여러 종류의 재연구발표가 있었다. 그리해서 세균의 종류와 침입경로를 더욱 밝히엿고 또한 X광선기계의 발달과 동시에 E. L. Haden씨의 18926년의 연구로 더욱 정확한 X광선의 진단을 할 수 있게 되엿다.
其外에 소독약에 관한 연구와 신근관충전법도 발표가 있었스나 근관충전을 완전히 해결할만한 조흔 발표는 결국 나스지 못하엿다. 오히려 1929년 경에 Skilien씨의 발표에 의하면 근관의 해부학적 관계상 근관충전에 더 세밀한 기계와 기술을 요한다는 것을 역설하였슬 따름이다.
其後 1939년 경까지 Dr. Hays, Dr. Swanson, A. D. Black의 발표를 보면 완전한 근관충전법을 연구한다는 것보다도 오히여 세균의 침입경로와 활동법위를 밝히는데 지나지 못하였다. 동시에, 한번 치수가 노출하면 Focal infection을 미리 제거한다는 의미에서 발치하는 것이 조타는 편으로 일반치과의사가 기우러지는 경향이었섰다.
今番 8월 15일 이후 여러 미국 치과의사들을 만나여서 此 근관충전 문제를 문의하여 보왔지만 별 새로운 근관치료 及 충전방법의 발표는 없는 모양이다.
마즈막으로 우리 조선 치과의사들로서는 此난문제를 엇떠한 방면으로 연구하며 해결하여 나가겟느냐하는 문제에 대하야서는 우리 현 입장에 있어서 숙고할 필요가 잇고 급히 선진국을 그대로 따라갈 수가 없시된 처지가 아니가 한다.
(충분한 연구가 업시 此난문제를 소개한 것을 독자 여러분께 용서룰 구하며 다소의 참고가 되기를 원하난 바이다. 또한 이상에 쓴 역사적 고찰은 米國내에서 대부분 經過한 역사인 것을 附言하여 둔다.
이유경
<경성치과학전문학교 부속병원
보존과장, 교수>
參考書類
(1) History of Dentistey
(2) Black’s Operative Dentistry. Vol IV.
(3)American Journal of Dental Science. 1851-52. Vol 2 2nd Series, P. 520.
(4) Black’s Operative Dentistry. Vol III.
정리 : 조영수<전 대한치과의사학회 회장>
■ '朝鮮齒界'는 해방된 조국의 첫 치과전문지로 1946년 5월에 탄생했습니다. 발행인은 황영기, 편집장은 최효봉 그리고 발행처는 조선치계사로 되어 있습니다. 표지까지 110쪽 정도의 분량이지만, 이 안에는 해방을 맞은 한국 치과계의 박동이 느껴지는 글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각 지역치과의사회 소식은 물론 치과의무행정에 대한 소감 그리고 당시의 임상과 치과기재상공에 관한 이야기까지.. 덴틴은 광복 70년을 맞아 이 소중한 사료들을 연재의 형식으로 독자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치과계 각 분야가 70연 전의 초심을 회복하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 연재를 기획하고 직접 정리까지 맡아주신 조영수 선생께 감사의 인사 전합니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