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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회·학술

치과의史학이 주는 뜻밖의 재미

옛날 신문 속 옛날 광고를 보니…

지난주 조간신문을 뒤적이다가 재미있는 기사 하나를 발견했다. 옛날 광고를 소개하는 고정 칼럼이었는데, 이 날은 '90년 전 치과이름은 치술원 이 해박는 집'이란 제목을 달고 있었다. 90년전 치과라? 호기심이 동해 읽어 보았더니 1920년 6월 종로구 관철동에 치과를 열면서 낸 개업인사 광고를 소개하고 있었다. 이 광고 속 문안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본인이 금번 우미관 측(옆) 두남이발관 상층으로 이전하옵고 제반 설비를 무루(빈틈없이) 완비하였사오니 배전 애고하심을 복망. 경성 관철동 74번지 동양치술원 주 태석균"

아마 이 태석균이란 분은 다른 곳에서 개업을 하다가 당시의 중심가인 관철동 우미관 옆으로 이전한 후 변호사들이 하듯 신문에 개업 광고를 내지 않았나 싶다.
광고는 삽화까지 곁들였다. 그림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부인네가 마주 앉은 치과의사로 보이는 사람에게 다소곳이 입안을 맡기고 있다. 설비를 무루 완비했다고는 하지만, 그런 걸 나타내려 한 흔적은 없다. 두 사람이 앉은 의자는 그냥 보통 의자이고, 설비라고 할만한 어떤 것도 삽화에는 보이지 않는다. 무척 소박하다고 해야 할까? 조선일보 1920년 6월 16일자 1면에 실린 광고이다.
이 광고를 낸 태석균이란 분은 어떤 사람일까. 하지만 당시의 기록을 뒤져봐도 태석균이란 이름의 치과의사나 입치사는 없었다.
대한치과의사학회 조영수 회장은 "1920년 전후의 관보를 다 뒤져봤지만 태석균이란 이름은 찾질 못했고, 대신 1920년 1월 17일에 입치영업면허를 딴 태석언(彦)이 있는데, 이 태석언이 태석균이란 이름을 같이 사용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1920년 3월 4일자 조선총독부 관보를 보면 같은 해 1월 17일 태석언이 경성부에서 3년 동안 입치영업을 할 수 있는 면허를 취득한 것으로 나와 있다.
조 회장은 "1920년 당시 치과의사는 일본인과 조선인 등 11명이었고, 입치사는 220여명으로, 20년 6월 이전에 입치영업면허를 받은 사람은 모두 235명에 이른다"고 전했다.

 

그 광고 속 이름이 갖는 신비감

 
같은 신문 1921년 3월 17일자 4면에는 반도 치과의원의 개업광고가 게재됐다. 서대문 황토현에 자리한 이 치과는 치과 구강외과라고 진료과목을 적고 진료는 친절하게, 기공은 견고하고 아름답게 등의 케치 프레이저까지 내걸었다. 전화번호 위에는 일요일에는 빈곤 환자들을 위한 무료치료를 한다고 적어 넣기도 했다.
이 반도치과의원은 1921년 4월 18일자 1면에도 광고를 냈는데, 이때는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치과명과 주소, 전화번호만 크게 적었다. 치과광고가 흔치 않던 당시로 치면 이 반도치과의원의 원장은 마케팅에도 관심이 많은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광고들을 소개한 조선일보의 칼럼은  '1920년대 치과 진료소들의 적극적 광고는 당시 구강 위생에 관한 대중 의식 수준이 높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고 분석하면서, “신문 기사에서도 이가 갑자기 아프면 이쑤시개 같은 것으로 치아 속 찌꺼기를 파내고 그곳에 상처 치료제인 요오드팅크를 바르라는 다소 황당한 조언을 소개할 정도였다”(1927년 3월 17일자)고 옛 기사를 인용하기도 했다.

다시 치과의사학회 조영수 회장의 말.
"입치사는 치과의사가 없는 벽지에 지역을 정해 배치했는데, 그건 나중의 일이고 초기에는 경성을 비롯한 대도시 중심부에 입치사들이 뿌리를 내렸죠. 자연 폐업 때까지 기득권을 인정해야 했고, 환자들도 입치사와 치과의사를 구분하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다가 1921년 치과의사시험제도가 도입돼 검정출신이 배출되고, 25년엔 경성치과의학교 1회 졸업생 25명이 나오면서 치과의사 숫자도 점차 늘어나기 시작해 1933년에야 비로소 입치사 숫자보다 많아집니다. 당시 치과의사회의 주 업무는 총독부에 입치사 제도 폐지를 로비하는 것이었죠. 입치사는 치과의사들의 뿌리 깊은 경쟁집단이었던 셈입니다."

치과의사 11명에 입치사 220여명이 전국을 나눠 썩은 치아를 뽑고 금니를 해넣던 1920년의 치과풍경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때의 치과의사들은 오늘의 치과의사들 보다 행복했을까? '식민지 시기 치과의 면허 등록부'에는 일본인들 사이에 친숙한 우리 이름들도 간혹 보인다. 
함석태, 한동찬, 김창규, 고상목, 이희창, 이상철, 류창선, 변세희...
                                                                                  <사진제공: 조선일보 사료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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