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미음에 의존하는 종교적인 관점과 어떤 통팔에 의해서 이해하려는 철학적 관점이 있으며 실험과 관찰에 의한 과학적 관점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인간관계를 형성하면서 살아간다. 특히 과학적 관점에 의한 여러 가지 벌칙들은 미래를 예측하게 하고 삶을 편리하고 풍족하게, 안전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에 유용하고 일관된 지식의 체계를 이루고 있다.우리는 세상 모든 일을 과학적 지식에 의해서 판단하고 접근하려는 경향 때문에 과학만능주의라고 성토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그로인해 인간성의 상실을 가져 온다는 표현으로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과학적 사고방식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모든 현상을 인과관계로만 파악하려 들고 그 관계가 일치되지 않을 경우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 과학적 사고가 아닌 감성적인 판단에는 신뢰성이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기 때문에 과학적 사고와 인문학이나 예술적 사고와는 항상 갈등을 일으키게 마련이다.과학적 사고 방법은 자연법칙을 추출해내고 확인하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지만 인간의 정신 세계에 대해서는 과학적 법칙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미천한 부분이 많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엄밀히 정의되고 실험으로 검증된 지식
추억이란 오랜 세월에 헹궈낸 앙금이어서 엄마 품처럼 푸근하고, 슬픔과 아픔은 머릿속의 지우개로 조금씩 지워져 모난 곳이 없다. 밉던 곱던 그 시절에 가깝던 지인들은 세월의 뽀샵(Photo shop)을 거쳐 선남선녀가 되는 것이다. 19에서 20세기 초까지 미국 쇼 무대는 민스트렐(Minstrel)이 스타였다. 중세 이후 수백 년간 활약한 유럽의 노래꾼에서 유래한 말로서, 백인이 검정 칠을 하고 흑인으로 출연하는 코믹 뮤지컬의 원조다. 영화 ‘Jolson Story: 1946’를 보면 당시 인기를 짐작한다.Minstrel 작곡가 Bland가 만든 “내 고향으로 날 보내 주.”는, 미국의 슈베르트라는 포스터의 전통에 따른 사투리와 멜로디의 흑인민요다. 평생 허리가 휘도록 노예로 일한 늙은 흑인이, 태어나 자란 버지니아 목화농장으로 보내달라고 애원한다. 포스터(Stephen Foster: 1826-1864) 작곡 “Old Black Joe”에서 조는, “내 마음이 젊고 밝던 시절(when my heart was young gay)은 가버리고”라며 운명에 순응한다.윤석중의 노랫말 “기러기 떼 기럭기럭 어디서 왔니?”로 익힌 “Massa’s in the cold,
째보는 언청이를 말합니다. 그것도 우리가 전공 분야인 입술 언청이, 그러니까 한자어로는 구순열(어떤 지휘자 부인과 이름이 같군요.^^)입니다.군산과 목포엔 째보선창이라는 부두가 있습니다. 과거엔 흥청거리는 부두였지만, 지금은 매립되거나 폐항구처럼 되었습니다. ?째보선창은 마치 입술이 찢어진 모양새로 안으로 움푹 들어온 선창이라는 말이겠지요. 군산의 째보는 이곳 선창을 쥐락펴락했던 객주가 언청이라서 그렇게 불렀다는 이설도 있긴 합니다.그런데 째보선창에 관한 문학적 기록은 꽤 됩니다. 멀리는 채만식의 '탁류'가 대표적이지요. 소설에서 작가는 째보선창가의 미두장에서 현물투기를 하는 인간 군상들과 일제수탈을 고발합니다. 가까이는 박범신 선생의 소설 '소금'에도 나옵니다. 원문을 옮겨보면, 탁류에 대한 언급도 있습니다.'땅콩밭을 처분하고 고향인 세도를 떠나 군산 째보선창으로 이사한 것은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해였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서 가산을 모두 탕진한 ‘정주사’가 “두루마기 둘러쓰고 풍덩 물로 뛰어들어 자살이라도 해볼까” 하고 늘 탄식하던 곳이 바로 째보선창이었다.한때는 고군산열도 일대에서 들어온 고깃배들과 김제평야의 질 좋은 미곡들이 모두 모여들어 그
안익태씨 이전에 애국가는 스코트랜드 민요 ‘올드랭자인’의 곡을 빌려 썼다.Auld lang syne은 영어로 Old long since, 즉 “그리운 옛 시절”로 Those were the days! 와 통한다. 추억은 누구에게나 가슴 뭉클한 아픈 손가락이니 ‘추억장사’는 밑지는 법이 없다. ‘응팔’의 대박이 드라마의 장군이라면, ‘오빠생각’은 영화계의 멍군이다.영화 국제시장이 관객 1.400만 명을 넘겼을 때 예상된 추억상품의 수작이다. 국제시장은 흥남철수작전에서 시작하여 광부·간호사의 서독 파송(派送) - 월남 파병 – 중동 건설로 이어지고, 1983년에 “이산가족 찾기”의 눈물바다로 정점을 찍어, 6·25의 잿더미에서 기적을 이룩한 대한민국의 ‘개발연대기’였다.‘오빠생각’은 단순한 연대기(年代記)를 넘어, 그 기적을 가능케 한 우리 민족의 저력, 즉 강한 연대감(공동체 의식)과 불굴의 자립 의지를 그린 ‘작품’이다. 중학생 때 본 전송가(Battle Hymn, 1957)는 에이즈 합병증으로 사망한(1985) 미남 스타 록 허드슨 주연의 A급 영화다. 딘 헤스대령은 1950년 12월 중공군에 쫓기는 급박한 1·4후퇴 상황에서, C-47 수송기 15대를
이때 쯤 산의 나무를 가까이서 보면 분명 잎사귀도 없는 마른 갈색나무인데, 멀리서 보면 뭔가 옅은 연두 빛이 전체적으로 느껴지는 것처럼 학교 복도에도 그런 기운이 느껴진다. 2학기와 비교 할 때 학생 수도 같고, 시간표도 비슷하게 운영되지만 웬일인지 복도에도 학생들로 가득차고 게시판 앞의 분위기도 호기심과 생기가 넘친다. 또 복도를 지나다 보면 반가움에서 가던 걸음을 불러 세우는 아이들이 부르는 호칭이 다양해진다. 방학 중 현장임상 실습 현장에서 익숙한 호칭들이 입에 배여 있어 호칭만 듣고도 이 아이가 몇 학년인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종합병원에 실습 다녀온 3학년들은 ‘과장님’이라 부른다. 또는 ‘원장님’이라고 하는 학생들은 개인의원 실습을 경험한 2학년들이다. 그리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아이들은 이제 막 대학생활을 시작하는 마치 신혼부부에게 ‘여보’라는 호칭이 어색하듯 ‘교수님’이라는 호칭이 어색한 새내기 들이다. 이런 분위기들이 봄 학기를 활기차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3년에 한 번씩 새로운 지도 학생을 만나게 된다. 올해 새로운 학생들을 만나 학교생활과 학칙, 교과목 소개 등의 오리엔테이션을 겸한 지도교수와의 상견례 시간을 갖기 위해 교실로 들
TV 드라마의 초창기 60년대에는 성우 출신 탤런트가 잘 나갔다. 동시녹음이 아니라 성우 목소리에 의존하던 영화배우가 쩔쩔맬 때, 대사부담이 없는 성우의 연기는 자연스러웠다. 반세기가 지난 현재 세계 대중문화의 중심축으로 성장한 ‘한류 드라마’는 지구촌 곳곳을 점령했지만, 지나친 ‘막장’ 경쟁으로 비난도 빗발친다.종편방송 출범으로 시장이 커지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소위 건전드라마 ‘응답하라 88(응팔)’이 최고시청률 19.6%에 15초 당 광고단가 3천만 원대로 치솟아 지상파방송을 추월하고, 아이돌 특히 걸 그룹 멤버가 스타로 떠오른 것이다. 어리고 연기 경력도 짧은 이들이 잘 나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내공이다. 이르면 초등 때부터 혹독한 연습생 훈련으로 동작과 표정연기에 익숙하다. 둘째 연습을 통해 무대공포증(카메라 울렁증)을 자연스럽게 극복하여, 카메라가 무섭지 않으니, 60년대 성우들처럼 연기에 쉽게 몰입한다. 셋째 화면해상도가 SD에서 HD로 발전하자, 작은 주름살도 놓치지 않는 카메라 앞에서, 옛날 식 피부 관리나 성형시술은 그 한계를 드러낸다. 선명도(鮮明度)의 극치라는 UHD(Ultra High Definition) 방송이 시작되면 ‘
이번 칼럼에서는 호주 기업 노조들에 대해서 이야기 드려볼까 해요. 제가 일하고 있는 국립병원 안에 치과를 대변하는 노조가 있다는 이야기는 몇번 들은 적이 있지만 저 역시 노조에 대해서는 잘 몰랐어요. 실제로 노조원들을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도 없었거든요. 제가 병원 노조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계기는 2012년 저희 국립병원의 노조에 가입된 치과 간호사들이 같은 직급의 프론트(?) 직원들보다 급여가 적다는 이유로 서류담당 일을 일체 거부한 일 때문에 노조에 대해서 알게 되었지요. 당시 치과 간호사들의 불만이 어쩌면 당연했던 이유는 치과 간호사들은 치과의사의 진료 및 치과 치료 관련 일 이외에도 차트관리나 환자들 진료 예약 등 프론트 직원들이 하는 모든 일을 하면서도 서류 작업만 하는 프론트 직원들 보다 급여가 적었는데, 상식적으로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죠. 그 당시 제가 일하고 있는(지금도 그렇지만) 차터스 타워스 병원에서는 노조에 가입된 치과 간호사들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 사태를 동료 치과의사로부터 이야기만 듣고 특별히 관심을 가지지 않고 지나갔어요. 그런데 몇일 전 국립병원 치과 노조 직원들이 저희 병원을 찾아 왔습니다. 치과의사와 치과기공사
고대하던 이차크 펄만을 대전예술의 전당에서 만났다(11월 14일). 20세기 후반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자라는 이름에 전혀 손색이 없었다. 1945년 텔아비브 태생으로 7순을 맞아 월드투어중인 그가 여전히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비결은 무엇일까?첫째, 누구보다도 섬세하고 세련된 기교로 설명되는 천재적 연주 실력이다. 둘째, 네 살 때에 앓은 소아마비로 평생 휠체어를 타는 몸이지만, 항상 미소를 잃지 않는 낙천성과 따뜻한 인간애가 있다. 셋째, 마치 하체로 풀지 못할 운동신경을 보상하듯, 연주 중 연출하는 천의 얼굴·만의 표정이, 못 다한 몸짓언어를 덮고도 남는다.넷째, 어떠한 난(難)곡도 아름다운 음색으로 쉽게 풀어내는 그만의 해석과 프레이징과 비브라토가 있다. 그 밖에도 듣는 사람에 따라 붙일 말과 호 불호가 다양하겠지만, 지난 반세가 가까운 세월 인기도 1위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으리라. 세월의 무게에 눌려 얼마나 변했을까 하는 걱정은 첫 곡의 첫 소절에 날아갔다(Leclair 바이올린 소나타 제 3번 D장조, Op. 9). 휴게시간에, 소름 돋도록 감미로운 선율이라는 표현이 필자뿐 아니라 현역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이구동성이었다. 셋째 곡 봄(베토벤 바이올린
가정식 백반'이라는 표현은 대체 어느 별에서 온 말일까요? 식당밥이란 것에 지치고 식상해진 사람들에게 돌아가신 할머니나 어머니 손맛을 재현해주겠다는 소박한 생각이거나 혹은 이를 이용해 돈을 벌겠다는 응큼한 표현은 아닌지요. 결국 어머니(혹은 할머니)나 집사람이 해주는 일상의 건강 밥상을 차려주겠다는 말이겠지만, 말처럼 그에 부응하는 식당이 대체 얼마나 있겠습니까? 실제 가정식 백반이라는 표현의 원조는 우리나라가 아니라 일본일 겁니다. 교토의 가정식 백반이니 동경의 가정식 백반집을 소개하는 책자들이 예전부터 여럿 나왔으니까요. 소설가 양귀자가 홍대 근처에 차렸던 '어머니가 차려주는 식탁'이라는 밥집이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그런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곳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계모가 차려주는...'보다 못한 밥맛이라고 하였던가요.. 허나, 근사한 한정식이나 궁중요릿집 혹은 고기 전문 식당을 빼면 가정식 백반집 아닌 곳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곰곰 생각을 해보니, 가정식 백반을 표방하는 식당들은 무슨 찌개니 무슨 구이니 하는 단품 메뉴 리스트도 있지만, 정해진 메뉴 없이 직장인들을 상대로 주인장 마음대로, 손 가는대로 차려주는 밥, 반찬 그
1950년대 말까지 길거리 불심검문이 흔했다. 군대를 안간 기피자(draft-dodger) 적발이 목적이었다. 휴전(1953) 직전까지 매일 수백 수천 명이 죽고 다치는 상황을 지켜봤고, 종전이 아닌 언제 또 터질지 모를 휴전상태(cease-fire)에서, 누가 입대하고 싶겠는가? 힘 있고 돈 많으면 외국유학을 가고, 서민들은 모 정치인처럼 오른손 검지(방아쇠 손가락)를 자르거나, 머리 깎고 중이 되어 기피를 했다.고은 시인이 일초라는 승명으로 절에 있던 시기와 일치한다(1951-62, 18-29세). 동년배들이 생사를 걸고 군에 복무하는 동안, 미당 서정주의 추천을 받아 등단하고(1958) 남다른 편애까지 받았으니, 결초보은해도 모자랄 은혜였다. 환속하고 독재에 맞서 재야의 길을 걸으며, 육군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거쳐 “참여시인”이 된 것은 본받을만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미당이 서거하자(2000. 12. 24) 한 해도 지나기 전에 에세이 “미당담론”을 발표하여(2001. 5. 23), “역사의식 없이 권력에 안주” 또는 “미당의 시적 성취가 기만성에 바탕을 두고” 등, 듣기 거북한 비난을 쏟아낸 것은 유감이다.순수문학이냐 참여문학이냐의 결정도 스승 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