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칼럼에서는 호주 기업 노조들에 대해서 이야기 드려볼까 해요. 제가 일하고 있는 국립병원 안에 치과를 대변하는 노조가 있다는 이야기는 몇번 들은 적이 있지만 저 역시 노조에 대해서는 잘 몰랐어요. 실제로 노조원들을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도 없었거든요. 제가 병원 노조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계기는 2012년 저희 국립병원의 노조에 가입된 치과 간호사들이 같은 직급의 프론트(?) 직원들보다 급여가 적다는 이유로 서류담당 일을 일체 거부한 일 때문에 노조에 대해서 알게 되었지요. 당시 치과 간호사들의 불만이 어쩌면 당연했던 이유는 치과 간호사들은 치과의사의 진료 및 치과 치료 관련 일 이외에도 차트관리나 환자들 진료 예약 등 프론트 직원들이 하는 모든 일을 하면서도 서류 작업만 하는 프론트 직원들 보다 급여가 적었는데, 상식적으로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죠. 그 당시 제가 일하고 있는(지금도 그렇지만) 차터스 타워스 병원에서는 노조에 가입된 치과 간호사들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 사태를 동료 치과의사로부터 이야기만 듣고 특별히 관심을 가지지 않고 지나갔어요. 그런데 몇일 전 국립병원 치과 노조 직원들이 저희 병원을 찾아 왔습니다. 치과의사와 치과기공사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조선의 치과계는 환희 속에서 당면 문제에 대응하느라 분주했습니다. 치과계 최초의 종합지로 1946년 5월 1일에 발간된 『朝鮮齒界』 창간호에는 당시 치과계 구성원들이 어떤 생각을 하였고 무엇을 위해 노력했는지 생생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 내용을 연재하면서 70년 전 선배들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당시의 맞춤법이 지금과 적잖이 다르지만 원문 그대로 두었습니다. 정리: 조영수경기도치과의사회 창립총회는 46년 3월 10일 하오 2시부터 치전 회의실에서 동회 창립준비위원 及 한성, 개성, 수원 각 지부 대의원 20여명, 내빈으로 조선치과의료상공조합 위원장 차문식, 동 총무위원 김문기 양씨, 본사측 최, 이, 황 3씨 차씨 참석하야, - 개회선언 - 국기 경배 - 애국가 봉창 - 개회사(경과보고) - 내빈 축사 - 의장 선정 - 회칙 초안 검토 - 임원선거 - 기타사항 - 폐회의 순서로 성대히 개최, 기념촬영을 하고 동 6시 30분 폐회 후 아서원에서 간친연을 베풀었다. 선출된 동회 임원은 ▲위원장 문기옥 ▲부위원장 안병식, (수원)이창용 위원 ▲박명진, 정보라, 조명호, 이유경, 이성민, 김연권,
고대하던 이차크 펄만을 대전예술의 전당에서 만났다(11월 14일). 20세기 후반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자라는 이름에 전혀 손색이 없었다. 1945년 텔아비브 태생으로 7순을 맞아 월드투어중인 그가 여전히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비결은 무엇일까?첫째, 누구보다도 섬세하고 세련된 기교로 설명되는 천재적 연주 실력이다. 둘째, 네 살 때에 앓은 소아마비로 평생 휠체어를 타는 몸이지만, 항상 미소를 잃지 않는 낙천성과 따뜻한 인간애가 있다. 셋째, 마치 하체로 풀지 못할 운동신경을 보상하듯, 연주 중 연출하는 천의 얼굴·만의 표정이, 못 다한 몸짓언어를 덮고도 남는다.넷째, 어떠한 난(難)곡도 아름다운 음색으로 쉽게 풀어내는 그만의 해석과 프레이징과 비브라토가 있다. 그 밖에도 듣는 사람에 따라 붙일 말과 호 불호가 다양하겠지만, 지난 반세가 가까운 세월 인기도 1위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으리라. 세월의 무게에 눌려 얼마나 변했을까 하는 걱정은 첫 곡의 첫 소절에 날아갔다(Leclair 바이올린 소나타 제 3번 D장조, Op. 9). 휴게시간에, 소름 돋도록 감미로운 선율이라는 표현이 필자뿐 아니라 현역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이구동성이었다. 셋째 곡 봄(베토벤 바이올린
가정식 백반'이라는 표현은 대체 어느 별에서 온 말일까요? 식당밥이란 것에 지치고 식상해진 사람들에게 돌아가신 할머니나 어머니 손맛을 재현해주겠다는 소박한 생각이거나 혹은 이를 이용해 돈을 벌겠다는 응큼한 표현은 아닌지요. 결국 어머니(혹은 할머니)나 집사람이 해주는 일상의 건강 밥상을 차려주겠다는 말이겠지만, 말처럼 그에 부응하는 식당이 대체 얼마나 있겠습니까? 실제 가정식 백반이라는 표현의 원조는 우리나라가 아니라 일본일 겁니다. 교토의 가정식 백반이니 동경의 가정식 백반집을 소개하는 책자들이 예전부터 여럿 나왔으니까요. 소설가 양귀자가 홍대 근처에 차렸던 '어머니가 차려주는 식탁'이라는 밥집이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그런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곳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계모가 차려주는...'보다 못한 밥맛이라고 하였던가요.. 허나, 근사한 한정식이나 궁중요릿집 혹은 고기 전문 식당을 빼면 가정식 백반집 아닌 곳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곰곰 생각을 해보니, 가정식 백반을 표방하는 식당들은 무슨 찌개니 무슨 구이니 하는 단품 메뉴 리스트도 있지만, 정해진 메뉴 없이 직장인들을 상대로 주인장 마음대로, 손 가는대로 차려주는 밥, 반찬 그
1950년대 말까지 길거리 불심검문이 흔했다. 군대를 안간 기피자(draft-dodger) 적발이 목적이었다. 휴전(1953) 직전까지 매일 수백 수천 명이 죽고 다치는 상황을 지켜봤고, 종전이 아닌 언제 또 터질지 모를 휴전상태(cease-fire)에서, 누가 입대하고 싶겠는가? 힘 있고 돈 많으면 외국유학을 가고, 서민들은 모 정치인처럼 오른손 검지(방아쇠 손가락)를 자르거나, 머리 깎고 중이 되어 기피를 했다.고은 시인이 일초라는 승명으로 절에 있던 시기와 일치한다(1951-62, 18-29세). 동년배들이 생사를 걸고 군에 복무하는 동안, 미당 서정주의 추천을 받아 등단하고(1958) 남다른 편애까지 받았으니, 결초보은해도 모자랄 은혜였다. 환속하고 독재에 맞서 재야의 길을 걸으며, 육군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거쳐 “참여시인”이 된 것은 본받을만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미당이 서거하자(2000. 12. 24) 한 해도 지나기 전에 에세이 “미당담론”을 발표하여(2001. 5. 23), “역사의식 없이 권력에 안주” 또는 “미당의 시적 성취가 기만성에 바탕을 두고” 등, 듣기 거북한 비난을 쏟아낸 것은 유감이다.순수문학이냐 참여문학이냐의 결정도 스승 미당
나는 클래식음악을 좋아한다. 그런데 우리 집 아이들은 학교 다닐 때 주로 듣는 음악이 팝송 아니면 가요를 즐겨 듣는 듯 했다. 그러나 한 번도 그들의 음악 취향에 대해 간섭하거나 내가 좋아하는 음악 쪽으로 강요해 본적도 없다. 그런데 요즘 와서 모두가 클래식 음악의 신봉자(?)가 되어 있는 게 아닌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내가 그 나이에 음악을 좋아했었던 모습과 비슷한 모습을 자식들에게 발견하면서 세삼 신기하고 놀랍기도 했다.아버지의 유전인자를 닮아서 인가? 아님, 아버지의 문화를 모방하거나 문화적 유전을 한 것인가? 하기야 요즘의 생물학적 견해에 의하면 문화의 전달도 진화의 형태를 취하고 마치 유전자 전달과 똑같은 과정을 그친다고 한다. 유전자는 복제되는 것이 특징이다. 문화의 전달도 유전자처럼 복제기능이 있다는 것이다.문화를 전달 또는 모방하는 사회적 관습의 단위를 밈(meme)이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진화생물학자 리처드디킨스(Richard Dawkins)이다. 유전자가 정자, 난자를 통해 하나의 신체에서 다른 신체로 건너뛰어 퍼지는 것과 똑같이 밈(meme)도 모방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한 사람의 뇌에서 다른 사람의 뇌로 건너뛰면서 퍼져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조선의 치과계는 환희 속에서 당면 문제에 대응하느라 분주했습니다. 치과계 최초의 종합지로 1946년 5월 1일에 발간된 『朝鮮齒界』 창간호에는 당시 치과계 구성원들이 어떤 생각을 하였고 무엇을 위해 노력했는지 생생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 내용을 연재하면서 70년 전 선배들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당시의 맞춤법이 지금과 적잖이 다르지만 원문 그대로 두었습니다. 정리: 조영수■ 新치과의학 건설을 위한 투쟁(上)建國途上의 一學徒로서 생각나는대로 소감을 말하겠다.해방 후 조선학도대의 일원으로 치안유지에 협력하고 있다가 정권 수립이 容易히 완성되지 않음을 알고 學隊는 학원으로 도라왔다. 우리는 우리의 요구와 임무를 규정하야 다음과 같이 학생회 강령을 가결하였다.(1) 우리는 제국주의적 잔재를 일소하고 진정한 민주주의국가 건설에 협력함.(2) 우리는 학문의 자유와 학원의 자치를 확보함.(3) 우리는 조선의 전국민 특히 노동대중을 위한 新치과의학 건설에 邁進함.즉 지금까지 우리가 받아온 교육에 대한 반성 及 그 보충으로 임무수행의 출발점을 정했다.우리는 제국주의의 모순과 현 정세에 대한 그 경제제도를 바
“인쇄매체(일간지)의 사망”을 점치는 예언이 사이비종교의 종말론처럼 무성하다.그러나 맬서스의 식량위기도 녹색혁명과 GMO로 넘어가고, 석유 고갈을 전제로 한 에너지 위기도 원자력과 각종 대체에너지 등 위태롭지만 잘 비켜가고 있다. 이런 예언들은 선구자적인 경고로 인류의 극복의지를 자극하여, 문제 해결은 물론 학문으로서 “미래학”의 정립을 앞당겼다. 라디오가 보급되자 발 빠른 현장감과 실시간 보도의 장점으로 신문에 큰 위기가 예상되었으나, 사건의 핵심을 정리하고 심층보도하며 지속적인 추적으로 기록을 남겨, 일회성인 방송과 서로 보완하면서 오히려 더 성장하였다.TV가 등장하자 신문보다 영화계가 먼저 질식하리라는 예언이 나왔지만, 대형 스크린과 Blockbuster 및 안방이 기피하는 장르영화 등으로 진화한 영화계는, 제2의 황금기를 누리고 있다. 이제 다시 메이저 TV방송사는(한국의 공중파 포함), CNN 이래로 전문화된 방송 내지 케이블 TV와 광고시장을 다투면서, 심각한 비상체제로 들어갔다. 최근에는 생사가 갈리는 분쟁의 현장에서, 핸드폰으로 찍은 X-등급의 동영상이 실시간으로 전송된다. 뉴스 매체가 신문 - 라디오 - TV - 케이블(전문) TV - SN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몇은 감기에 쿨럭이고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침묵해야 한다는 것을모두들 알고 있었다오래 앓은 기침소리와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그래 지금은 모두들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귀향] '사평역에서'는 올해 환갑을 맞은 곽 시인이 스물하나에 쓴 시입니다. 그 나이에 무슨 호명할 '그리웠던 순간들'이 그렇게 많았을까 싶겠지만, 소위 문학을 한다는 청년들은 보고 느낀 것들을 안으로만 쌓아두는 버릇이 있거든요.1976년 겨울, 군입대를 앞둔 그를 위해 문학동아리 선후배들이 마련한 환송회에서시인은 27행의 이 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밥상 위의 삼치는 기껏해야 고등어 사이즈만한 놈입니다. 대개 구이나 조림으로 먹는데 기름이 좔좔 흐르는 고등어에 비해 인기가 떨어집니다. 물론 삼치도 고등엇과이기 때문에 외형은 고등어처럼 생겼지만, 맛은 상당히 다르다고 할 수 있지요. 삼치 제철은 요즘 같이 추운 겨울인데 지방이 오르는 겨울까지 기다리지 않고 잡아버리니 1m 내외의 '대삼치'는 전라도 고흥이나 여수까지 내려가야 제 맛을 즐길 수가 있습니다.삼치에 관한 기록은 손암 정약전 선생의 자산어보에도 나옵니다. 그러나 실제 손암 선생이 삼치를 직접 잡았거나 드셔보시고 그런 기록을 했는지는 불확실합니다.(자산어보를 보면 인어(人魚)에 관한 기록도 있다니까요) 일단 8~9자 길이에 둘레는 3~4뼘이라 하시니 200년 사이에 돌연변이로 인하여 난쟁이 물고기가 되지 않은 다음에야 다른 어종을 착각하여 삼치라 기록을 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게다가 그 맛도 신맛이 짙고 텁텁하여 좋지 않다 하셨으니, 거문도 사람들이나 남도 사람들이 들으면 무척 섭섭하지요.거문도 출신 소설가 한창훈은 거기에 의문을 품고 추적을 했습디다. 해양학자의 조언을 들어본 결과, 자산어보의 삼치는 동갈삼치라고 추측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