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김일성의 남침으로 농사까지 망쳐 온 국민이 가난에 허덕이고, 어딜 가나 시장형편은 부산과 비슷하였다. 대전은 양키시장으로 시작하여, 몇 번의 화재와 신축을 거쳐 도매시장, 다시 중앙시장이 되었다. 서울은 이름이 자유 대도 남대문시장 등이었는데, 안쪽에 미제물건을 파는 도깨비시장이 있고, 건너편 양동 골목에 미군부대에서 나온 잔반을 넣고 끓인 꿀꿀이죽이 푸짐했다. 가게에 단칸방이 딸린 판자 집은 다닥다닥 붙었고 지붕은 타르 먹인 루핑에 호롱불과 석유곤로 일색이니 사흘이 멀다 하고 불이 났다. 시장에 불이 난 다음에는 불같이 일어난다하여 은행에서 돈을 잘 빌려주었고 상인들은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식량은 미국 잉여농산물 원조로 밀가루와 분유와 불면 날아갈듯 한 안남미요, 기름은 미군부대 뒷문으로, 석탄은 기차역에서 역시 비공식으로 유통되었다. 전후(戰後) 10여년을 GNP $100 미만의 최빈국으로 ‘국가재건’에 매달렸던 시절이다. 북한은 달랐다. 장개석과 국공(國共) 내전 중 김일성의 도움을 받은 모택동은, 전세가 북한에 불리해지자 즉각 파병을 결정, 북한 내 중공군이 최대 120만 명에 이르렀다. 휴전 후 원조 $10억에 1956년
1950년 11월, 동부전선의 유엔군 10군단 3만여 병력은(사령관 아몬드) 그 존재도 몰랐던 중공군 제9병단 15만의 기습으로 전멸의 위기에 빠졌다. 특히 주력부대의 하나인 미 해병 1사단은(스미스 소장: 12,000), 중공군 7개 사단(12만)이 포위한 약 40km의 장진호협곡을, 영하 40도를 넘나드는 추위로 병사 절반 이상이 동상을 입은 채, 14일간 악전고투를 거쳐 탈출에 성공 한다 (전사 2,500, 실종 200, 부상 5,000). 중공군 제9병단도 그 뒤로 4개월 간 전투에 복귀하지 못할 만큼 치명적인 타격을 받아 전쟁의 흐름이 바뀌었다. 1983년, 당시 살아남은 전우들이 모여 ‘Chosin Few’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미군이 쓰던 일본지도에 장진이 일본발음 초신으로 되어 있고, “Chosen Few 하면 선택된 소수”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잭 니콜슨과 탐 크루즈의 영화 “A Few Good Men"도 여기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다. 흥남에 집결한 미 3, 7사단과 국군 제1군단 등 도합 105,000, 그것도 대부분 총상·동상에 시달리는 부상병들을, 적의 추격 속에서 장비와 함께 철수시키는 일은 큰일이었다. 필수차량만 17,5
치과대학 교양과정인 예과에서 ‘세계문화사’를 만났다. 고교시절 사건·인명·연대를 달달 외운 세계사가, 지나간 인류사회 사실(Fact)의 나열이라면, 그 시대 문화를 읽는 인문학단계로 격상된 것이 문화사다. 사전을 보면 ‘문명’은 “사회의 기술적·물질적 발전에 의하여 인간의 생활이 발달한 상태”요, ‘문화’는 “인간의 본성인 이상을 실현하려는 활동의 과정 또는 성과, 특히 예술·도덕·종교·제도 등 인간의 내면적·정신적 활동의 소산”으로 정의한다. 문명은 단기에 압축성장이 가능하지만, 문화는 면면히 이어지는 노력과 축적을 요한다. 또 문화가 앞장서서 문명을 이끌어 갈 때에만 역사는 정의 방향으로 나간다. 세월호와 같이 함량미달 전문직에 의한 대형사고, 땅콩 회항처럼 유치한 재벌 3세 임원, 어장(어쩌다 장관이 된) 수준의 고위공직자가 보여주는 추태 등 무한 재방송되는 국제적인 망신은, 바로 GNP 3만 달러의 문명을 성취했으되 문화는 아직도 3천 달러수준에 머물러 있는, “문화와 문명의 괴리(乖離)”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결론은, “문화의 생활화” 즉 시간과 노력이 들더라도 문화시민으로 거듭나야만, 원시적·후진적인 추태나 망신, 비극에 마침표를 찍고,
1925년 상하이로 건너간 전창근은 소설가 김광주 독립운동가 김구 등을 알게 되어, 교사로 일하는 등 사상적 영향을 받았으며, 영화배우·감독을 하다가 귀국한다(1938). 각본·감독·주연한 영화 ‘복지만리’(!941)의 대사가 불온하다는 혐의로 100일간 구금과 심문을 받던 중 상하이의 항일활동까지 알려져 영화를 접었고, 일제를 찬양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훗날 ‘친일 인물 명단’에 들어간 이유다. 1942년 이후 미국에 연전연패하던 일제는, 일본인은 신민(臣民)이라는 이름으로 총동원하고, 식민지 조선인과 점령지 중국인은 무자비한 무단(武斷)통치로 억눌렀다. 일본제국의 최후발악 3년 동안에 벌어진 지식인·지도급인사의 훼절(毁節)에는, 다분히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 총리가 ‘현역’ 육군대장으로 총력전을 벌이는 전시에, 군(軍)과 체제에 항거하는 식민지 조선인은 파리 목숨이요, 오늘날 북한처럼 그럴만한 빈틈도 없는 혹독한 ‘병영국가’였다. 필자가 아는 한 일제 강점기에 고 전창근만 한 애국자도 드물다. 남북분단과 6·25가 낳은 ‘연좌제’도 없앤 마당에, 70년도 지난 친일행적을 ‘확대해석’하는 일은, 국민화합에 공적(公敵) 행위로 의심 받을 수도 있다.
남편이 출근하고 설거지하는 주부에게는 누선을 자극하는 멜로드라마가 딱 이다.라디오 시절부터 스폰서가 주로 세제(洗劑) 메이커였던 까닭에, Soap Opera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 전통은 오전 9시 전후, 화면을 안 봐도 무방할 정도로 대사와 해설이 친절한 ‘TV 소설’에 남아있다. 아침부터 자극 강한 멜로로 내성을 획득한 우리 아줌마들에게, 저녁에 미지근한 가족드라마가 성에 차겠는가?시청률경쟁에 종편방송까지 가세하여 벼라 별 ‘막장드라마’가 판친다. 막장드라마의 공통점이라면 도대체 상종도 못할 악인(악녀)의 등장이고, 주특기는 “남의 탓”이다. 제가 판 함정에 제가 빠지고도, “이게 다 그X 탓이야!” 한다. 그러나 그 어떤 막장드라마도 19세기 초·중반 아시아 국가들이 겪은 생생한 피해의 역사를 완벽하게 부정하는 일본 극우 혐한파들의 ‘떼거지’에는 따라가지 못한다. 그리고 아베총리와 추종자들의 망언과 행태는, 양식 있는 다수 국민과 소수의 막장파 세력 사이 어디쯤엔가 있다. 이토 히로부미는(1841-1909) 가난한 농촌 말단 사무라이 출신이다. 아비가 양자로 들어가 성을 갈고 정치에 입문하여 이름도 바꿨다. “남자는 배꼽 밑으로 인격이 없다.”는 어록
1945년 패전국 일본에 미군이 상륙하기 직전, 황궁 앞에서 ‘특수위안시설협회’ 창립대회가 열렸다. 전쟁이 끝나 ‘귀향한 군인’들이 “미군이 오면 여자들을 남김없이 겁탈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려, 이를 미리 막자는 명분으로 내무상의 지시 하에 1억 엔을 지원하여, 매춘조직을 만들었다. 스스로 동아시아 점령지에서 저지른 만행이 있으니까, 개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귀축(鬼畜) 미군들은 오죽하랴, 지레 겁을 먹고 만든 정부 주도 매춘 업이 1년 동안 계속되었다고 한다. 이런 마인드니까 점령국 처녀들을 성노예로 부려먹고도 “죄의식이나 반성이 없는 것”이다. 1955년 단편소설 “태양의 계절”로 젊은이들의 우상이 된 이시하라 신타로는 뒤에 도쿄도지사를 지낸 극우 중 극우요, 여성비하의 극치를 보여준 인물이다. “여성이 생식능력을 잃고 살아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백세 이상 산 쌍둥이 할머니 긴상 자매처럼 오래 사는 것은 지구의 큰 폐해다.”라고 말했다. 예과 때 읽은 ‘태양의 계절’에서 남은 기억은 주인공이 처음 만난 여학생 젖가슴을 쿡 찔러보는 무례함뿐이다. 작가의 일생을 관통한 안하무인이다. 문체만은 간결하고 박력이 있었는데, 잃어버린 세대의 대표작가 헤밍
일본 아베(60)수상 가문은 외조부 기시수상, 부친 신타로 외상을 낳은 명문이다.서던캘리포니아와 세이케이 대 철학과를 나왔고, 푸근한 인상의 신타로는 생전에 선조가 조선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시오노 나나미(77)는 가쿠슈인 대를 졸업하고 이탈리아로 건너가, 공식교육기관이 아니라 30여 년간 독학한, “로마인 이야기” 등 베스트셀러 작가다. 못 배운 어린아이도 아니고 나이 지긋한 소위 지식인들이, 왜 일본제국이 저지른 “과거사·위안부 얘기”에는 “회까닥” 이성을 잃을까? 일반론으로 풀어보자. 2차 대전 후 냉전시대에, 승전국 미국의 적극적인 비호아래 안보는 무임승차요 6·25와 베트남전쟁 특수까지 어부지리를 누리면서, 일본은 폐허로부터 넘버 투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였다. 부동산이 다락같이 폭등하여 일본 땅을 팔면 미국 본토를 몇 번씩 살 수 있다면서, 소니는 영화사를, 미스비시는 록펠러빌딩을 사들이는 등 거침이 없었다. 거짓말처럼 갑자기 거품이 꺼진다. 대다수 국민의 재산목록 1호인 집값은 졸지에 반 토막 나고 골프장 회원권은 1/10 값에도 안 팔려 줄줄이 도산하며, 기업은 사들인 미국회사·부동산을 엄청난 손실을 감수하며 토(吐)해낸다.가난해진 소비자는 지
반 친구를 성폭행한 혐의로 열두 살 초등학생이 판사 앞에 섰다. 엄마가 아들 바지를 내리고 고추를 툭툭 치며 말한다. “판사님 이걸로 어떻게 폭행을 합니까?”아들이 한마디, “엄마, 그만 좀 해. 자꾸 만지면 우리가 불리해져!” 의지와 무관하게 자극을 받으면 공격 자세를 취하는 수컷의 눈치 없는 생리를 소재로 한 개그다.정자의 성숙에 3주 쯤 걸리고 적당히 배출하지 않으면, 젊고 건강한 남자는 몽정(夢精: Wet Dream)을 한다. 그래서 뽀빠이 이상용 씨 왈(曰), “세탁기 돌릴 형편이 안 되면 가끔 손빨래라도“ 하라던가? 자제력이 약해지면 충동적·돌발적인 성폭행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폭행 후 죗값을 치르고 나와 전자발찌를 찬 채로 재범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20대 전후 혈기 넘치는 남자의 집단인 군대사회에서는, 특히 극도의 긴장이 되풀이 되는 전쟁터에서 남성 리비도의 해소가 매우 중요라고, 비전투 장기주둔 지역에서 문제가 더 심각할 수도 있다. 가장 오래된 직업(?) 매춘의 역사는 순례자를 맞는 신전의 여인들로 거슬러 올라간다지만, 미군들이 매춘부를 Hooker라고 부른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어원은 워싱턴 방위사령관 이름이며(Joseph H
팔십 년대 초까지도 빈대라는 놈이 있었는데, 책갈피나 벽 틈에 숨었다가 불을 끄면 우루루 달려들어, 물리면 사흘쯤은 미치게 가려웠다. 보통 살충제는 어림도 없고 “쥐약이나 빈대 잡아요!” 외치고 다니는 행상꾼들이 있었다. 덕분에 빈대가 박멸되자 동시에 이들 꾼들도 사라졌다. 이들은 맹독성 농약 파라치온을 희석해서 집안 구석구석에 뿌렸는데, 아무리 긴 옷에 마스크로 무장을 해도, 조금씩 스며든 농약이 결국은 목숨을 앗아갔다고 했다. 사실은 때마침 연탄보일러가 보급되자 벽 틈에 살던 빈대가 전멸하고, 따라서 꽤 벌이가 좋던 빈대 잡이 직업도 사라졌다는 해석이 보다 더 그럴듯하다. 이제는 연탄보일러마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영화 사브리나에 나왔던 롤스로이의 최고급 차 팬텀. 일본의 한 졸부가 주문했다가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돈 좀 있다고 아무에게나(?) 팔지 않는다는 것. 세태 변화는 어쩔 수 없어 콧대 높던 이 회사도 외국기업에 넘어간 뒤 달라졌다고 한다.제일모직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때, 최고급 양모를 사려고 호주에 갔더니 역시 안 판다는 대답을 들었다. 몇 년 공을 들이니까 그제야 정장 열 벌 분량을 팔고, 정식 바이어로 인정받기까지 10년이 걸렸다던가
월남전으로 군의관 수요가 갑자기 늘자, 미 정부는 수련병원의 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외국 의사들을 받아들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많은 한국의사가 도미하여 미국 의료계의 현실이 알려졌다. 역시 정형외과와 산부인과가 인기인데 의료사고에 대비하는 보험료도 높아서, 보통 매출액의 2, 30%라고 했다. 의료사고소송을 Medical Malpractice Suit로 번역하지만, Malpractice는 의사의 태만이나 잘못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주의의무를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불행한 경우에는 (Medical) Accident로 불러야 옳을 것이다. 실제로 과오와 불가항력의 경계는 애매한 경우가 많고 실정법은 현실적인 약자를 더 보호하므로, 의사는 소송에 대비하여 거액의 보험료를 지불하는 것이다. 일반 상거래에서 보험료가 매출액의 2, 30%라면, 그렇게 위험한 직업은 존립할 수 없다. 대체 불가능한 사람의 건강과 생명의 문제이므로, 일정 비율의 사고를 상정하고 위험을 분산시키자는 것이 의료사고 보험이다. Insurance가 아니라 Risk Allowance이다. 과거에는 대체로 원장 개인이 사고를 해결했지만, 이제는 한계에 달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