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aejeon!”은 대전을 상징하는 brand로서, 이 이름의 월간 소식지가 통권 139호를 자랑한다. “I ♡ NY” 만큼 기발하지는 못해도, “대전이로구나! 아무렴, 대전이지! 대전이잖아?” 어떻게 풀어도 마음에 든다. 우리나라 전복의 80%를 공급한다는 완도의 “건강의 섬, 완도”는 8년을 넘어 군수가 바뀌어도 계속 사랑을 받는다. 그래픽디자이너 밀턴 글레이저가 만든 로고 “아이 러브 뉴욕”은, 사랑에 빠진 남녀가 우리만의 나무에 “Tom ♡ Mary”라고 이름을 새기는 미국적인 관습과 추억이 있기에, 뉴요커들이 기쁘게 받아들여 어언 40년 된 명품 브랜드다.2002년 MB 취임 때 만든 “Hi Seoul”은, 그 뒤에 덧붙여 쓰던 “Soul of Asia”를 중국이 문제 삼았다는데, 아시아의 영혼을 자처하는 “한국 굴기(?)”를 남들이 환영할 리 없다. 그러나 불쾌하면 꼬리만 떼어내면 되지 “하이 서울” 자체를 버릴 명분은 못된다. “Hi Seoul”이 “Yes Tokyo”와 비슷하다고? 도쿄 로고는 샘날 정도로 훌륭할 뿐 아니라, ‘인사’와 ‘감탄’은 하늘 땅 만큼이나 다르다. YS가 소위 “역사와의 대화”끝에 이룬 업적(?) 중에 중앙
제2차 세계대전 역사에 소련 역할이 과소평가됐다는 주장이 있다. 일리는 있지만 대부분은 이념을 밥줄로 삼던 학자들의 마지막 몸부림이다. 히틀러에게 슬라브 족은 유태인처럼 하급 인종(Untermensch)이요, 공산당은 바퀴벌레보다 먼저 박멸할 인류의 적이니, 두 조건이 딱 들어맞는 스탈린의 소련은 바로 숙적이었다. 히틀러는 영국 정복을 뒤로 미루고 소련을 침공하였으니, 승패에 앞서 혐오의 대상이던 소련인민에게는 그야말로 생존이 걸린 투쟁이었다.비밀에 쌓여 정확치는 않으나 소련의 전사자 750만은, 한 달을 못 버틴 프랑스 20만 영국 27만, 늦게 참전한 미국의 40만(태평양전쟁 포함)에 비해 엄청나다. 패전국 독일(290만)의 2배가 넘지만, 그 숫자는 스탈린 손에 죽은 소련인민보다는 작을 것이다. 몇 천만의 인민, 특히 군의 핵심인 장교 수천 명을 숙청한 스탈린 군대는, 지휘관을 잃은 오합지졸로서 초전박살을 당했다. 소련에 올 인한 것은 히틀러의 선택이요, 소련 역할이 컸다기보다, 연합군 전쟁노력의 대부분이 결국 “소련 살려주기”였다. 전후 독일에서 돌아온 2백만 소련군 포로의 뒤 소식은 알 길이 없다. 넓은 영토와 큰 인구에 교통(도로·철도)·식량·
칼럼 ‘통일의 기운’ 세 편을 쓰고(2015. 7. 27-7. 31) 게재되기도 전에 날벼락처럼 목함 지뢰가(8월 4일) 터졌다. 임기 5년의 반환점에서 획기적인 대북제의를 구상하던 대통령만큼은 아니라도, 필자도 한순간 원고폐기를 망설였다. 그러나 7·4 공동성명(1972) 이후 40여년을 정리해 두면, 앞날을 전망하는 원점으로서 유용하리라고 판단하여 그대로 살리고, 이번 사건의 의미 두 편을 덧붙여 보기로 했다.첫째는 ‘뗑깡’이다. 과거 대통령 특사 후에 한동안은, 동네의원이나 상점에 별 몇 개씩 전과를 자랑하는 짧은 머리 불청객의 행패가 심했다. 기물을 부수고 손님들을 쫓아내면, 주인(원장)이 알아서 몇 푼 쥐어 준다. 주면 더 자주 오고, 칼같이 거절하면 결국은 안 온다. ‘퍼주기’라고 탓하면서도 우리가 나쁜 버릇을 키워온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둘째 ‘무모함’... 중국은 개방되고 푸틴의 과거로의 회귀도 유가 폭락에 비틀거리며, 베네수엘라 차베스는 죽고 쿠바도 미국과 악수하였다.세계가 먹고살기·경제 살리기에 여념이 없어 기댈 곳은 오직 남한뿐인데, 북측의 도발은 너무나 어리석다. 셋째 ‘병적인 신앙’이다. 황병서는 북한이 지뢰와 전혀 관계없다고 우기
동갑내기 황석영의 소신과 용기에 늘 감탄한다. 작가로서 엄청난 자산을 쌓을 기회라 해도, 목숨을 걸고 밀 입북하여 7회나 김일성을 만난 것은 어려운 결단이다.그러나 김일성을 을지문덕·세종대왕·이순신 같은 위인으로 칭송한 것은, 재간둥이라는 칭찬에 홀린 글쟁이의 아부라기보다, 세계관의 착시가 빚어낸 잘못된 소신으로 본다. 5년의 투옥 끝에 DJ 특사로(1998) 나온 뒤 안정을 찾고, 소설 ‘낯익은 세상’(2011)의 성공은 대한민국과의 화해선언이었던가? 참았던 끼가 끝내 폭발하여, 장편 ‘여울 물소리’를 서점에서 거둬들이고 절판선언을 한다(2013). 과거에 혜택을 보고도 출판사만 탓한다는 시비도 있었으나, 베스트셀러를 조작하는 출판사의 ‘사재기’에 경종을 울린 용기는 갈채를 받았다.지난 대선에서는 문 후보를 지지하면서, 박 후보가 당선되면 프로방스에서 밥집을 한다는 공개 약속을 하였으나, 결국 부도를 냈다. 이와 같은 과거의 화려한 무용담(?)에 비하면 ‘문창과 설화(文創科 舌禍)’는 약과다. 다만 이제라도, 쿠데타가 육사 탓이 아니듯 한국 문단의 침체가 문창과 탓이 아님을 인정하는, 사시(斜視)교정 시술을 받았으면 좋겠다. 싹싹하게 실수를 인정한 황석
1960년대에는 대학 수가 적고 진학률도 낮아 대학생들의 자존심이 꽤 높았다.등록금 비싼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아, 시골에서 소나 논밭을 팔아 등록금을 대니, 우골탑(牛骨塔)이라는 자조 섞인 말도 생겼다. 뒤집어보면, 아직은 상아탑(象牙塔)이니 등용문(登龍門)이라는 우아한 어휘가 유효하던, 가난해도 희망을 향하여 달리던 시절이기도 하다. 청량리 하숙집에서 경희대 국문과 학생과 한국외국어대 일본어과 학생이 만나 한 쪽이, “한국외대 부속 경희학원” 하면 “경희대 병설 외국어과”라며 받아치는 약 올리기 입씨름이 일쑤였다. 당시 SKY를 빼고는 어느 대학이던 서로가 지지 않는 맞수였는데, 드물게 예외적인 존재가 바로 서라벌예대였다.특히 문예창작과는 소신지원의 고고(孤高)함을 자타가 인정하였다. 명문 인문고교 학생이면 열에 두 셋은 철학서를 뒤적이고 예능(경박한 TV예능이 아님)을 존중하던 시절이라서, 열정과 천부적 재능을 갖추고 취업전선에서 라이벌이 아닌 ‘그들만의 리그’를 인정했던 것이다. 어느덧 서라벌의 문창과는 중앙대에 합병되고, 모두 60 군데이던 문창과가 다시 40여 곳으로 줄었다고 한다. 그동안 문창과는 한국문학의 사관학교로서 쟁쟁한 문인들을 배출했을
토마스 해리스의 Red Dragon 시리즈는, ‘맨 헌터(1986)’로부터 ‘한니발 라이징(2006)’까지 계속 영화화 되고, A. 홉킨스와 J. 포스터가 출연한 ‘양들의 침묵’이 대박을 터뜨려, 사이코패스·연쇄 살인범에 대한 사회의 관심을 끌었다. 주인공 한니발은 피해자의 숨을 끊는 순간 신(神)이 된 듯 착각과 희열을 느낀다. 생명을 창조할 수 없지만 뺏을 수는 있다는 이상심리에서, 우간다의 이디 아민처럼 초인적인 힘을 얻겠다고 인육까지 손을 댄다.조직결속을 위한 것이라는 차이는 있으나 우리 범죄사에도 지존파가 있다. 신부가 되려던 스탈린은 권력투쟁 때부터 수천만을 숙청한 ‘인간백정’이었다. 종전 후 독일수용소에서는 귀국이 두려워 자살하는 소련포로가 속출하고, 스탈린은 마지못해 받아들인 2백만 명을 시베리아에 분산시켜 자동해결(?) 했다고 한다. 귀국이 두려운 이유는, 첫째 독일 포로생활이 소련의 일상보다 풍요했고, 둘째 죽지 않고 포로가 되어 조국을 배신했다며 처형당할 걱정, 셋째 비록 적국 수용소지만 자유를 경험한 포로들이 돌아와 잘 길들인 인민을 오염(?) 시킬 우려 때문에, 스탈린이 살려둘 리 없다는 점 등이다. 소련 전사자는 750만인데 부상자
“전 재미로 문법책을 가끔 사 봅니다.” 유명 영어강사의 말에 학생들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언어는 자연스러운 의사소통이니까, “법(法)으로 따지지 말고 몸으로 익혀라.”는 권고다. 그러나 아무리 현장 외국어가 유창하다고해도, 일단은 문법을 배워야 잘 정리가 된다는 뜻으로, 사실은 문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영문법이라면 필자는 구닥다리 ‘삼위일체’를 추천하는데, 그 책에 이런 예문이 나온다. “모든 젊은이들은 꿈꾼다. 건축 기사나 해외특파원이 되기를...” 실제로 신문사 방송사에서 고위직에 오른 분들은, 대략 10년 정도의 해외주재 경력이 있다.그 나라 언어를 구사하면서 내 나라를 객관적으로 살피게 되고, 외국인으로 살며 치열한 보도경쟁을 겪은 경력에서 내공이 축적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항상 예외는 있다. 미개하고 언어가 원시적인 나라 태생이거나, 사회가 어떤 광기에 휩쓸려 이성이 작동하지 못하면, 정신적인 장벽(mental block)에 가로막혀 사리분별이 어렵다.그런 풍토에서는 적어도 학생들이 선망하는 특파원이 나올 리가 없다. 우리가 세월 호로 휘청거릴 때 일본 산케이 신문 서울지국장 가토는, 박대통령의 청와대 7시간에 대하여, 불륜을 암시하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대공황에 이르는 과정은 정해진 수순이었다고 말한다. 모든 참전국은 전쟁 피해와 총동원 해체의 혼란, 승전국의 욕심이 낳은 베르사유체제의 모순, 리더로 떠오른 미국을 중심으로 미성숙한 자본주의 경제의 과열, 등이 엄청난 파열음을 내며 폭발하였다. 굶주림에 줄을 선(Bread Line) 시민은 상상 속에서나마 현실에서 탈출시켜줄 영웅을 목마르게 기다리고, 만화나 소설에 타잔·코난·배트맨·슈퍼맨 같은 캐릭터가 탄생한다. 20세기 말부터 건설·제조업을 위시한 노동집약적 산업은 뒷전으로 밀리고, 펀드·정보·미디어처럼 경계도 모호하면서 경제규모가 커질수록 고용은 줄고 빈부는 양극화하는, 새로운 산업혁명이 대세가 된다.선진·후진 할 것 없이 수치심도 저버린 증오와 극단주의가 판을 치고, 온 세상이 탈출구 없는 혼란 속에 몸살을 앓는다. 명량·배트맨·어벤저스·터미네이터....흘러간 영웅들의 복권(復權) 시대가 온 것인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북한의 막말이 도를 넘었다. 소위 ‘최고 존엄’을 향해, “조부 김일성을 흉내 내어, 고사 상에 올릴 (털을) 밀다 만 무엇처럼 살찐 애송이가, 카리스마를 급조하려고 공포의 철권을 휘두르고 있다.”고 말하면
7·4 공동성명에 이어 제1차조절위원회를 연지 닷새 만에 유신이(10. 17.) 선포되자, 김일성은 불같이 화를 내고, “나를 속이고 이용한 이후락을 처단하라”며 무장공비를 내려 보냈다. 계획은 실패하고 박대통령의 베트남 예언은 적중했으나, 닉슨은 탄핵을 당하고 카터의 주한미군 완전철수 결심은 워싱턴·펜타곤 참모들의 설득에 꺾여서, 현재까지 1개 사단이 남침 억지력으로 주둔하는 것은, 한국은 물론 세계평화를 위해서도 다행스러운 일이다.입법·행정·사법 3권을 쥔 사실상 종신대통령제인 유신과 더불어 중화학공업 육성으로 국력과 국방력의 도약을 꾀한 박정희의 꿈은 궁정동의 총성과 함께 사라지고, 정통성이 취약한 신군부가 미국정부와 타협하면서, 핵과 미사일에서 남북 간의 격차는 결정적으로 벌어지고 말았다. 불행하게도 화해와 통일의 칼자루는 평양이 쥐고 있다. 철없는 10대가 칼을 휘두르면 우선 달래야 한다. 핵을 쥔 북한을 머리에 이고 사는 우리의 딜레마다. 그러나 한 번 따져보자. 이제 6·25 남침의 1차 피해자들은 거의 세상을 뜨거나 사회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책임지고 사과해야할 가해자집단은 평양이요,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역행하는 만행을 밥 먹 듯 하며 고모부
거대담론으로 풀면 역사의 흐름에 개인의 기여도는 미미하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각 그 자리에 그 인물이 있었던 인연으로 역사와 영웅은 탄생한다. 조잡하고 시커먼 두루마리 화장지를 사려고(배급품), 칼바람 속에 한 블록을 두 바퀴 돌아 줄을 선 모스크바 시민들... 겨우 차례가 되자, “물건 떨어졌어요.” 무뚝뚝한 직원의 한 마디로 상황 끝이다. 1920년대 레닌의 신 경제로부터 70년대까지 국가가 주도하는 기획경제 예찬론자는 늘 있었지만, 제품의 질과 양에서 자유경제에 밀려 거의 용도폐기 되었다.1961-1981, 이 20년 동안 미국 대통령은 케네디·존슨·닉슨·포드·카터의 다섯이다. 통상 연임하여 임기 8년이면 셋으로 충분하나, 암살·재선 포기·탄핵 등 리더십 문제에 두 차례의 오일 쇼크와 베트남전이 겹쳐 기간산업이 도산하는 어려움 속에, 국민은 노조출신 ‘소통의 달인’ 레이건에 기대를 걸었다.레이거노믹스는 통화 공급은 엄격히 하되 대규모 감세와 규제완화로 자유경제를 활성화하는 경제회생 정책이었다. 재선 임기에 들어서자, ‘작은 정부’라는 취지와는 어긋나지만, 냉전체제를 종식시키려는 ‘전략방위구상(SDI: 별들의 전쟁)’으로 Evil Empire 소련을 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