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에겐 기본적으로 비빔 본능이 있습니다. 아무리 상 위에 산해진미가 한가득 차려 나오더라도 종국엔 비벼 먹어야 직성이 풀리니 말입니다. 유교문화가 발달한 안동이나 진주 쪽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헛제사밥의 경우에도 밥에 각종 나물을 올리고 그리고 탕국물을 조금 떠 넣은 뒤 비벼 먹는 방식이니 비빔의 역사는 유교의 역사와 함께 꽤 깊어 보입니다. 그런데 왜 유독 우리나라 사람들만 비벼먹는 걸 좋아할까요? 혹자들은 외국의 식사 방식은 메뉴가 순서대로 나오는 ‘시간전개형’이지만, 우리는 상 위에 한꺼번에 차려 나오는 ‘공간전개형’이어서 여러 반찬을 입에 집어넣고 구강 내에서 비비고 섞어 새롭게 만들어지는 맛을 찾는 것이라며 미화를 하지만, 아무래도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일본 사람들에겐 우리의 비빔밥에 해당하는 덮밥이 상당히 다양하게 있는데, 그네들은 밥과 밥 위의 올린 건더기를 절대로 섞어 먹는 법이 없습니다. 젓가락으로 밥 따로 반찬 따로 즐기는 것이 돈부리(덮밥) 음식의 핵심이지요. 그네들은 음식을 섞음으로 해서 본래의 맛을 훼손하는 것을 매우 두려워 하지만, 우리는 아무 거리낌이 없습니다. 이런 성향을 고려하면 과거 우리나라를 지칭했던 '은둔의 나라'
세포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생명 기본 단위이다. 인간의 몸도 거대한 세포들의 집단으로 형성된 하나의 구조물인 셈이다.인간의 몸은 단순한 기계적 구조술이 아니고 유전적 조건이나 환경적 조건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 유기체이다. 다세포 생물개체로 구성되어 있는 인간의 세포들은 세포 서로 간의 더 큰 이익을 위하여 서로 힘을 합치기도 하고 세포 자신을 파괴시키기도 한다. 많은 생물들은 생존을 위한 진화적인 절박성이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수효가 너무 많아질 경우에는 자신들의 일부를 스스로 제거하는 자정작용을 하여 그 집단의 생존률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그 대표적인 본보기가 세포의 죽음이다. 조용히 진행되는 예정된 세포들의 죽음은 손상된 부위를 신속히 복구하고 죽은 세포들을 신속히 절도 있게 제거함으로서 새로운 세포의 성장을 촉진하고 새로운 조직을 탄생 시키는 것이다.세포의 죽음을 여러 가지 유형이 있다. 외부요인에 의해 우발적인 현상으로 세포죽음을 맞게되는 세포살해(cytocide)가 있고, 포유동물 세포에서 나타나는 격력하고 저항적인 세포 죽음인 괴사(necrosis)가 있다. 세포 살해나 괴사와는 다른 특이한 세포의 죽음이 세포자살(apoptosis)
안양(安養)은 대도시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어울리는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위로는 수도 서울에 치이고 밑으로는 경기도청이 있는 수원으로부터 협공을 당한 까닭에 덩치만 어른이었지, 도시 규모에 따르는 공공기관, 교육기관 혹은 문화시설 등이 미흡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하여, 예전에는 명문 고등학교가 생길 여건이 되질 못했는데, 공부를 조금 한다 싶으면 어려서부터 서울로 전학을 가거나 아니면 시험제였던 수원으로 진학을 하곤 했기 때문이었죠.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한 학급 65명 중에 무려 20여 명이 안양 출신이었던 걸로 기억이 나는군요. 그러다가 겨우 십여 년 전, 서울과 수원이 평준화가 되고나서야 안양에도 명문 고등학교들이 생겨났습니다만, 요즘은 다시 특목고나 안산지역의 자율형사립고등학교로 진학을 한다고 하네요.원래 '안양'이라는 말은 마음을 편안히 하고 몸을 쉬게 한다는 뜻도 있지만,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인 '극락'을 의미하는 불교 용어입니다. 그래서인가요? 수십 년 전, 관악산 유원지에서 생긴 물난리 이외에는 별다른 재해도 없었고, 역사적으로 기록이 될 만한 사건이 발생한 적도 별로 없는 무척 안전한 곳입니다. 정조대왕이 수원화
역사에 가정법(假定法: if)은 “죽은 자식 무엇 만지기”라고 한다. 그러나 70년이 넘도록 “친일”의 잣대에만 매달리는 어리석음을 극복하려면 한 번 짚고 넘어가보자.국권을 넘겨준 1910년, 대한제국에는 일제와 일전을 불사할 의지도, 그만한 상비군도 없었다. 분에 못 이겨 자결하거나 지방에서 산발적인 저항에 그쳤고, 뜻있는 지사들은 망명을 택하였다.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에 고무된 “3·1독립선언”을 계기로 자리가 잡힌 임시정부와 국제사회에서 독립을 호소한 이승만박사 등 선구자들, 이 쌍두마차 덕분에 일제 패망 이후에 독립을 약속받았다. 만약 일제에 병탄당할 당시에 백성들이 세상 형편에 눈을 뜨고, 일제의 압제가 싫어 인구의 1/3쯤이 만주로 이주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열 명의 빈자리는 열다섯의 일본인이 채웠을 것이다. 제국주의가 침략·점령한 땅에 자국민을 이주시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니까. 국가는 개인보다 더욱 게걸스럽고, 제국주의는 탐욕의 덩어리다. 그래서 제국주의 시대의 국제분쟁해결은 기정사실(fait accompli)과 현상유지(status quo)가 우선이요, 지금도 크게 달라진바 없다. 그러므로 인구분포가 높고 유효하게 지배하고 있으
고백하자면,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 갔던 횟수보다 대만의 국립고궁박물관을 더 많이 찾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서울 용산에 멋들어지게 박물관이 들어섰지만, 과거엔 우리나라의 귀한 국보와 보물들이 제 자리를 잡지 못하는 바람에 십 수 년 동안 일부는 전시되고 나머지는 수장고에서 이리저리 홀대를 받았습니다. 과거 경복궁 옆 국립박물관은 이제 민속박물관이 되었다지요? 그나마도 학생 때는 박물관 관람보다는 정원에 있던 찻집에서의 미팅만 기억이 납니다.그런데 타이베이의 고궁박물관을 그리도 찾았던 이유가 특별히 중국의 역사나 유물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타이베이에서 낮 시간을 보낼 곳이 마땅찮아서입니다. 예전 같으면 골프나 치고 발 마사지도 받았으련만 이젠 모든 게 귀찮습니다.저 같은 ‘어리버리’ 관광객을 위한 고궁박물관을 제대로 관람하는 팁은 다음과 같습니다.일단 1층 입구로 들어가(진짜 유물에 관심이 있으면 한국어 오디오 서비스를 제공 받으세요), 전체 중국역사를 요약해 놓은 방에 들릅니다. 이곳에서 대강의 중국사연대기를 확인하는 것이죠. 그리고는 뒤 쪽 화장실로 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 꼭대기 4층까지 가는 겁니다. 그런데 4층은 전시장이 아니라 찻집입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의료업은 생산·유통업이나 오락·레저산업과는 달라, 좋은 소식은 통해도 “노이즈마케팅”은 금기다. 투자는 않고 봉사만 강요하는 정부와 대척점에 서서, 상대적인 수입의 감소에 집단이기주의로 몰려 명분마저 잃는 등, 의료계가 몸살을 앓는다. 의사협회 집행부의 파행이 계속되는 이유다. 그중에도 치과 의료계는 몇 년 전부터 사무장과 불량네트워크 치과(이하 네트워크)의 덫에 걸려, 어렵게 쌓아온 신뢰마저 잃고 더블 딥에 빠져있다. 네트워크는 국민을 위한 착한 수가라고 강변하지만, 길게 보면 치과의사는 점점 더 착취당하고, 환자 건강은 과잉진료에 무방비로 노출되기 쉬운 구조다. 수가파괴와 묻지 마 유객행위로 골목개원가가 초토화되는 경제적인 피해는 서막일 뿐이다. 견제와 균형이 무너져 “자본이 무제한 독식하는 왜곡현상“이 세계경제위기의 중요한 원인이라면, 네트워크는 그 “전형적인 본보기”라고 할 것이다. 이를 바로잡으려던 협회가 난타전에 휘말려, 시간적 경제적 손실에 더하여 “신뢰의 추락”이라는 막대한 타격을 입은 것, 이것이 지난 몇 년 간 치과계가 처한 상황의 간추린 보고서다. 미친 X 옆에 있다가 날벼락 맞는다고, 원치 않은 “노이즈 마케팅”만
의학에 종사하는 사람은 물론 생물학자, 종교학자, 철학자, 모두에게 생명 현상은 가장 근원적이고 가장 절실한 화두일 것이다. 생명의 본질이 워낙 깊고 넓은 것 이여서 어떤 하나의 관점으로 간단히 생명을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로움을 지니고 있다. 생명에 대한 통일된 견해를 얻기는 물론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생명에 대해 전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만도 아니다.직관적이고 상식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막연한 생명의 개념은 있다. 생명이 물질은 아니다. 그렇다고 생명이 물질은 떠나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생명은 성(聖)스럽다고도 말하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을 지키고 존중해야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의학은 한마디로 생명을 보전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현대의학은 생명의 변화와 작용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분석하기가 곤란하다는 이유로 생명현상에 대한 본질에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건 사실이다. 생명현상을 연구하는 생명과학은 요즈음 유행처럼 번창하고 있지만 막상 생명의 본질이나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는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다. 자연과학적인 생명의 정의는 생명의 외적인, 물리적인 형태에만 관심을 보이고 막상 생명이 가지고 있는 내면적인 차원인 영적(靈的)인 측면을
조선조 전제군주국에서 천황제 군국주의 식민지가 되고, 이어 김일성 남침으로 전시체제와 군사정부를 겪은 문화예술계는, 오랜 세월 “사전검열”을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1996년 공연윤리위원회에 대한 위헌판결 이후 영상물등급위원회(영등위)가 발족, 이제 영화는 “전체”에서 “제한상영가”까지 5개 등급으로 분류된다. 미국은 민간단체 산하 등급분류기구(CARA)에서 자율심사 하여 관객에게 의무적으로 알린다.등급은 미국에서 빌려왔지만, 미국은 관객(학부모)에게 알리는 “권고사항(advisory)” 이요, 우리는 사실상의 “규제”라는 점이 다르다. 영등위에서도 벗은 정면 샷(frontal shot) 보다 옷 입은 다리 벌림의 수위가 더 높아, 포미닛과 시크릿의 쩍벌춤은 처음부터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물론 하나가 하면 열이 따라하는 풍조에서 한류의 저질화를 막자는 취지에는 찬성하지만, 그것을 혐한파 일본인처럼 한국여성의 야릇한 기질로 몰아가는 악의적인 해석은 말도 안 된다. 수위가 결코 낮지 않았던 “노출과 쩍벌춤”의 원조 중에 이효리 씨가 있다. “쟁반노래방”이라는 칼럼에서(2002), “서글서글한 마스크에 활짝 웃는, 그리고 머리까지 갖춘 자연산 미녀.”라고 소개한
대체로 일식은 고급 음식으로 칩니다. 古來로 일식은 혀로 보고 눈으로 먹는 음식이라 했으니, 혀에 감기는 고급스러운 맛과 단순 절제미가 돋보이는 데커레이션(꾸밈)이 생명이겠지요.하지만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처럼, 일식이 현해탄을 건너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상당히 변질되었음을 부인 할 수 없습니다. 부담스러운 일식집 간판보다는 'OO 횟집'이라는 차라리 우리식 이름의 식당이 더 정감이 갈 정도입니다. 그러나 회(사시미)를 먹는 대표적인 나라가 일본과 우리나라이기 때문에, 서로 간의 장단점을 고려하여 새롭게 만든 퓨전 스타일이라고 일식집에서 항변한다면 딱히 할 말은 없지요.대체로 우리나라의 일식집들은 대중적이거나 고급이거나 할 것 없이 천편일률적입니다. 심지어 간판은 분명 '스시'집인데 저녁에 가이세키 혹은 회정식을 주문하지 않고, 초밥을 시켰다간 욕만 실컷 먹고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즘은 초밥을 전문으로 내는 식당들이 제법 생겨서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아서 좋긴 합니다만.게다가 맛은 둘째 치고, 일본의 정통 가이세키 코스대로라도 나오면 그나마 봐주겠지만, 우리나라 특유의 일식 코스는 '츠께다시'에 목숨을 거는 형국입니다 (가이세키는 會
신장개업한 동양백화점 나이트에서 (1980 경) 인기가수 김추자의 공연이 있었다.“추자!”는 곧 “Let's Dance" 라는 뜻인지 원조 댄싱가수의 현란한 춤은, 기름지고 뇌쇄적인 음색과 함께 그녀의 상표였다. 공연 막바지, ”늦기 전에“던가? 두 어깨를 격하게 흔드는 동작에 드레스 어깨끈이 흘러내리면서, 새까만 꼭지로 하여 더 희고 탐스러운 젖가슴이, 밝은 조명 아래 눈부시게 드러났다. 순간 객석은 숨이 멎은 듯 조용해지고, 꼴깍 침 넘어가는 소리는 내 목젖이었나? 하기야 필자 또한 피 끓는 30대 청춘이었으니까... 슬로비디오처럼 매우 천천히 어깨끈은 원위치하고, 춤과 노래는 그대로 이어졌다.다음날 시내 젊은 술꾼들 사회는 술렁거렸다. 노출이 돌발 사고였는지 신중현 사단의 신중한 기획·연출인지, 의견이 분분하였다. 그날 밤 클럽은 서서라도 마시겠다는 사내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는데, 애석하게도 고대하던(?) “사고”는 없었단다. 첫날의 해프닝이 “고도의 팬 서비스”나 “누드 마케팅”이 아니었기를 바라는 마음, 이건 또 무슨 심보였을까? 김추자씨가 33년 만에 컴백했다는 소식에 문득 떠오른 추억이다. 말 그대로, “나야 고맙지 뭘!” 해롤드·로빈스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