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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詩가 있는 풍경 12] 박인환 시인의 '목마와 숙녀'


목마와 숙녀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어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져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어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애수]

가을이 깊어지면 박인환의 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목마와 숙녀'와 '세월이 가면'은 세대에 상관없이 한국인의 사랑을 받는, 그의 대표 시입니다.
이 시를 읽을 때의 느낌은 뭐랄까? 마치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뭔가가 조금씩 꿈틀거리며 솟구쳐 오르는 느낌입니다. 다시 가라앉았다가 솟구치기를 반복하는..
그는 1926년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나 평양의전을 다니다 8.15를 맞았고,
이후 학업을 중단하고 종로2가 낙원동 입구에 마리서사라는 서점을 개업했다고 합니다.
46년 국제신보를 통해 '거리'라는 작품으로 등단했고, 동인그룹 '후반기'에서 활동하면서 49년엔 김경린, 김수영 등과 함께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하기도 했습니다.
55년엔 '박인환 시선집'을 출간했고, 그리고 이듬해인 56년 그는 심장마비로 자택에서 별세했습니다.
시인의 나이 불과 31세 때의 일입니다.

운명을 예감했을까요? 아래 '세월이 가면' 은 그가 요절한 바로 그 해에 쓴 시.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 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것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