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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맞서는 지성, 그 비극적인 자세

[시가 있는 풍경 4]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

 

즐거운 편지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背景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 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편지
편지를 쓴다. 몇 번을 찢고 다시 쓴다. 마음은 마음에서만 마음이다.
밖으로 내쏟은 마음은, 문자화된 마음은 어쩐지 낯이 설다.
그래서 편지는 좀 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물며 ‘즐거운 편지’라니.
그건 시인에게만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편지는 고통이다. 편지 쓰기의 어려움을 겪지 않고선 시인이 되지 못한다.
때문에, 연애편지는 절대 즐거운 편지일 수 없다.
시인은 말했다.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렸다’고.
그리고 말했다. ‘그 기다림의 사이 눈이 퍼붓고 그치고 또 퍼붓기도 할 것이지만,
그래서 그 어디쯤엔가 분명 내 사랑도 그치겠지만, 내 기다림의 자세만은
사소한 일상처럼 늘 그대에게 가 닿길 바란다’고.

이 시의 ‘즐거운 편지’라는 제목에 동의하시는가?
즐거운 편지라고 느꼈다면 그건 순간적인 착시일 뿐이다.
시인은 사실 이 시에서 고통 끝에 오는 체념을, 그 대립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시집 ‘三南에 내린 눈’에 함께 실린 ‘조그만 사랑노래’ 전문.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가득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송이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