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이 타는 가을江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江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가 다와 가는,
소리죽은 가을江을 처음 보것네.
객기
시인이 말년을 소일하던 종로2가 현현각에서 선생을 뵌 적이 있다.
허름한 건물 계단을 5층까지 올라간 끝에 조그만 문을 밀고 들어서자 중년의 사내 몇몇이 한창 열기가 오른 포커 판을 앞에 두고 앉은 채로 방문객을 맞았다.
그 중 한 분이 작은 목소리로 겨우 내 용무에 응대를 해 왔고, 나는 그의 주문대로 시인이 ‘하던 판만 마저 하고’ 내게로 건너오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다소곳이 그를 기다렸다.
그 때의 용무란 말단으로 참여한 3류 잡지의 창간호에 선생의 축시를 넣고 싶다는 것이었는데, 격에 맞지 않는 고료였음에도 선생은 그저 웃음으로 내 젊은 만용을 용인하셨다.
몇 년 후, 선생이 타계하셨다는 소식에 덤덤히 선생의 시집을 다시 빼어 들었다.
그리고 아~ 그때 비로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가 가는’ 선생의 가을강을 만날 수 있었다.
1973년 1월, 민음사에서 펴낸 선생의 시집 '천년의 바람'에 함께 들어 있는 짧은 시 '맑은 하늘 한복판' 전문.
맑은 하늘 한복판
새소리의 무뉘도 놓쳐버리고
한 처녀를 사랑할 힘도 잃어버리고
너댓살짜리 아기의
발 뻗는 투정으로 울고 싶은 나를
천만뜻밖에도 無期懲役을 때려
이만치 떼어 놓고
환장할 듯 환장할 듯
햇빛이 흐르나니,
바람이 흐르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