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ento mori! 고고한 동양철학으로 무장하여 생사를 초월한 척해 봐도, 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셔서 나이를 잊자는 망년(忘年)회야말로, 죽음의 공포 앞에 나약한 속내의 노출이 아닐까? 서양에서는 종무식처럼 그냥 종년(Year-end) 파티라 한다. 다행히 요즘은 묵은해를 보내는(Bid the old year out) 송년회로 통일이 되고, 가족이나 지인과 함께 음악회를 찾는 인구도 늘었다. 필자가 빠뜨리지 않는 콘서트의 으뜸은 베토벤의 교향곡 #9 환희의 송가다. 130여명이 우렁차게 외치는 ‘인간 승리’의 심장 떨리는 합창은, 한 해 동안 속에 맺힌 응어리를 풀고, 새로운 다짐에 가슴 부풀게 하는 인생응원가다. 다음, 가족동반이면 발레 ‘호두까기 인형’이다. 러시아 민요의 정수만을 뽑아낸 차이코프스키의 선율과 환상적인 율동에 이끌려 한바탕 꿈결에 잠겼다가 깨어나면, 아이들은 평생 간직할 아름다운 꿈을 적립하고, 어른들은 연말선물로 푸짐한 힐링을 챙긴다. 부부나 연인사이라면 다소 어둡지만 오페라 ‘라보엠(La Boheme)’이 좋다. 프랑스인들이 체코 중서부 주민들을 집시 같은 유랑민족으로 착각하여 붙인 이름이 보헤미아(Bohemia)이지만, 여기서
영화 ‘맨발의 청춘’은 한국판 ‘젊은이의 양지’였다. 라스트 신은 허름한 리어카에 아무렇게나 둘둘 말은 거적때기 밖으로 삐죽 삐져나온 신성일의 맨발. 땅이 꺼지는 좌절감, 방향 모를 분노, 다시 두 주먹을 불끈 쥐게 하는 도전의욕 등등... 문득 재킷 그림만 보고 벅의 CD 한 장을 사게 된 사연을 엮은 칼럼(1997)의 한 대목이다. 며칠 전 영원한 청춘스타 신성일씨가 우리 곁을 떠나갔다. 그가 혜성처럼 등장했을 때, 한국영화계에는 신파의 끝물 김진규와 최무룡, 그리고 이미 몸매가 팡 퍼진 신영균 아재의 사극(史劇) 밖에 없었다. 청춘남녀들은 세련된 외국영화에 비해 왠지 유치한 한국영화 상영관에 들어가기를 망설였고, 고무신 부대만으로 객석을 채우자니 영화계는 배가 고팠다. ‘맨발의 청춘’으로 젊은 남녀가 극장에 오기 시작했으니, 한국 영화계에 ‘스타’가 등장한 것이 아니라, 신성일이 “슈퍼스타가 있는, 당당하게 두발로 선 한국영화계”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가 다시는 나타날 수 없는 영원한 청춘스타인 까닭이다. 중앙일보 “남기고 싶은 이야기”는 대한민국 개발연대의 속내를, 당시의 주연들로부터 직접 보고 듣는 기록이었다. 전직 대통령을 포함하여, 열 쪽
몇 년 전 대전에서 경찰의 실수로 인질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설득 끝에 인질에게 칼을 겨눈 채 나온 범인을 죽도(벨 수 없는 연습용 대나무 칼)로 내려쳤다. 범인은 반사적으로 인질을 찔렀으니, 경찰이 무고한 사람을 죽인 셈이다. 선진국에서는 이렇게 ‘미련한’ 사고를 막으려고 현장교본(Field Manual)을 만들고, 실전 같은 모의훈련을 한다. 인질사건은 확실한 인질보호와 범인‘제압’이 최우선이다. 오래전 얘기지만 사슴목장에 초대를 받아 피를 먹은 적이 있다. 어차피 잘라야 할 사슴뿔(鹿茸)이요 그 때 흐르는 피를 술에 타서 마신다. 철망을 두른 공간에 말만한 엘크를 몰아넣고 수의사가 파이프 총으로 마취약을 쏘는데, 연거푸 세 발을 맞고도 쓰러지기까지 족히 5분쯤이 걸렸다. 지난 9월 18일 대전의 한 동물원에서 퓨마 한 마리가 우리를 탈출했다. 마취 총을 맞고 포획했다는 소식에 안심했는데, 한 시간쯤 지나 결국 사살했다는 정정뉴스가 나오자, 전국의 네티즌들은 후끈 달아올랐다. “평생 갇혀만 살던 불쌍한 퓨마, 마취 총으로 생포를 해야지, 아름답고 우아한 동물을 왜 잔인하게 쏘아죽였느냐? 이건 동물학대다.” 비난이 쏟아졌다. 마취 탄을 맞출 만
명랑소설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조흔파씨의 ‘얄개전’에서, 두수는 누나를 짝사랑하는 백선생에게 온갖 양념을 섞은 ‘맵짜시쓰달 차’를 먹인다. 맛의 기본은 감산고(甘酸苦) 세 가지라고 한다. 쓴맛은 짠맛과 통하고 여기에 통각을 더하면 매운맛, 해서 오미(五味)다. 그래서 매콤 달콤 짭짤한 떡볶이가 맛있는 음식이 아니라는 황교익의 주장은 지극히 편협하고 주관적이다. 온 국민이 사랑할뿐더러 심지어 ‘황실’ 떡볶이는 맵지도 않다. 그분 주장대로라면 냉면도 미식과는 거리가 멀다. 동치미국물에 식초 겨자의 양념과 메밀향이 살짝 풍기는 시원한 막국수일 뿐이다. 필자는 어렸을 적부터 메밀향이 진한 온면(溫麪)이 더 좋았다. 6·25 전 겨울에 유성온천 냉면집은, 냉면·온면을 거의 반반쯤 팔았지 싶다. 1960년대 을지로 버드나무집에서는, 냉면 대신 불고기 국물에 냉면사리를 뜨겁게 익혀먹었고, 우래옥이 이어받은 이 방식을 지금은 사리원면옥에서 산내 산 사리로 즐긴다. 그래서인지 2000년 금강산 길에 온정리에서 맛본 냉면은, 그저 “제법이네.” 정도였다. 치열한 자본주의 경쟁에서 살아남은 셰프의 솜씨나, 풍성하고 질 높은 식자재를 따라갈 수 없는 북한에서, 어차피 정식
경제가 어려워지니 광고가 줄어 방송계가 고전 중이라는데 종이언론(일간지)은 말할 것도 없다. 그나마 대기업 가전제품과 자동차가 명맥을 잇고, 인구 노령화에 맞춰 효과가 알쏭달쏭한 건강식품·대체의학 제품들이 틈새를 채운다. 그런 중에 제법 내용이 쏠쏠하고 가격도 실한 상품을 잇달아 히트시키는 광고계의 효자 M사가 있는데, 최근 “전통의 아름다움과 멋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 했다는 ‘M 생활한복’을 출시하였다. 1980년대 초 주택공사에 수용되기 전 필자의 본가와 외가(용운동과 법동)는 중농고택(中農古宅)이었는데 큰 사당(祠堂)이 있었다. 큰집에 입양된 증조부 유훈으로 4대 봉사(奉祀) 제사 끝에 4년 전에 매혼(埋魂)을 하였다. 잔을 올릴 때마다 길게 늘어진 도포 소매가 가로 걸쳐, “이렇게 불편한 의관 탓에 조선조가 망했지.”라고 중얼대다가 선친께 눈물이 쏙 빠지도록 훈계를 들었다. 까다로운 의관정제(衣冠整除) 자체가 조상님을 뵙는 마음가짐이요, 다른 제물(祭物)을 건드리지 않도록 왼손으로 소맷자락을 받쳐주는 자세가 조신한 몸가짐이라는 것이다. 의관정제란 “옷을 격식에 맞게 차려입고 매무시를 바르게 함” 아니던가? 의관정제는 조선 오백 년을 이
대전 역 앞에 명품(?) 중고의류 가게가 있다. 상호가 ‘건빵 * 빈티지’ 이니 별표는 아마도 옛날 건빵 봉지에 들어있던 별사탕인가보다. 제복(Uniform)에 대한 인간의 이중 심리, 기피와 선망을 교묘하게 이용한 마케팅은, 밀리터리 룩(Military Look)으로 일류 메이커들의 효자상품이 되었다. 유리문에 붙인 글은 더 재미있다. “가격은 대화입니다(Price is Conversation).” ‘협상의 기술’이 아니라 ‘거래의 진수(眞髓)’다. “말만 잘하면 공짜”와 일맥상통한다. 그렇다. 민주국가에서 서로 뜻이 맞으면 그만이지 거래에 제3자가 왜 끼어드나? 회의석상에서 모든 발언이 사실상 ‘동의(動議)’이듯 일상의 대화는 결국 거래다. 예를 들어 “아빠 구두 잘 닦아놓으면 용돈 2천원.”도 거래다. 여기에 공정위가, “부모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미성년자 노동력 착취하는 불공정거래를 시정하고 과징금 2만원을 내라!” 하면 되겠는가. 지난해 여름 고용노동부가 ‘제빵사(士)의 본사 직고용’을 명령한 파리바게뜨 사태는 ‘긁어 부스럼’ 식 끼어들기였다. 양측이 서로 돕도록(相助) 권장하기는커녕, 둘 다 죽음(喪弔) 직전까지 몰아간 고약한 해프닝이었다.
1995년 여름 치과기공사회에서 기공료 인상요구가 있었다. 대전광역시가 아니라 전국적인 차원에서 일종의 ‘선발대’라는 설이 있어, 초반부터 확실하게 매듭 지어야 한다는 말이 돌았다.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지부장으로서 해당부서에 유권해석을 구했는데, ‘공정거래위원회’는 답변이 아니라 심사결과를 보냈다. 기공사회는 ‘담합행위’를 즉시 중단하고, 치과의사회도 집단으로 대응했으므로, 3 대 1 즉 기공사회 4억5천만 치과의사회 1억5천만 원의 과징금을 부과한다는 내용이었다. 대전지부도 1년 예산이니 날벼락이요, 기공사회 회장은 사색이 되어 대책을 부탁하였다. 장문의 해명·진정서를 썼다. 첫째 유권해석 요구에 심판으로 대답한 ‘절차상’의 하자, 둘째 회원의 연회비로 운영하는 사단법인의 지부로서 수익모델이 없는데 기업체처럼 과징금 부과는 ‘행정 과잉’이라는 점, 셋째 두 단체 모두 납부능력이 없어 전 회원이 ‘심판무효’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었다. 2주 후 엄중한 경고와 함께 과징금 취소 공문을 받아 겨우 한숨을 돌렸고, 기공사회장으로부터는 감사 인사를 받았다. 그 후로 현재까지 전국적인 협회차원의 인상요구는 자취를 감춘 것으로 안다. 1993년 지부
미륵불이 오신다는 56억7천만 년은 숫자라기보다 종교적 은유다. 천년의 신라왕국이 쇠퇴하자, 핍박받던 고구려·백제 망국민들의 메시아 기대심리가 후삼국을 탄생시켰고, 그중에도 영리했던 궁예는 석가모니 가신지 불과 천오백 년에 스스로 미륵불의 현신임을 선언하였다. 신정(神政) 일치의 천년제국을 꿈꾸며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궁전에 쇠기둥을 썼건만, 불과 10여 년에 무너진다. 곧고 탐욕이 없으며 카리스마와 애민정신은 넘치는 한편, 인내심·친화력·융통성이 없어, 복속해온 신라인을 모두 죽였다. 오만이 하늘을 찔러 말년에는 스스로 불경을 쓰고, 관심법으로 마음속을 뚫어본다며 법봉(法棒)으로 신하를 때려죽이는 등 악행을 일삼다가, 부하 왕건을 받들고 일어선 부하들의 쿠데타로 쫓겨났다. 법도가 아니라 자의적인 적폐청산으로 일관하여 민심과 나라와 목숨 모두를 잃었다. 고공 행진하는 지지율을 업고 법치주의를 우회하려는 일부 ‘얼라’들에게, 자기성찰의 계기가 될 고사(古事)다. 고대 아테네에서 독재적 지배자인 참주(僭主)의 출현을 막기 위하여, 지지율이 너무 높아지면 도편추방제도(Ostracism)를 시행하지 않았던가? 지정문화제 278호인 동숭동 옛 서울대 본부건
“이래 뵈도 내가 왕년에...”는 노화의 신호요, 이를 자꾸 반복하면 치매의 시작이라는데, 문맥상 신상발언을 좀 해야겠다. 우리 61학번은 고3 때 4·19의 선봉이었고(대전고 3·8 의거), 김정남 수석을 위시하여 6·3사태의 주력이었다(1964-65). 서울공대를 나와 기술고시에 합격한 이진구는 경부고속도로 공사에 구간책임자, 어수걸 양한호는 중동 건설현장 책임자였다. 베트남에서는 드물게 장교 전사자가 나왔고, 자수성가하여 현재도 회사 CEO가 여럿이다. 아직은 젊은 피가 용솟음치던 30대 초반 서슬 푸른 유신의 철퇴를 맞으면서, 민주화투쟁의 횃불은 다음세대로 넘어가, 부마사태와 유신의 종말로 이어진다. 과거사 얘기를 반복하는 이유는, 우리가 민주화와 산업화는 본시 한 뿌리임을 증거 하는 산 증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광주의거를 누르고 막강하던 5공도 말기에는 힘이 빠져(단임 약속), 대학생들은 강의실을 박차고 거리에 나선다. 결국 박종철·이한열의 희생으로 6·29선언을 끌어내지만, 양 김씨는 밥 빌어다 죽 쒀서 노태우에게 진상하였다. YS 중반 정치판에 데뷔한 6·29의 주역들을, 언론은 386세대(60년대 출생 80학번의 30대)라고 이름 짓고,
가슴에는 장구를 등에는 북을 메고 걸음마다 둥둥, “왔어요, 왔어요, 둥둥 북 구리무가 왔어요!” 외치던 거리의 명물이 있었다. 얼마 지나니까 원숭이 한 마리까지 가세하여 관중을 모아놓고, “벌떡 벌떡, 남자들 기운에 좋아!”하는 보약으로 바뀐다. 동네사람 모여드는데 영양가 있는(팔아줄) 어른은 손에 꼽을 정도요, 코 흘리게들 만 쪼그려 앉아 있어, 질펀한 외설을 늘어놓기도 민망하다. 그래서 마이크는 외친다, “가라가라, 얼라들은 가라!”가판 화장품은 국민소득 100달러 때 얘기, 수상한 보약은 천 달러 대 시절이다. 5공 당시 피스톨 강(12·12 행동대장? 사실 아님)으로 오해받은 초선의원 강창희는 말끝마다 외쳤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소득 5천 달러는 되어야 합니다.” 쉽게 풀은 JP의 ‘항산에 항심’이다.다섯 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가니 5학급 통틀어 가장 작고 어렸다. 부반장을 해도 통솔 불가능으로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다. 5학년 때(1953) 이승만 대통령 지시라며 ‘자치회’가 생겨 회장을 맡았다. 선거로 뽑고 논리로 설득하는 자치회는 덩치와는 하등 관계가 없었다. 우리는 이렇게 아장아장 민주주의의 첫걸음을 떼었다. 반만년 동안 민주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