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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중 칼럼

실버 통신 3 : 버스트와 데스마스크

[임철중의 거꾸로 보는 세상] - <250>

 

   수많은 고전음악가 중 단 한분의 성인(樂聖)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맞은 전 세계의 팬들은, 코로나의 회오리 속에서도 축제 분위기로 들떠있다.
 과학기술인의 실버타운인 사이언스 빌리지(사빌) LP 동호회도, 예비모임을 #6 전원 교향곡(카라얀; 베를리너)으로 선택했고, 계속 베토벤을 듣고 있다.
 지난 22일 ‘해피 엘피’ 정례모임은 피아노소나타 시간으로, 전반에 3대 소나타 비창·월광·열정을 빌헬름 켐프의 연주로 들었다.  그라모폰 LP판의 임자인 총무가 너무나 사랑했던(?) 탓인지, 월광은 잡음이 심했지만, 불평은 한 마디도 없었다.  후반은 베토벤의 후기 소나타인 #29 – 32 번.   LP가 아니라 Rudolph Serkin의 녹화 동영상이었다. 

 

   제르킨은 보헤미아(지금 의 체코, 1903-91) 태생 유태인으로 비엔나에서 활동했다.  나치에 쫓기자 토스카니니와 공연(1936)을 인연으로 미국에 망명, 주로 뉴욕에서 연주활동을 하여 뉴욕 필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Violinist 이레네(Irene, 독일)는 3세 때 그의 초청 연주를 듣고, “내가 커서 18세가 되면 저 남자와 결혼할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약속은 지켜져 6남매를 두고 해로하였다 하니, 해피엔드로 끝난 독일·체코 판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다.
 동영상은 감동적이었다.  매의 눈에 독수리의 코, 그리고 꽉 다문 그믐달 입술은, 성성한 백발과 함께 카리스마의 화신이었다.  검버섯은 집행 나온 저승사자가 탄복하여, 유예는 하지만, 그냥 갈 수는 없어 찜해놓고 간 자리라던가?  생전에 고 정주영 회장의 얼굴에서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제르킨의 상표인 악보에 대한 충실성·고전적인 명료함·교과서적 올바름은 여전하다.  84세 고령에 타건(打鍵)의 힘과 속도는 조금 떨어졌을지라도, 음의 강약과 리듬의 밀당(완급)은 오히려 여유와 무르익음으로 닥아 온다.
 덜 무른 팥알을 조곤조곤 씹는 것 같은 입모습은, 악보를 더듬는 암보(喑譜)의 몸짓인가?  베토벤의 후기 소나타는 폐렴·황달·결막염 등 병마와 싸우며 난청이 극에 달하여, 오로지 정서와 상상력에 의존하던 고통의 산물이다.   특히 왜 2악장에서 끝냈냐는 질문에 “시간이 없어서요.” 라고 말했다는 #32는, “인생을 초월한 폭풍 뒤의 고요함과 아름다움”이라는 설명처럼 3악장이 필요 없는, 사망을 5년 앞둔 52세 때 작품이다.  노년의 제르킨이 정든 NY 팬들에게 선사하는 카네기홀 고별연주곡으로서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얇은 격벽을 사이한 옆방에 민폐를 고려하여, 오피스텔에서는 작은 플레이어로 CD나 FM 방송을 듣는다.  그 앞에 30년을 간직한 무광택 차이나의 작은 버스트(흉상; Goebel 社) 3개가 있다.  바흐와 모차르트 사이에 베토벤의 미간에는, 고독과 고통의 아픔 그리고 창작의 신산(辛酸)이 고스란하다.
 해군 군의관 시절 진해 흑백다방 벽에 걸린 베토벤 데스마스크는, 신비와 괴기의 상징이었다.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데스마스크의 기괴한 표정은, 평생의 고뇌와 위대한 창작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인간만이 누리는, 안식과 평안이었음을.  단 한 번의 휴식으로 소나타 네 곡을 들려준 제르킨의 얼굴위로, 50년 전에 본 베토벤 데스마스크가 오버랩 된다.  아니, 가끔씩 카메라가 잡아주는 카네기홀 객석에서도, 닮은꼴이 여러 번 스쳐 지나갔다.

 

 

 

: 임철중 
전 대한치과의사협회 대의원총회의장 
 임철중 치과의원 원장 

전 대전고등법원 민사조정위원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