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밭 매는 아낙네야 배적삼이 흠뻑 젖는다./
무슨 설음 그리 많아 포기마다 눈물 심누나./
홀어머니 두고 시집가던 날 칠갑산 산마루에/
울어주던 산새소리만 어린 가슴 속을 태웠소./
짧은 노랫말이지만 한자어나 들온말(外來語)은 단 하나도 없고, 모두가 순수한 ‘겨레말’이다. 있다면 단 하나, 제목이기도 한 ‘칠갑산’인데, 사람이든 땅이든 작품 속의 홀이름씨(固有名詞)는, 낯선 이에게 호기심과 동경을, 익은 사람에게는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 한마디로 스토리텔링이 시작되는 것이다.
새마을 이전에 들어온 4H 운동(Head Heart Hands Health: 知德勞體 1902 미국)은, 비료의 중요성을 알리는 “중가리 가리 가리, 중가리 가리.”라는 노래를 가르쳤다.
“마음은 콩밭에 가 있다.”는 속담도 있지만, 비료의 3요소 질소 인산 카리 중에 유기체에 필수적인 질소성분은, 자연 상태에서 오로지 콩과식물만 합성이 가능하다(뿌리 혹 박테리아). 그래서 예로부터 논두렁에다가 콩은 심어도 콩밭은 드물었다.
따라서 ‘콩밭’이라하면 삼림을 불태워 비옥해진 땅에 한 해 농사만 짓고 떠나는 화전민(火田民)이 떠오른다. 낯 설은 산 이름에 유랑하는 화전민 아낙네로, 이미 드라마의 구도는 준비 끝이다. 김매는 일은 심는 ‘덧셈’과 달리 웃자란 콩 줄기를 솎아내고 주변 잡초를 뽑는 ‘뺄셈’의 밭일이다. 그러나 서러운 아낙네는 뙤약볕 아래 포기마다 땀과 범벅이 된 눈물을 심는다. 그 ‘반전의 덧셈’에서, 조운파는 시인 발레리의 말처럼, 영감에 의한 시 한 줄을 캐낸 것이다. 작가는 답답한 독자들을 위하여, 후련(聯)에서야 아낙네의 설운 속내를 슬쩍 드러내 보이고는 끝낸다.
더 길어지면 군더더기다. 이처럼 흙속에 묻힌 진주 같은 노랫말은, 얼핏 한 눈에 드러나지 않는다. 부여에서 대전 가는 길에 청양 칠갑산에서 본 풍경화를, 느릿한 타령조로 풀어낸 이 노래가(1978), 삼수(세 명의 가수) 끝에 10년 만에야 뜬 이유다.
인문학이 별건가? 살면서 맞닥뜨리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감성을 캐내는 일, 그것은 바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인문학의 시발점이 아닌가?
‘뽕따러 가세’에서 뛰어난 고음을 뽐내는 송가인의 칠갑산은 절창이다. 약간의 연료부족 현상을 빼면(몇 차례 호흡을 끊어간다.) 거의 무결점의 가창력으로, 지난 해 ‘미스 트롯’이후 신데렐라의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십여 편을 다운받아 놓고 즐겨듣는데, 걱정스러운 것은 지나친 성대(聲帶) 혹사다. 물들어올 때 노 젓는 일은 회사나 본인에게나 어쩔 수 없겠지만, 너무 다양한 레퍼토리와 벅찬 일정을 소화하다보면, 노래의 완성도나 가수의 수명에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다. 회사는 여세를 몰아 ‘미스터 트롯’을 띠우고 있는데, ‘유소년(幼少年)부’까지 달아오르는 것은, 비슷한 이유에서 반대한다. 일본의 4천여 고교야구팀 가운데, 단 49개 팀만 올라가는 고시엔대회는, 모든 선수·학부형·지도자의 꿈이다. 그러나 아무리 승리가 급해도, 투수 어깨나 팔꿈치에 부담을 주는 변화구는 금기라고 한다. 성인이 되면 얼마든지 익힐 수 있는 잔기술로, 선수 수명을 갉아먹지는 말자는 합의다.
아이들의 곡예에 가까운 꺾기나 특이한 발성, 이에 열광하는 어른들을 보면 어리둥절해진다. 서두름·쏠림·치우침·편 가르기의 숨 가쁜 민낯을 도처에서 보면서, 남도사투리로 “지둘러(기다려)!”를 외치던 김원기 전 의장(17대)이 새삼 그립다.
요즘 흔해빠진 ‘짝퉁 의장’들 말고, 유기체를 아우르는 질소비료 같은, ‘진짜 국회의장’ 말이다. 잃었던 겨레말과 함께, 민족 고유의 은근과 끈기도 되찾자.
글: 임철중
전 대한치과의사협회 대의원총회의장
임철중 치과의원 원장
전 대전고등법원 민사조정위원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