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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중 칼럼

말모이 운동 2 : 보기 글과 말밑 (用例·語源)

[임철중의 거꾸로 보는 세상] - <238>

 

   서재를 새로 꾸미면서 숙제 하나를 풀었다.  뿔뿔이 헤어진 사전 20여권을 동쪽으로 난 창(東窓) 선반 위에 한데 모았다.  거대자료의 바다라는 인터넷은, 때로는 진위(眞僞)가 아리송하고 더러는 깊이가 없다.  환갑이 다된 웹스터(1960년)를 버리고 온 건 속상하나, 랜덤하우스 영한대사전(2002년, 2719쪽)이 아쉬운 대로 위로가 되고, 어문각 우리말 큰 사전(1995년, 총 5496쪽)은 만져만 봐도 든든하다.  랜덤은 우리말에 비해 올림말도 많지만(등재 낱말 31만 대 16만), 그보다 15만의 보기 글(用例: Usage)이 뛰어난다.  한글 문학의 역사가 짧고 역사를 꿰뚫는 걸출한 문호(文豪)가 드문 까닭에, 보기 글의 보고(寶庫; thesaurus)를 장만하는 일은, 우리 문학의 정체성 세우기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영어의 쉐익스피어, 불어 위고, 독일 괴테, 이탈리아 단테, 스페인 세르반테스, 톨스토이가 각각 나라말 본세의 길잡이가 되고, 그것이 민족정신을 키워내지 않았는가.  들온말(외래어)을 털어내고 우리고유 낱말만 뽑은 겨레말 갈래 큰 사전(1993년, 박용수·서울대)도 귀중한 참고자료다.

 

   수강(受講) 도중 갑자기 통역을 맡은 것이 40대 때였는데, 별다른 공부나 유학 경력도 없이 모자란 대로 버텨낸 것이 지금도 신기하다.  통역이 막힌 곳을 뚫어주면서, 필자가 ‘길거리 스카웃’으로 끌려 나간 첫 단어는, Dr. Gollaher 강의 중 ‘kinky’였다.  도착적(性倒錯)이라는 속어로, 교정환자에게 고무줄을 몇 개씩 걸게 하는 것을 가학성 도착증의 ‘묶기(bondage)’에 비유한 조크였다.  USC 도허티를 일본어로 통역하던 일본 2세 다나카 교수는 ‘gadget(작고 신기한 장치)’에 막혔는데, 이제는 만화영화 형사 가젯트로 너무나 잘 알려진 단어다.  Dr. Roth는 성경이나 속담을 자유자재로 인용했는데, 연속 발치술식을 “Rob Peter to pay Paul.”이라고 강의하자 통역이 얼어붙었다.  “베드로의 것을 훔쳐(뺏어) 바오로의 빚을 갚는다.”했으니, “윗돌 빼서 아랫돌 고인다.”하면 되는 것을...
 
   훈민정음의 정음은 ‘바른 소리’라는 뜻이므로, 처음에는 중국에서조차 지극히 혼란을 겪던 한자 발음을 바로잡으려던 것이라는 설은 다음 기회에 다루자.  다만 현대화라는 미명하에 간체자(簡體字: 1952)를 급히 만들었고, 다시 병음(倂音: 1958)을 급조하여 발음 미비를 보충한 것은 사실이다.  한자와 우리말이 크게 다른 점은 상형문자 한자는 씨(詞)가 없어 명사가 동사로도 형용사로도 두루 쓰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문의 문법적 관계를 나타내려면,  토씨와 ‘하야 하니 고로 이면 이니라.’ 등 구결(口訣)이라는 이름의 끝말을 붙여야한다.  사실상 시제도 없고 태(態)도 단순하다.  뒤집어보면 문법이 원시적인 중국어로는 다양한 표현에 한계가 있어, 한 문장을 두고 여러 해석이 충돌할 수도 있다.  이를 보완하려고 고품격 대화에서는 옛 노래(古詩)나 역사적인 일화(逸話)에서 끌어낸 고사성어(故事成語)의 도움을 받는다.  문제는 고사성어는 세계어 공통인 말밑(語源)과는 달라서, 글자만 보고는 그 뜻을 전혀 짐작 못할 때가 많다는 점이다.  아전인수(我田引水)야 조금 생각하면 “아 항!”하지만, 남가일몽(南柯一夢)과 새옹지마(塞翁之馬)는 도대체 어떻게 푸나?
 보기 글도 아닌 말밑의 역사를 몽땅 외워야하나?  역사를 부정하는 중국공산당은 문화혁명 때 공자기념관을 부수고 75대 손은 탄광에 숨어 살았다고 한다.  이제 공자를 되살려 전 세계에 공자학원이 있지만, 충성사상 자체를 전제정권에 이용하려는 욕심뿐만 아니라, 공자(古典)가 없으면 중국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인가?
 통계에 따라서는 우리말 80%가 중국어라는 사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한다.  한자를 없앨 수는 없더라도, ‘고사성어 안 쓰기 운동’ 정도는 펼쳐야겠다.

 

 

 

: 임철중 
전 대한치과의사협회 대의원총회의장 
임철중 치과의원 원장 

전 대전고등법원 민사조정위원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