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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치과의사 인생 70점쯤은 주고 싶어"

'85년 임치과' 문 닫은 대전 임철중 원장

 

지난달 20일 저녁 대전컨벤션센터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KDA · CDC 국제학술대회 개막식에선 뜻밖의 세레모니가 참석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원로 회원의 은퇴식이었다. '아무리 그 지역에서 열리는 행사지만, 국제대회 개막식에서 회원 은퇴식까지 챙겨야 하나'라고 생각할 이들도 있겠지만, 당사자가 임철중 선생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임 치과는 바로 이 지역 개원 치과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는 선친께서 1933년 대전에 개업한 이래 대를 이어 85년을 시민들 곁에서 구강건강을 지켜왔다. 대전시치과의사회 회장과 치협 대의원총회 의장을 맡고서는 일이 있을 때마다 치과계의 방향타 역할을 톡톡히 해냈고, 대전충남치과의사신협 이사장이 되고서는 지역 치과의사들의 복지를 위해 특유의 열정으로 기초를 다졌다. 뿐만이 아니다. 여러 매체를 통해 그가 그동안 치과계에 뿌려놓은 글들은 이젠 그 수조차 세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이 촌철살인의 칼럼들을 통해 동료 선후배들은 치과계와 그 속 사람들을 이해하게 됐고, 세상 이치라는 걸 다시금 깨닫게도 됐다.  
이날 대회장인 조수영 대전지부장은 임 선생을 단상에서 맞아 기념선물을 전달하고 따뜻하게 포옹했다. 김철수 협회장도 치과계를 위한 그의 끝없는 열정과 헌신에 더 없는 찬사를 보냈다. 답사에 나선 임 선생은 "힘이 남아 있을 때 가지 않은 길을 가보기 위해 업을 접었을 뿐 앞으로도 일이 있을 때마다 이곳으로 즐거이 달려 오겠다"면서 "..그래서 안녕이란 말은 않겠다"고 말을 맺었다.    
다음은 선생과 이메일로 주고받은 일문일답이다.          

 

 

-은퇴를 결심하게 된 동기는?

“박수 칠 때 떠나라.”라면 너무 평범한 클리셰인가?  사실은 30대에 ‘평범과 비범’이라는 제목으로, 모두가 남보다 뛰어나려는 세상에서, 평범하게 살겠다는 인생목표가 더 비범할 수도 있다는 글을 쓴 적도 있지만...  아직은 힘이 남아있을 때 안 해본 것, 못 해본 것을 해보고 싶었다.  거창하게 프로스트를 빌리면, ‘가지 않은 길’인 셈이다.  미국에서 사시는 형님이 65세(1999)에 정형외과 개업을 칼같이 접고 세계일주 여행을 떠나셨고, 심장이 불편하시던 선친이 75세에 치과를 그만두신 것도, 결심을 굳히는데 촉매제가 되었다.

 

-치과의사로서의 인생에 점수를 매긴다면?

구렁이 제 몸 추기나 셀프-디스는 둘 다 아니고, 객관적인 기록으로 말해본다.  치과대학을 무난히 졸업하여 선망 받는 교정과 수련을 마치고, 5년의 충남의대 교수직 끝에 개업, 경제적으로 중간은 지켰다.   협회 지부장을 거쳐 중앙 대의원총회 의장을 지내고, 대전·충남 치과의사 신용협동조합을 창립했으며, 교정학회 부회장과 의국동문회 회장 때에는 동문 다섯 분과 함께 3년 간 도허티 선생의 USC코스 참가, 로스/ 윌리암스를 초청하여 3년 반을 통역과 운영을 맡았고, 그 맥은 지금도 살아있다.  해온 일마다 아쉬움은 남지만, 그래도 노력한 공을 봐서라도 한 70점은 받지 않을까?

 

-임치과 건물과 '임철중치과'라고 쓴 현판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나?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4년제)를 4회로 졸업하고 광화문 덕미치과에서 6개월 수련을 마치신 선친이 대전에 조선인 처음으로 개업하신 것이 1933년 10월이었다.  커다란 오석(烏石)에 새긴 비석이 남아있다.  1984년 승계하면서 50여년의 역사를 의식하며 본인의 이름을 넣었다.     
본과 3학년 때 제일 큰 연례축제인 ‘저경제’ 행사 협찬을 위해 고 이유경 치과를 찾았을 때, 단란하게 진료하던 세 부자의 모습이 뇌리에 깊이 박혀있다.

 

-임상에 남은 아쉬움이 있다면?
괴롭고 불편하여 찾아주신 환자분들께, 전력투구에 등한했던 점이다.  회무 외에도 고등법원 조정위원 22년, 예술의전당 후원회장 10년 여,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비롯한 각종 사회단체의 일에 치어, 가장 중요한 본업에 충분한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회무에 봉사하시는 후배들에게도, 상근직이 아닌 이상, 회무와 본업을 칼같이 구분하여 확실히 진력(盡力) 하시기를 권한다.

 

-치과계에 남은 아쉬움이 있다면?
미래가 불안하고 분노가 충만한 시대에, 젊은이들이 안정만 추구하는 세태가 걱정스럽다.  창작은 팽개치고 비판에만 골몰하는 모습도 없지 않다.  힘겨운 회무수행을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을까 부터 먼저 생각하자.   회무중단 같은 100% 회복이 불가능한 자해행위는 사전에 대화로 미리 막자.

 

-칼럼리스트로선 이제 어떤 글을 쓰고 싶으신가?
편견을 줄이고 균형 잡힌 사고를 위해서는 또 다른 편견으로 부딪혀 보는 것도 한 방법이라는 생각으로 칼럼을 써왔다.  변증법의 정반합도 그러하고 원자핵을 중성자로 때리는 것도 비슷한 맥락 아닌가?  앞으로 치과계라는 물 밖에서 역사 상 가장 오래되고 보편적인 질문, “왜 사는가?”에 매달려보려 한다.  역시 목표달성에는 실패할지 몰라도 그 길을 걷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고 싶다.

 

-치과를 떠나 이제 뭘 하실 건가?
치과의학 특히 교정에 관한 장비나 자료 책들은 거의 다 처분했다.  후배에게 주거나 버렸다.  평생을 함께 한 친구 이성복 선생과 그 많은 코스를 거친 자료를 정리하여 텍스트북을 만들어보자던 꿈도 버렸다.  아니 절반은 성공이다.  닥터 리는 책을 썼으니까.  답변은 중복될 수밖에 없지만 하고 싶던 일, 읽고 쓰고 음악을 들으며 생각하는 일로도 벅찰 것 같다.   칼럼쓰기는 건강을 위한 ‘규칙적인 생활’의 샘플로 이어가려 한다.

 

-더 일해야 할 후배들에게 한 말씀
자의로 선택했든 ‘안정된 삶의 추구’라는 흐름에 실려 왔던 간에,  일단 치과계에 발을 들인 이상, 천직에 최선을 다하자.   정성을 다하는 진료든 회무참여든 세미나 참석이든 결국은 국민, 치과환자들을 위한 봉사니까.  봉사는 정직하다.  정신적인 보람이든 물질적 보상이든 열매로, 아니 열 배로 보답한다.  그래서 전역(轉役)할 때가 오면, 몸과 마음 다함께 훌훌 털고, 건강하게 웃자.

 

 

임철중 선생은 '덴틴'에도 '임철중의 거꾸로 보는 세상'이란 제목으로 6년째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