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는 날 아내와 걷다가 제목도 안 보고 들어가 본 영화가 ‘메이즈 러너’였다.
왜들 무작정 뛰는지 감정이입도 안 되고, 불이 켜져 나가라는데 끝났는지도 모를 만큼, 불친절한 스토리였다. 얼마 전 3편을 보고야 대충 흐름을 알았는데, 실은 제임스 데시너의 동명 소설 시리즈를 영화화한 것이란다. 태양활동으로 파괴된 미래(Virus 감염되면 좀비로 변함)의 디스토피아를 무대로 한 SF로서, 동물처럼 주어진 운명에 안주하느냐 도전하느냐(미로 탈출)의 선택(자유)을 제시하는데, 도전자는 가공할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책임)는 설정이다. 자유 민주시민으로 성숙하는 일종의 성장소설을, 부담 없이 즐기는 공상과학물로 교묘하게 위장(?)하고 있다. 바로 이런 점이야말로 자유세계(미국) 대중문화의 저력이며, 제목을 심리학 연구용인 미로학습(Maze Learning)에서 빌려온 재치가 돋보인다. Runner와 Learner... 미로학습의 최고 학습수준을 넘어, 진일보한 미로설계까지 가능한 유일한 동물이 인간이다. 단순한 시행착오(trial & error)의 동물적 기억을 넘어, 잘못(error)을 반성 할 줄 아는 대뇌를 장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뇌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타인의 잘못에서도 배운다.
그리고 이 놀라운 경비절감 효과를 극대화한 장치가 교육이다. 그래서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 똑 같은 잘못을 물색없이 반복하면, 그는 이미 동물의 경지에 오른(?) ‘내로남불’ 인간이다. ‘반성하는 동물’로서 가장 큰 무기를 포기한 인간이다.
열독률이 높은 선진국 신문사의 부고란(Obituary) 담당기자는, 여유 있을 때 유명인사(Celebrity)의 부음을 미리 써놓는다고 한다. 죽음에는 예고가 없으니 마감시간에 쫓겨 기사가 부실해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일생을 객관적으로 되돌아보는 경험이 축적되면, 인간과 사회를 읽는 기자의 안목도 부쩍 성숙할 것이다.
다이너마이트와 무연화약을 발명하고 사업가로 성공한 알프레드 노벨은, 우연히 자신의 부고기사를 읽는다. 형의 죽음을 오인한 기자는 ‘죽음의 상인 노벨 사망’이라는 제목을 뽑았다(1888). 노벨은 큰 결심을 한다. 전 재산을 들여 인류에 공헌한 인물을 포상하는 노벨(상) 재단을 만들었다. 몇 줄의 부고기사를 읽은 그의 심경을 ‘반성’이라는 추상명사 하나로 설명하기에는 턱도 없다. 그 기사는 본시 평화주의자로서, 자신의 발명이 전쟁과 죽음의 도구로 쓰이는 현실에 마음 아팠던 노벨에게, 인류의 행복과 평화에 기여할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고은 시인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낀다. 만인보는 장장 25년간 4001 편의 시(?)에 무려 5,600의 인물을(필자는 세어보지 않았음) 조명한, 일종의 인명백과사전이다. 그 장대한 역정에서 자성(自省)의 사간을 가질 여유가 왜 없었을까?
이제부터는 고은 시인을 꼭 찍어하는 얘기가 아니라 일반론이다. 불꽃같은 영감을 잃은 천재의 장수(長壽)는 비극이라는 말이 있다. 과거의 명성에 기대어, 여기(餘技)로 연명한다. 조선조 큰 선비의 문인 화(사군자)처럼, 또 만인보를 대 서사시라고 우기는 것처럼... 그 숫한 인생을 들여다보면서 자기반성의 귀한 성취를 얻지 못한 이유는, 그 여정이 젊은 시절의 영광이라는 자아도취(Narcism)에 취하여 깨어나지 못한 ‘음주운전’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은 누구나 신이 설계해놓은 끝 모를 미로를 열심히 뛰는 Maze Runner다. 성장하고 절정에 올라섰다가 내려온다(Grow – Peak – Decline). 이념에 물든 집단일수록 상위서열을 맹종하고 추켜세우는 속성이 있어, 비우고 내려놓는 겸손의 학습을 방해한다. “내려올 때 보았네.”의 그 꽃을 못 보게 막는 것이다. “나 아직 안 죽었어!”의 오기는 때로는 추태다.
살아가면서 자랑을 비우고 그 빈자리에 지혜를 담는 Maze Learner가 되어야지.
* 참여나 저항에 문학성을 인정하느냐 하는 것은 별도 토론을 요한다. 허나 특정 사상이나 이념에 봉사하는 프로파간다를 문학이라고 우기는 것에는 반대한다.
글: 임철중
전 대한치과의사협회 대의원총회의장
임철중 치과의원 원장
대전고등법원 민사조정위원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