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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간들 도대체 그 무엇이 맘에 들랴

[詩가 있는 풍경 28] 양성우 시인의 '오종우네 칫과병원에서 듣는 라디오는'


서글퍼라. 이 시절에
어디 간들 도대체 그 무엇이
맘에 들랴.
정말이지 오종우네 칫과병원에서
듣는 라디오는
웬일일까? 우당탕퉁탕
혼자서만 떠들어대고
정말이지 얼씨구 절씨구
혼자서만 떠들어대고,
지난날의 어렵고 큰 싸움에
모조리 부서져 나간
내 불쌍한 입속을 들여다보며
젊은 친구 오종우도
이 집의 예쁜 간호부들도
참으로 몹시들 우울하구나.
라디오야 라디오야.
우리들 문들 닫고 증오를 깨무는
동지섣달 한겨울에
혼자 웃는 라디오야.


[증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양성우 시인의 이름을 얼마전 신문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회고록 '지금 나에게도 시간을 뛰어넘는 것들이 있다'를 출간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는 이 책에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1959년 봄부터 정계에 진출한 1988년까지 젊은 시절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냈답니다.
시인의 '겨울공화국'은 한때 김지하의 '오적'과 함께 저항시의 상징처럼 읽혔습니다.
광주중앙여고 교사로 일하던 1975년 이 시를 낭송했다고 파면당하고, 77년엔 장편시 노예수첩을 일본 문예지에 발표했다는 이유로 옥살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시인이 '오종우네 칫과'를 찾은 것은 이 2년 남짖의 옥살이를 끝낸 직후가 아닐까 싶습니다.
'지난날의 어렵고 큰 싸움에서 모조리 부서져 나간 불쌍한 내 입속'을 들여다 보는 친구도,
증오를 삼키고 하릴없이 유니트체어에 발을 뻗고 누은 자신도, 모두가 우울한 칫과에서
저 혼자 신이 나 떠들어대는 라디오가 시인에겐 얼마나 낯선 객체처럼 여겨졌을까요?
이후 '서울의 봄'을 맞아 그는 문학단체 운동에 나섰고, 평민당 소속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작년 1월 재심을 통해 '지난날의 감옥살이가 억울했다'는 취지의 무죄판결을 이끌어 냈습니다.
시인은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좋아 했다는군요.
아래는 그의 네번째 시집 '북치는 앉은뱅이'에 '오종우네 칫과..'와 함께 들어 있는 '春分詩' 전문.


이제 비로소 돌아가게 하라.
바람을 만나면 바람으로 맞서고
큰물을 만나만 큰물로
맞서리라.
보이느냐? 타고 남은 가슴의 재
허공에 뿌리니,
아물지 않은 상처 위에
또 다시 칼을 꽂고
춘삼월 꽃 피는 길을
손뼉 치며 가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