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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내가 울고 있을 것이다'

[詩가 있는 풍경 26] 최하림 시인의 '除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걸어온 길을 돌아보니
수만 가지 기억에서 떠오르는 노염이 나를 태운다.

지리산이나 동해바다 가운데서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외치고 싶으나

산으로도 바다로도 길들은 열려 있지 않고
길들은 아스팔트로서 길들여져 버린다.

나는 이제 주어진 길 주어진 도구
너를 위하여 웃고 우는 도구

그러나 나의 웃음은 눈물의 웃음
큰길과 골목을 두루 칠하는 눈물의 울음

타오르는 촛불을 바라보며
어느 東西로도 南北으로도 가지 못하는

나는 어찌 타올라야 하는가
촛불이여 촛불이여



[후회]

나는 어찌 타올라야 하는가.
늘 내 안에서 묻는 물음이지만,
역설적이게도 난 한번도 타올라 본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타올라야 하는지에 치중하다
時宜(시의)를 놓쳐 번번이 타오를 기회마저
날려버린 때문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저 타오르는 촛불을 보면
눈물이 납니다. 어떻게 같은 모양으로 같은 밝기로
필요할 때마다 스스로를 태울 수 있는지
그 천연덕스러움이 무섭기까지 합니다.

나는 어찌 타올라야 하는가.
수십번을 되풀이 해온 물음이지만
난 아직 답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타올라야 한다면 흉내야 내겠지만
내 속의 나를 태운 적은 여직 한번도 없습니다.
그런 나는 불행한 걸까요?
섣달그믐,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발을 떼지 못한
저린 후회를 내려놓습니다.
나는 진정 어찌 타올라야 합니까.


최하림 시인은 1964년 '빈약한 올훼의 초상'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습니다.
대학 강단에 서기도 하고, 지방신문사 논설위원으로 일하기도 하면서 시작에 정진, '우리들을 위하여' '작은 마을에서', '굴참나무 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등 모두 아홉권의 시집을 냈습니다.
소개드린 '제야'는 1976년에 발간한 시인의 첫 시집 '우리들을 위하여'에 실린 작품입니다.
이 시 역시 그의 대부분의 시에서 처럼 '결연한 의지를 품고 미지의 진정한 삶을 찾아 길을 걷는 나그네'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 싯속 나그네 처럼 살다가 시인은 71세가 되던 2010년 4월 지병으로 타계했습니다.
아래는 1991년에 펴낸 시인의 네번째 시집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에 수록된 '가을, 그리고 겨울' 전문.


깊은
가을길로 걸어갔다
피아노 소리 뒤엉킨
예술학교 교정에는
희미한 빛이 남아 있고
언덕과 집들
어둠에 덮여
이상하게 안개비 뿌렸다
모든 것이 희미하고 아름다웠다
달리는 시간도 열렸다 닫히는 유리창도
무성하게 돋아난 마른 잡초들은
마을과 더불어 있고
시간을 통과해온 얼굴들은 투명하고
나무 아래 별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저마다의 슬픔으로
사물이 빛을 발하고 이별이 드넓어지고
細石에 눈이 내렸다
살아 있으므로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시간들이 가서 마을과 언덕에 눈이 쌓이고
생각들이 무거워지고
나무들이 축복처럼 서 있을 것이다
소중한 것들은 언제나 저렇듯 무겁게
내린다고, 어느 날 말할 때가 올 것이다
눈이 떨면서 내릴 것이다
등불이 눈을 비출 것이다
등불이 사랑을 비출 것이다
내가 울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