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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유리창에 흔들리는 먼지 낀 풍경 같은...

[시가 있는 풍경 5] 이성복 시인의 ‘다시 봄이 왔다’


다시 봄이 왔다


비탈진 공터 언덕 위 푸른 풀이 덮이고 그 아래 웅덩이 옆 미루나무 세 그루 갈라진 밑둥에도 푸른 싹이 돋았다 때로 늙은 나무도 젊고 싶은가 보다

기다리던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가 누구의 목을 껴안 듯이 비틀었는가 나도 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때로 우리는 묻는다 우리의 굽은 등에 푸른 싹이 돋을까 묻고 또 묻지만 비계처럼 씹히는 달착지근한 혀, 항시 우리들 삶은 낡은 유리창에 흔들리는 먼지 낀 풍경 같은 것이었다

흔들리며 보채며 얼핏 잠들기도 하고 그 잠에서 깨일 땐 솟아오르고 싶었다 세차장 고무 호스의 길길이 날뛰는 물줄기처럼 갈기갈기 찢어지며 아우성치며 울고 불고 머리칼 쥐어뜯고 뭄부림치면서……

그런 일은 없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풀잎 아래 엎드려 숨 죽이면 가슴엔 윤기나는 石炭層이 깊었다

 


風景

이성복 시인은 1952년 경북 상주에서 출생했다.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했고 1977년 '정든 유곽에서'로 계간 '문학과 지성'을 통해 등단했다. 1980년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를 냈고, 이 작품집으로 제 2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나른한 봄 풍경을 거칠게 그려낸 '다시 봄이 왔다'는 선생의 두번째 시집 '남해 금산'에 들어있다.

선생의 것이 아닌 설익은 봄 풍경 하나 더...


몇 조각의 봄볕이 나무들 사이를 뚫고 내려와 앉았다. 가끔씩 비둘기며 아이들이 그 빛을 하얗게 뒤집어 쓴 채 빠르게 지나가곤 했다. 점심을 먹었는지 먹지 않았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럴 때가 가장 기분 나쁘다. 너무 나른하고 몽롱해서 금방 가라앉을 것만 같다. 어떤 땐 창밖에서 꿈을 꾼다. 그 꿈들은 나를 그 뜰로 데려가 나무와 잔디와 나지막한 꽃들에 느린 눈길을 주게 만든다. 모두가 녹색이다, 질식할 것 같은…. 전화를 받았다. 길고 긴 전선 저쪽에서 뭐라고 자꾸만 말들을 쏟아 붓는다. 말들은 내 귓전에 부딪쳐 후두둑 활자로 떨어진다. 그것들을 주워 깨끗이 닦아선 주머니에 넣었다. 그런 일들이 다 미로 같다.

환자가 왔다. 창에서 눈을 떼고 내 봄도 잠시 잊는다. 할 일이 있을 땐 할 일을 해야 한다. 50대 남자다. 조금 살이 쪘고, 손은 거칠지 않았다. 체어에 누운 그가 입을 크게 벌린다. 쓴 담배냄새가 훅하고 지나간다. 아마 잠시 얼굴을 찌푸렸을지도 모른다. 충치에 잇몸이 많이 부어 있었다. 내 손놀림에 따라 남자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펴지길 반복한다. 주먹을 꼭 쥐기도 하고 작달막한 다리 끝까지 빳빳하도록 힘을 넣기도 한다. ‘웬 엄살은….’ 치료를 끝내고 손을 닦는 나에게 남자가 꾸벅 인사를 한다. ‘좀 아프긴 했지만 괜찮습니다.’ 이 남자도 봄을 타나보다. 난 웃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