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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원가

'아픈 치아를 뽑아만 줘도 그들은 행복해했다'

교황도 감동한 강대건 원장의 34년 봉사인생

강대건 원장은 매주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대구로 익산으로 한센인들을 찾아 다녔다. 한 달에 딱 한주만 쉬었다. 쉬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라는 딸들에게 너무 미안해서…. 대구 근처 칠곡엘 다닐 땐 아침 7시에 나서서 기차를 세 시간을 타고 택시로 다시 30분을 들어갔다. 서너 시간 진료를 하고 곧바로 되짚어 나와도 집에 들어서면 저녁 7시가 됐다.

그 일을 10년쯤 하고 나자 이번엔 익산에서 그를 불렀다. 익산엘 가기 위해선 용산에서 기차를 타고 또 서너 시간을 달려야 했다. 이곳에서도 10년을 채웠다. 그리곤 다른 곳에서 와 달라고 부르면 또 그곳으로 달려갔다. 포천에서 처음 시작한 봉사가 안양 성나자로마을을 거쳐 대구, 익산 등 전국 9군데 한센인 마을을 돌며 34년간이나 이어지게 된 연유이다.

처음엔 발치만 했다. 아픈 치아를 뽑아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행복해 했다. ‘아 이 일이 내 일이로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은 것도 이때였다. 썩어서 뿌리만 남은 이빨을 참 많이도 뽑았다. 그러고 나니 이번엔 보철이 필요했다. 아픈 건 면 했어도 잘 씹지 못하는 이들이 늘어나 하나 둘 눈에 밟히기 시작한 것이다. 

 

 

‘나라고 한센병이 두렵지 않았겠나’

 

강 원장은 무료보철로 일을 키웠다. 본을 뜨서 치과로 갖고 와 밤늦게까지 직접 기공물을 만들었다. 비용을 아끼기 위해선 그 방법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위에서 자꾸 비용을 받을 것을 권했다. 장기봉사를 위해서도, 환자를 위해서도 그게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강 원장은 시중 보철수가의 10분지 일에서 3분지 일 정도의 비용만 받고 메탈 크라운브릿지와 포세린 크라운브릿지 그리고 풀 덴쳐와 파샬 덴쳐을 장착하기 시작했다.

일요일이면 그가 가는 곳엔 늘 환자들이 넘쳤다. 대부분 천주교도인 한센인들 진료가 끝나면 주위의 개신교 신자들이 몰려오고, 마지막엔 가난한 동네 주민들까지 치료를 부탁했다. 하지만 강 원장은 한센인이 아니면 응급환자 이외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그 자체가 불법인데다 지역 치과계와 마찰을 빗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안양 나자로마을에 치과진료실을 마련하고 처음 보철을 시작했을 때만해도 전국에서 한센인들이 몰려왔다. 아파도 갈 곳이 없던 이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 든 것이다. 강 원장은 그들에게서 받은 돈은 그나마 비용을 제하고는 필요한 곳에 다시 기부했다.

그라고 왜 한센병이 두렵지 않았을까. 태연한 척을 하긴 했지만 그들의 입 안에서 썩은 치아를 뽑아내는 자체가 공포일 때도 있었다. 백짓장처럼 하얘진 강 원장의 얼굴을 보고 옆에서 치료를 돕던 기공사가 ‘괜찮냐’고 물어온 적도 몇 번 있었다.

보람? 그런 게 없다면 어떻게 34년을 일요일마다 전국을 돌 수 있었겠느냐고 그가 되물었다. 익산의 어느 공소에서 진료할 땐데, 좀처럼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던 그가 한번은 버스 정류장을 지나쳐 한참을 늦게 도착한 적이 있었다.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속으로 ‘몇 명이나 기다릴까’ 했는데 웬걸, 마을 어귀에 수십 명이 모여 그를 향해 손을 흔들더라는 거였다.

“나를 향해 뛰어오는 그들을 보면서 아 내가 정말 좋은 선택을 했구나, 이들이 정말 나를 필요로 하는구나, 이들이 내 친구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때는 정말 그랬다’고 강 원장은 말했다.

 

 

교회와 교황을 위한 십자가 훈장

 

작년 고창을 마지막으로 그는 한센인 진료를 중단했다. 이제는 더 젊은 사람이 맡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곳곳에서 난리가 났다. ‘감사패라도 전달하겠다’는 자리까지 마다하자 그들은 신문기자를 대동하고 서대문 영천시장 입구, 이젠 주인처럼 허름해진 강대건치과로 들이닥쳤다.

그의 34년 한센인 진료봉사는 이렇게 세상에 알려졌다. 2011년 대구의 엠마 플라이징거 원장이 그를 호암상 후보로 추천했을 때도 그는 이 일을 세상에 알릴 용기가 없었다. 어차피 환자들이 알아서 치과에 좋을 게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봉사 인생은 결국 교회와 교황을 감동시켰다. 그는 지난 11일 염수정 대주교로부터 교황이 수여하는 ‘교회와 교황을 위한 십자가 훈장’을 받았다. 명동성당 주교관 소성당에서 열린 수여식에는 강대건 원장의 가족과 지인 등 30여 명이 참석해 그의 수훈을 축하했다.   

강 원장은 병원도 열심히 했지만, 자식들 공부시키다 보니 남은 재산이라곤 아파트 하나가 전부라고 했다. ‘치과의사들이 많이 버는 듯해도 사는 데 모자라지 않을 정도지 뭘 모을 수준은 못 되지 않느냐’고 그가 되물었다.

평생을 길 위를 달린 그 다운 이재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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