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06 (일)

  • 구름많음동두천 22.4℃
  • 구름많음강릉 23.7℃
  • 맑음서울 24.0℃
  • 구름많음대전 24.7℃
  • 구름많음대구 23.5℃
  • 구름조금울산 24.7℃
  • 구름많음광주 25.8℃
  • 구름조금부산 27.9℃
  • 구름조금고창 26.8℃
  • 구름조금제주 27.7℃
  • 구름조금강화 23.1℃
  • 구름많음보은 23.4℃
  • 구름많음금산 24.8℃
  • 구름많음강진군 25.9℃
  • 구름많음경주시 24.7℃
  • 맑음거제 25.1℃
기상청 제공

신아연 칼럼

피시 오브 더 데이 (fish of the day)

[신아연의 공감]- ⑦

‘fish of the day’
우리 식당 입구에 놓아 둔 어항 속 물고기를 짓궂게도 우리는 이렇게 부릅니다. 메뉴 가운데 생선 요리는 활어를 그 자리에서 잡아 손님 상에 올린다는 의미로 ‘fish of the day (오늘의 생선)’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손가락 한 마디 크기도 못 되는 그 녀석이 정말로 어느 날 ‘fish of the day’ 로 식탁에 오를 리는 없고 장난 삼아 어항 앞에 그렇게 써 놓았더니 아닌 게 아니라 무심코 오가는 손님들도 실소를 금치 못합니다.

특별히 ‘키운다’고 할 것도 없이 그저 물이나 갈아주면서 ‘ 어이, fish of the day.’ 하고 한마디씩 놀리기나 한 것이 벌써 4개월쨉니다. 어항 물을 바꿔 주던 매니저가 고개를 살레살레 흔들며 “never die! (절대 안 죽네!)” 하던 때가 두 달도 더 전이니 우리는 이미 그때부터 녀석의 생명력을 신통하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예쁘고 앙증맞아서, 나중에는 습관적으로 한 번씩 들여다 보면서도 며칠이나 더 살려나 했던, 살면 살고 죽어도 그만이라 생각했던 것이 4개월이 넘고 보니 꿋꿋이 살아 가는 그 미물에 전과는 다른 눈길을 주게 됩니다.

어차피 가게 치장을 위한 것이라 죽으면 또 다른 고기를 사 넣을 요량으로 제깟 것 목숨보다 오히려 어항이 깨질까 보아 염려하던 것이 이제는 ‘그 물고기’가 아니면 안 될 것 같고 , 특정한 ‘그 생명체’에 마음이 기울게 된 것입니다.

국 대접 두 개를 포개 놓은 정도의 크기에 알록달록한 자갈 몇 개와 이끼 낀 플라스틱 수초 한 그루가 고작인 공간이 지루할 법도 하건만 작은 물고기는 지칠 줄 모르고 헤엄칩니다. 움직이면 살고 멈추면 죽기라도 할 듯 필사적 몸짓으로 한시도 쉬지 않고 몸을 놀리는 모습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활발해서 꼭 영화 <쉬리>에 나오는 칩을 넣은 물고기를 연상케 합니다. 정말이지 경탄해 마지않을 생명력입니다.

일평생 곁에 둘 친구 하나 없는 실존적 절대 고독의 공간에 놓인 자신의 운명 따위에는 아랑곳없이 그저 ‘지금 이 순간’을 사는 데 집중하는 작은 물고기에 마음을 주기 시작한 이후, 이따금 그 하찮은 생명에 생각이 매여 조바심이 이는 생경스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처럼 그 물고기가 죽으면 제 자신을 포함한 주변의 생명 가진 것들의 에너지와 탄력도 함께 사그라질 것 같고, 어쩌면 잘 되던 장사가 기울어 버릴 것 같은 마술적 사고도 이따금 떠올라 가게에 들어서면 곧장 그 녀석부터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느낌의 총체는 밋밋하고 평범한 일상 속에 ‘숨은 그림’처럼 내재하는 생명의 본질과 존재의 근원에 대한 신비와 경이의 조각을 찾아 내는 체험에 닿아 있습니다.

물질 세계의 배후, 어둠을 몰아내는 빛, 악을 따돌리는 선한 의지, 모방이 아닌 참된 것, 부정을 이기는 긍정의 힘등 이른바 엔트로피 법칙을 거스르는 일체의 창조적 에너지 같은 것 말입니다.

우리 물고기의 순도 높은 생명 에너지와 닮은 것들로 껍질을 깨고 가까스로 세상에 나오는 병아리, 아스팔트 틈 사이로 비집고 올라와 기어이 자신의 꽃을 피워내는 한 포기 식물, 겨우내 죽은 듯 딱딱하고 마른 가지를 뚫고 나온 여리디 여린 새순, 사춘기의 질풍노도를 통과한 청년, 젊은이와 다름없이 미래를 계획하는 백세 노인, 환골탈태한 신앙적 회심자 등을 함께 떠올려 봅니다.

이제 우리 가게 사람들은 더이상 무심코라도 그 물고기를 ‘fish of the day’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오래된 농담에 식상해서이거나, 아니면 생각보다 훨씬 오랫동안 살고 있는 것한테 장난말이라도 밥상 위에 올릴 식재료라고 하기가 미안해서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미물 속에 내재하여 그 미물을 움직이는 생명의 근원적 손길 같은 걸 느낀 이후 그 녀석을 두고 잡아먹힐 존재라는 불경하고도 망측스런 생각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필자 신아연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1992년 호주로 이민, 호주 동아일보 기자, 호주 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을 거쳐 지금은 같은 신문의 편집위원이다.
시드니에서 프랑스 레스토랑 비스트로 메메 www.bistromeme.com 을 꾸리며 한민족 네트워크, 두란노 아버지학교, 부산일보 등 다양한 매체에 글을 쓰고 있다.
이민생활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글 쓰는 여자 밥 짖는 여자>,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을 냈다.

블로그 http://blog.naver.com/shinayoun


HOT Chart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