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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중 칼럼

안식 이야기 7 : 신성(神性) 다시 찾기

[임철중의 거꾸로 보는 세상] - <265>


   서서히 성숙하고 연한이 차면 스스로 퇴화하는 ‘두뇌’라 불리는 슈퍼컴퓨터.
 그것도 수십억 수백억이 다 다른 기종(機種)을 오직 단백질 하나만으로 조립해내는 전능한 ‘절대자(Supreme Being)의 존재’를 부인하기는 어렵다. 사람은 초기 컴퓨터라는 새하얀 천에 청실홍실 수를 놓으며 인생이라는 드라마를 엮는다. 절대자는 곧 ‘신’이요 어떤 수를 놓느냐 하는 것이 종교의 ‘가르침’이라면, 인간의 ‘영적상태’를 한 시점에 고정할 필요는 없으리라. 삶을 꿰뚫어 정성껏 수놓는 초심을 잃지 않았다면, 더러 만난 시행착오나 갈지 자 걸음은 용서를 받고, 마음이 탈진한 ‘치매’ 영혼도 당연히 구원받아야 한다. 일곱 번을 용서하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제 7일을 안식일이라 하니 안식 이야기를 여섯 꼭지로 잡았는데, 마무리가 늘어진 것은 필자 능력의 한계이리라. 고금동서 철인들이 평생 천착했던 엄중한 주제이니, 앞으로 더욱 매달릴 사색의 화두로 남겨둘 밖에...  풀리는 답이 아니라 원주율처럼 끝없이 풀어가야 할 인류 공동의 숙제이니까...  

 

   엎친 데에 코로나 팬데믹이 덮치니 갈데없는 말세다. 대 재앙이 닥치면 인류는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지난 세기 격동을 겪으며 인성은 거칠어지고 신성(神性)에 대한 신뢰도 동반 추락하였다. 기도하고 의지할 대상이 거짓말 같이 사라지니 인류사회는 더욱더 혼란에 빠진다. 사회를 타락시킨 배후와 주범은 무엇이며 누구일까?
 그것은 바로 ‘분노와 증오’ 그리고 ‘증오를 파는 상인들’의 합작품일 것이다.
 2011년 “월가를 점령하라(Occupy!)”의 예를 보자. 2000년 초반, IT 거품 붕괴와 9·11 테러와 아프간·이라크 전쟁 등의 악재로 경기가 얼어붙자, 부시 대통령은 저금리에 신용등급 낮은 주택에 대한 대출(Subprime Mortgage Loans)로 경기부양을 꾀한다. 신용 낮다고 금리가 높은 것은 구조적인 모순이라는 ‘IQ 80짜리 논리’를 닮았다. 허름한 주택도 꽃단장하면 비싼 값에 불티나게 팔리니, 저소득층도 대출을 받아 집 장사를 한다. 2004년 저금리가 끝나자 부동산 거품은 꺼지고, 대출금회수가 불가능한 투자금융 및 증권회사가 파산한다. 2008년 150년 역사의 리먼 브라더스 파산으로 금융위기는 글로벌화 하고, 금융계가 정부지원금으로 성과급 잔치를 벌인 사실이 보도되자, 살던 집마저 날려 더욱 가난해진 서민의 분노가 폭발한다. “점령하라!”의 슬로건은 “We are 99%!” 즉 1% 독식의 경제적 사회적 양극화에 대한 분노와 증오였다. 그러나 월가는 단지 시장일 뿐이지 점령과 지배의 대상은 아니요, 현란한 금융기법으로 싹쓸이한 억만장자의 주범을 특정하기는 어렵다. 방향을 잃어 속으로 들끓던 분노는, “저놈 탓이다!”라는 선동가에 훅 넘어간다. 반 지성주의 선동가요 남 탓의 궤변으로 정권을 잡는 트럼프 류의 상인이 세계 도처에 널렸다.   팬데믹은 ‘악당 전성시대’의 타락을 징벌로 경계하는 ‘신의 한 수’가 아닐까?

 

   인성 회복과 신성 복원은 닭과 달걀처럼 불가분의 관계다. 먼저 그 원인인 분노와 증오의 싹을 없애고 선동세력을 잠재워야 한다. 분노와 증오의 반대는 사랑과 믿음이다. “왜 죽는가?”는 곧 “왜 사는가?”의 문제요 아무도 정답을 주지 못했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는, 수많은 철학과 종교가 이구동성으로 ‘사랑과 믿음’을 가르친다. 한때 주례 전문가라는 직업이 있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날에...”로 시작하는 주례사는 전형적인 미사여구의 드립이요, 정치인의 “기회는 공정, 과정은 평등, 결과는 정의” 또한 주어나 동사보다 형용사만 가득한‘말잔치’였다. 이처럼 ‘사랑과 믿음’이라는 거룩한 말씀은 너무나 관념적 사변(思辨)적이어서, 배려와 봉사로 바꿔 보아도 느낌이 와 닿지 않는다. 반대로 대대로 이어온 우리의 조상숭상 종교에는 알기 쉽고 손에 잡히는 살가움이 있다. 아놀드 토인비의 예언처럼, 반만년을 이어온 ‘효 사상-경로사상’은, 사랑과 믿음을 실천하기에 최적화된 개념이다. 이제 와서 사대봉사의 제례를 되살리자는 것이 아니다.
 새 해가 밝으면 새 달력에 일가친척의 생일과 기일을 적은 다음, 생일에는 생존하신 어른들을 찾아뵙고, 기일에는 한데 모여 추억의 시간을 갖는 것으로 시작하자. 
 사라져가는 우리 것을 추스르고 키워내며 행하고 보여준다면, 언젠가는 그 결과가 인류를 되살려낼 ‘한류’의 심령 대부흥회로 꽃을 피우게 될지도 모른다.

 

 

 

글: 임철중 
전 대한치과의사협회 대의원총회의장 
 임철중 치과의원 원장 

전 대전고등법원 민사조정위원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