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전의 승패는 병참(Logistics)이 좌우한다.” 사막의 여우 롬멜의 명언이다. 근대 이전에는 농업생산성 1.5배가 넘으면 필승이었다. 전력이 약했던 유방은 승리의 공을 총사령관 한신보다 보급 담당 소하에게 돌렸다. 최근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독일군은 전상보다 아사나 병·동사자(餓死, 病·凍死 者)가 더 많았을 정도요, 생산·이동체계가 열악하고 인명에 무관심한 스탈린의 전체주의 공산국 소련은 두 배가 훨씬 넘는 것으로 본다. 좌경학자들은 이차대전 승리의 주역을 소련으로 포장한다. 소련국민 2,700만이 죽어, 독일·서방연합군 합친 것보다 많다는 것이다. 서부전선의 교착상태 해소, 특히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위하여, 처칠·루즈벨트가 스탈린에게 동부전선의 강력한 공세(Offensive)를 강청한 것은 맞는다. 그러나 넓은 영토의 농민 동원도 어렵고, 문맹이 집총 대오를 갖추기까지 훈련도 힘들며, 먹이고 무장시킬 능력이 없었다. 스탈린은 루즈벨트에게 간난 아기 젖 보채듯 군수물자를 요구한다. 양대 전선에서 바쁜 미국의 생산에 한계가 있고, 북해항로에서 험난한 파도와 날씨, 잠수함과 싸우며 월 50만 톤을 수송하는 악전고투는, 매클레인의 소설 ‘HMS
대영제국의 식민지 삼각무역은, 아프리카에서 잡아온 노예들이 서인도제도에서 사탕수수를 재배, 설탕은 인도 산 면화로 옷감을 짜는 아일랜드·웨일스인인 공장 노동자들에게 연료 주입하듯 먹이는 식의 흑 역사였다고 한다. 제품의 소비시장은 다시 식민지였으니, 상선은 항로마다 노다지요 산업혁명은 엄청난 부를 낳았으며, 이 사이클을 돌리는 두뇌·동력과 윤활유는 바로 거대자본이었다. 독일 경제학자 엥겔스는 아버지의 맨체스터 방적공장에서 일하면서, 권리도 없이 열악하게 사는 영국노동자의 삶을 목격하고, 이를 글로 발표한다(1845). 자신도 아버지에게 얹혀 살면서도 일생의 동지 마르크스를 먹여 살렸으니, 제 손으로 벌어먹지 못한 원조 ‘백수(白手) 운동권’이다. 부의 축적과 여유 즉 가치창출은 노동자의 공이며, 자본가는 이를 착취할 뿐이라는 것이 쉽게 푼 마르크스의 잉여가치론이라면, 이는 거대한 사이클은 보지 못하고 노동 현장만 살핀 피상적인 인식을 근거로, 하숙집에 틀어박혀 관념론적으로 상상한 ‘장님 코끼리 더듬기’식 결론이 아닐까? 처칠은 음흉한 스탈린의 영토야욕과 세계 공산화 의도를 간파하고 이를 막으려하지만, 평생 지병으로 탈진한 루즈벨트는 관심이 없었고,
문명의 기원을 조손(祖孫)관계에서 찾은 것은 재미있는 발상이다. 농경을 익혀 삶에 여유가 생긴 인간, 노동에서 풀려나 어린 손자 손녀를 돌보는 할머니, 틈틈이 조곤조곤 들려주는 흘러간 이야기들. 바로 교육과 역사의 시작인 스토리텔링이다. 중구난방의 얘기들이 정돈되면서 신화와 역사가 탄생한다. 제정(祭政)일치의 원시사회에서 신화는 무당에게 힘의 원천이었고, 공동체가 국가로 진화하면서 역사는 통치권을 뒷받침하는 무기가 된다. 역사상 개국(開國) 영웅은 반드시 탄생설화를 갖고 있다. 허황된 중국식 과장은 기본이요, 오웰은 소설 ‘1984’에서 좌파 국가의 ‘제2의 천성’이 ‘역사 위조’임을 예언하고, 전담부서 이름을 진실성(Ministry of Truth)이라고 비틀었다. 공개된 옛 소련 문서를 들추지 않아도, 명백한 김일성 남침을 북침이라고 우기는 새빨간 거짓말은, 그중 아주 작은 예에 불과하다. 작은 도시국가의 집단 그리스는 철학과 시민을 위한 경기장과 연극이 있는 원조 민주국가였다. 지중해 중계무역과 수많은 노예의 고통 위에 쌓은 여유 덕분이었다.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던 로마시대, 귀족들은 다투어 그리스 가정교사를 두었다. 지적 배고픔을 달래려는
핸드폰이 울린다. “광수냐? 그쪽 고속도로에 역주행하는 차가 있대. 뉴스에 떴으니, 운전 조심해.” “말도 마, 역주행이 한두 놈이 아니야, 수백 대가 넘어!” 이쯤 되면 누가 역주행하고 있는지 짐작할 게다. 날카로운 해학의 대명사 박광수씨의 만화다. 어느 독재자가 반대 목소리를 잡아넣다보니 경찰청장과 저만 남았다. 온 국민이 수감 중이라면, 정작 갇혀있는 죄수는 나 아닌가? 역사적으로 중국의 집권자들은, 저들 한족만이 빛날 화자 중화(漢族·中華)요 온 사방이 오랑캐(東夷·西戎·南蠻·北狄)라고 하였고, 그 선민의식은 스스로를 자폐증과 서구제국주의의 먹잇감으로 전락시켜, 청조의 몰락을 자초하였다. 사방천지가 오랑캐라면, “혹시 내가 바로 오랑캐?”라는 의문을 품어볼 수는 없었을까? 문제는 실용주의를 택한 덩샤오핑이 박정희식 개발모델을 좇아, GDP $5천에 세계2위의 강국으로 발돋움한 지금도, 자기중심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 점이다. 중화사상에 공리자영(共理資營: 공산주의 이념에 자본주의 경영)을 덧칠한 괴물은, 역사속의 온건한 절충사상(中體西用)과는 차원이 다르다. 중국 몽-대국굴기-일대일로 해가며 아무리 변성명 한들, 주변국들을 중국의 역참(驛站)이나 해
네 번째 작은 나라는 스위스·오스트리아 사이의 리히텐슈타인. 금년에 3백주년을 맞은 이 공국(Principality of Liechtenstein)은, 인구 38,000에 강화도 절반 크기지만, GDP는 세계 1위인 $17만. 금속가공과 우표판매가 주수입이라지만, 알짜배기는 조세피난처(Paper Company)다. 수집가의 성지답게 우표박물관이 뛰어난다. 1719년 신성로마제국 찰스 6세가 만들어, 4년 뒤 제국의회에 한 자리(一席) 준 것을 보면, 다분히 정치 냄새가 난다. 중세에서 근세까지 유럽의 마녀사냥·탄압·전쟁이 종교의 이름으로 벌어졌고, 전쟁원인이 황제와 교황의 세력다툼과 왕위계승이었음을 깨닫는다. 국방과 외교 통화는 스위스가 맡고, 독일어를 쓴다. 식당 Adler Vaduz의 중식(中食) 라지아니 요리는 그저 그렇다. 음식에 굳이 등수를 매긴다면 이탈리아-프랑스-스위스-스페인의 순서다. 스페인 음식은 소금밭이다. 귀국 행 공항소재지는 상업중심지 취리히. 리마트 강가에서 자유 시간 겨우 두 시간. 2000년 역사의 니더도르프 골목상가와 세 성당을 둘러보았다. 본시 수녀원이었다가 성당으로 다시 교회로 탈바꿈한 Frau-Muenster. 원본이
꽃의 도시 피렌체 아르노 강가에서 태어난 단테는(1265-1321), 청년 시절부터 베스트셀러 작가요 인본주의 세상을 꿈꾼 정치가였다. 아홉 살 때 만나 첫눈에 빠진 베아트리체는, 그의 ‘놀라운 환상’을 키우고 방대한 작품을 탄생시킨 일생의 뮤즈였다. 시정(市政)위원으로서 흑당·백당으로 맞서 싸우는 시정해결을 위하여 교황을 찾아간 동안, 프랑스 왕제가 피렌체를 침공하고 반대당이 집권하여 그를 추방한다. 19년 망명의 시작으로, 파리와 베로나를 거쳐 라벤나에 정착하지만(1317), 후원자 폴렌타 백작을 위한 외교여행 중 말라리아에 걸려 숨을 거둔다. 피렌체는 유럽의 인기스타인 그의 시신을 가져가려 하지만, 폴렌타는 이를 거절하고 장중한 영묘를 짓고 존경으로 모신다. 피렌체는 346년 뒤 교황까지 움직여 무덤을 열었지만, 라벤나의 수사(修士)들이 교묘하게 빼돌려 다시 안치시켰다. 그토록 그리던 고향이지만 벌금을 내고 사과하라는 귀국조건에 “정의를 외치다 고통 받은 사람이 어찌...”라며 자존심을 굽히지 않은 단테. 유해를 돌려주지 않으면 영묘의 유등(油燈)값이라도 지불하게 해달라는 피렌체의 요청에, 라벤나는 마지못해 매년 성금을 받는다고 한다. Via Dan
포르투갈 기사 호세가 투덜댄다. 안도라에서 곧장 가야하는데 갑자기 길이 막혀 스페인 쪽으로 한 시간을 되돌아, 딴 길로 프랑스 국경을 넘어야 한다. 그래도 금방 쏟아질듯 한 돌산과 끝없이 이어진 산봉우리(雪山峰)는 환상적이다. 까르까송을 지나니 아를(Arles)이다. 그리스 어촌으로 시작하여 론 강이 적셔주는 광대한 평야에서 쌀을 경작하고, 케자르 때부터 중개무역항으로 번성한 고도(古都). 토사가 쌓여 제1항구의 지위를 마르세유에 넘겼지만,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광으로 뭇 예술인들을 불러들인 곳. 여기서 대부분의 작품을 그린 고흐가 입원했던 병원이 남아있고, 노란색으로 치장한 카페 반 고흐는 여전히 성업 중이다. 일명 갈리아의 로마답게 BC 1세기의 원형경기장과 원형극장이 남아 있다. 며칠을 꼭 머물고 싶은 곳. 한 시간을 달리면 엑상프로방스. 중세도시의 자취가 남은 세잔의 고향에서, 그림으로 눈에 익은 생 빅투아르 산을 바라본다. 에밀 졸라의 친구(뒤에는 원수?)로서 피카소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 세잔의 아틀리에에서,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사과가 가득 담긴 보자기를 샀다. 지금은 필자의 거실 테이블의 품격을 높여주고 있다. 두 시간 거리에 영화제의 도시 칸.
중3때 처음 본 산마리노와 모나코 우표는, 그림이 투박하고 지질이 거친 우리 우표와 달리 화려한 총천연색 그라비어 인쇄였다. 동족상잔의 남침전쟁으로, 폐허 속에 헐벗은 흑백의 삶을 살아야 했던 때문일까? 팝송 노랫말처럼 그림 속에서, “머나먼 바다 건너 이상한 이름의 나라들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Faraway places with strange sounding names are calling, calling me).” 후배가 제안한 작지만 아름다운(美小) 유럽 네 나라 여행에 선뜻 동참한 이유다. 스페인 한복판 마드리드에서 성지순례길(Camino de Santiago)을 따라 북상한 다음, 빌바오에서 90도 우회전하여 안도라를 들려,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연안을 따라 일로 동쪽으로(아를-엑상프로방스-칸-생폴드방스-니스-모나코) 달린다. 이탈리아에 들어서면 친퀘테레에서 U 턴 하듯 산마리노-라벤나-베로나-코모-벨린쪼나를 끝으로 스위스 취리히에 도착한다. 버스 이동만 모두 39시간, 장장 3,230Km의 장거리 ‘Coach-tour’다. 첫 번째 멈춘 부르고스는 마드리드에서 북으로 245Km 떨어진 순례코스의 하나. 스페인 3대 성당 중 가장 큰, 고딕의
“도올 김용옥은 방대한 불경 중에 ‘부모은중경’을 한 시간 교재로 선택했고, 강의내용은 본문의 해설 외에 덜고 더함이 없었다.” 경기치원 지(齒苑 誌; 2003. 4)에 기고한 칼럼 I. O. U.의 한 대목으로, 이는 네 번째 칼럼집의 제목이기도 하다. 첨삭(添削)이 없다 함은 칭찬이 아니라, 서당훈장이 불러주는 한문해석 수준이라는 의미였다. 그 강의는 소위 동양철학의 권위자로서 도올에 대한 필자의 신뢰가 무너지고, 도덕경을 취미로 읽은 주부로부터 주류 학자들까지 왜 그를 폄하하는가를 깨닫는 계기였다. 한때 ‘노자와 21세기’ 세권을 사서 읽을 만큼 심취했고, 공자까지는 그냥 들을 만 했는데, 종교에 들어서자 ‘수박 겉핥기’의 바닥이 드러난 것이다. 팩트를 벗어날 수 없는 이과 분야는 지식의 전달에 쫓겨, 열강은 몰라도 명강·졸강이 없다. 문과 강의를 우직한 이과교수에 맡기면, 60분 강의가 5분에 끝난다. 이 50여분 공백이 바로 도올의 렉튜테인먼트(lecture + entertainment) 무대다. 주의를 집중시켜 딱딱한 동양철학에 이해를 높이는 ‘강의의 기술’이라 하지만, 5분용을 한 시간으로 늘이려고 몇 가지 장치를 쓰고 있다. 본래 찌그러진
오월부터 일본 연호가 헤이세이에서 레이와(平成-令和)로 바뀐다. 쇼와 이후 평화의 첫 걸음까지(平 + 和), 꼬박 30년이 걸렸다. 신라 진덕여왕이 연호를 버리고 조공을 맹세한 것이, 오늘날 시진핑에게 “역사상 한국은 중국의 변방이었다.”는 헛소리의 빌미를 줄만큼, 고유 연호는 한자권 국가들에게 독립의 상징이었다. 고종이 국호 대한제국·연호 광무를 선포한지 13년 만에 순종이 국권을 잃자(융희 4년1910), 지옥 같은 500년 세월을 살아온 노비와 천민과 한양에 출입조차 자유롭지 못했던 승려들이, 지배계층의 분노에 과연 얼마나 공감했을까? 인터넷에서 “기미 독립선언서’를 처음 읽고 감동했다”는 말에 정말로 놀랐다. 필자가 중2때엔가 전교생이 줄줄 외우던 숙제였다. 상대를 친일파로 때려잡는 패거리싸움으로 시작, 선언서 초안을 쓴 ‘육당 최남선 죽이기’를 거쳐, 어물쩍 내쳐진 것이다. 힘차고 유려한 서술보다 내용을 보자. 오천 년 역사 2천만 ‘민족’의 ‘자유’발전, 각개 ‘인격’의 정당한 발달, ‘인도적 정신’ 등을 내세우고, 조선은 독립국이며 조선인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하였다. 구년 전에 패망한 대한제국의 ‘황제’는 단 한 마디 언급도 없다. 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