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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그릴 때 올바름의 빛깔로 그리기'

[詩가 있는 풍경 24] 전봉건 시인의 '그림 이야기 · 3'



오늘은 그림 한장 그리겠습니다.

별로 제주가 없으니 큰 종이는 아니고

되도록이면 조그만 종이가 좋겠습니다.

또한 되도록이면 오랜 세월을 견디어 낼 수 있는

그런 질기고 단단한 종이면 더욱 좋겠습니다.

아뭏든 아무도 발 딛지 아니한 눈밭처럼

그렇게 깨끗한 종이라야 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종이가 마련되면 물감을 풀어서 그리기 시작합니다.

별로 제주가 없으니 볼만한 게 될 것이란 기대 밖의 일입니다.

다만 두 눈을 그릴 때 밝음의 빛깔로 그리기

귀를 그릴 때 맑음의 빛깔로 그리기

입을 그릴 때 올바름의 빛깔로 그리기

코를 그릴 때 떳떳함의 빛깔로 그리기

그렇게 힘 쓸 따름입니다.

그림이 다 되면

어디에다 내걸거나 그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오직 내 마음 한 귀퉁이에 걸어둡니다.


[마음]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습니다.
서둘러 겨울옷을 꺼내 옷장을 채웠습니다.
계절에 빠르게 적응하는 성격이 못 돼
늘 옷차림이 끝무리를 따랐었거든요.
하지만 이번엔 좀 앞서보려 합니다.
'니케'나 '북면' 같은 유명 브랜드는 아니지만
자크를 올려 입으면 꽤나 따뜻한 방한점퍼를
특별히 한번 더 살폈습니다.
다행히 아직은 튼실허니 입을만 했습니다.

옷정리를 마치고 나니 한결 마음이 놓이는군요.
이젠 찬바람이 불어도 걱정 없습니다.
점퍼에 목도리 하나면 요즘 추위쯤이야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혹 몸이 아니라 마음이 추워진다면
그땐 어쩔 수 없을테지만요.


고 전봉건 시인(1928~1988년)은 전후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시인입니다.
6.25에 참전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전쟁의 비인간적 부조리를 고발하고, 평화에 대한 갈망을 노래하는 시들을 주로 발표했습니다. 시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연작시 '속의 바다' 역시 전쟁의 폭력성을 육감적은 소재를 활용해 독특하게 형상화해 내고 있죠.
오늘 소개한 '그림 이야기 · 3'은 시인이 작고하기 1년 전 '내가 뽑은 나의 시'라는 타이틀로 엮은 시집 '기다리기'에 실린 작품입니다. 동화적 순수성과 정신주의의 추구라는 두가지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래는 연작장시 '속의 바다' 중 '속의 바다 15' 전문.  


태양에 탄 여자가
태양의 바로 아래 바다를 온다
그 숨막힐듯 걸은
가래가 솟게 목젖이
터지게 도발적인 냄새에 절은 배를 타고
날리는 머리칼에 손이 가면서
여자는 다리를 고쳐 얹는다
그러나 바다는 나의 무릎으로부터
허리로부터 위로는 오지 않는다
사라진 칼슘, 탈회된 나의 대퇴골에 뚫린
요추에 뚫린 무수한 구멍에 거품이 일어
쏟아져 나가는 바다, 바다는 언제까지나
나의 가슴에까지 오지 않는다
언제까지나 여자는 나의 총알 구멍이
뚫린 손이 자꾸 바다가 새어 나가는
손이 안 닿는 저만치서
날리는 머리칼에 손이 가면서
태양에 탄 다리를 또 한번 고쳐 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