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 같은 느릿한 저음. 사형대계단을 오르내리는 듯한 3단음의 반복이, 정점에 이르러 흠칫 멈췄다가, 순간 추락하여 여운처럼 길게 깔린다.
억눌린 격정을 음표로 써내려간 의태어(擬態語)다. “난 이미 죽어있을 거에요.
그리고 내 눈동자는 자연스럽게 당신을 향해 열려있을 거에요. 우울한 일요일에”
찬바람의 슬픈 외침 속에 죽은 여인이 남긴 시는 이 선율과 만나, ‘죽음의 후크 송, 자살에의 초대’를 완성한다. Laszlo의 노랫말에 Rezso가 곡을 붙이고 프랑스 다미아가 부른 ‘우울한 일요일’은, 헝가리에서 발매 8주 만에 악단 전원, 그 외에 187명의 연쇄자살을 불러와(1933), 유럽에서는 노래를 금지시키고 판을 회수하였다.
예측 못한 무서운 음악의 충격이, 두 세계대전 사이 유럽사회에 만연했던 우울증의 뇌관에 불을 댕긴 것이다. 같은 해에 히틀러는 수상이 되고 의회가 ‘전권위임 법’을 통과시켜, 세계적인 ‘전체주의의 광풍’이 불어 닥친다.
자살률 세계1위인 대한민국에, 거래자의 60%가 2030이란다. ‘김치 프리미엄’ 나라에 ‘비트코인 블루’라는 신종 우울증이 발병하고, 국내외 규제로 시세가 반 토막 나자(검은 금요일: 2월 2일), 한 20대 청년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였다. 생명의 존엄성이 아니더라도, 자살자에 대한 동정이나 옹호는 금물이다. 그러나 이 같은 광풍 속에 나온 자살은 전염성·모방성이 강하여, 걷잡을 수 없는 연쇄반응이 따를 수도 있다. 따라서 마치 시한폭탄과 갈은 우울증이나 암울한 사회경제 상황은, 온 국민의 관심은 물론, 국정운영 책임자들이 뼈저린 책임을 통감해야할 비상상태다.
현 정부의 각종 정책이 경기부양이나 청년실업 해소와 정반대로 가고 있다는 주장은 별도의 토론을 요한다. 하지만 최소한 가상화폐의 전망과 우려되는 부작용을 홍보하고, 정부의 입장과 대책을 명확히 하여, 국민 특히 2030이 더 이상 물심양면으로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안내할 의무는 분명하다. 첫째 가상통화라는 장치를 도박의 기계로 쓰면서 불평하는 것은 ‘목수 연장 탓’임을 반성하자. 둘째 일확전금의 꿈을 버려라. 머니게임은 시간이 갈수록 ‘하우스’에게만 유리하다. 셋째 청년의 자산목록 1호는 ‘젊음’ 그 자체다. 더러 다치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나만의 스펙을 쌓자. 투자의 완급조절을 배우고, ‘블록체인’ 기술을 깊이 파고들면, 새로운 리더가 되려는 희망을 꿈꿀 수 있지 않을까? 긍정적인 인식전환은, 최소한 건강하지 못한 비트코인 블루의 우울증을 날려버리는 단초가 될 것이다.
먼저 러시아에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났다(1917). 일차대전 승전국이지만 얻은 것 없이 불만에 찬 이탈리아 국민은, 무솔리니의 ‘로마진군’ 공갈에 넘어가 파시스트 정부가 수립된다(1922). 감당 못할 배상금에 허덕이던 독일에서 무솔리니를 모방한 히틀러 폭동은 실패하지만(뮌헨: 1923), 10년 뒤 국가 전권을 위임받은 독재자로 등극한다.
광기의 시대에는 반드시 악의 세력이 끼어들고, 이 3인이 시작한 전체주의 게임은 결국 6천만 이상의 인명을 앗아간다. 진보냐 보수냐는 부차적인 문제요, 국민의 불안과 분노를 선동하여 집권하는 전체주의야말로, 인류를 파멸로 이끄는 독약이다. 문명의 발전을 선도해온 ‘자유’의 반대말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전체주의’인 것이다.
개헌안 전문 중에, ‘자유 민주주의’에서 자유가 빠진 것에 식자(識者)들이 경악하는 이유다. 익명과 군중심리의 거친 함성으로 반대 목소리를 압살(壓殺)하는 인터넷 이지매와, 알만 한 사람들이 ‘국민 눈높이 재판·재판이 아니라 개판·신 판경(判經)유착’운운하는 법치주의의 부정에서, 전체주의의 어두운 망령을 본다. 집단우울증의 휘발성은 높은데, 사방이 지뢰밭이다.
글: 임철중
전 대한치과의사협회 대의원총회의장
임철중 치과의원 원장
대전고등법원 민사조정위원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