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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중 칼럼

산골짝의 등불

[임철중의 거꾸로 보는 세상] - <274>

 

   우리에게도 꼰대가 있었다. 사실은 우리가 ‘꼰대’라는 말을 만들어낸 세대다.
 영어 선생님은, “This is a cat.”를 “지수이주 아 캿또.”라고 읽으셨다. 대선배요 상이용사이시니 깍듯이 모셨지만, 뒤에서는 쿡쿡 웃었다. 6·25 직후 미국영화에 익숙한 아이들은, 매사에 소심하고 영어도 서투른 어른들을, 대화가 되지 않는 고물(古物) 꼰대라 불렀다. 생각이 조금씩 바뀐 것은 나이 들어 옛것의 진미를 깨닫기 시작한 다음이다. 팝송에 미쳐 우습게 알던 뽕짝이 왠지 포근하다. 1950년대 유행가에 베르디의 카르멘과 돈 호세가 나온다. 어려서 흥얼거린 송창식의 노래 ‘산골짝의 등불’ 멜로디가, 1934년 고복수의 ‘타향살이’에 간주로 들어있다(장유정 교수). 킹레코드사에서 나온 ‘유성기로 듣던 명가수’ CD에서 확인이 된다. 1933년 미국 음반이 출반되고 불과 1년 만이다. 일제 강점기 깜깜이로 살아온 구닥다리가, ‘천만에’ 서구문화 유입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는 얘기다. 정보에 손톱만큼 앞섰다고 선배들을 낮춰본 오만이, 세대 간 소통 부재에 일조했음을 반성한다.

 

   ‘산골짝’은 미국 서부 개척기의 민요를 바탕으로 Joe Lyons와 Sam C. Hart가 만든,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는 노래로, 세계 만인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원제는 When It’s Lamp-lighting Time in the Valley. 해가 서산을 넘어 땅거미가 질 무렵, 삽시간에 칠흑으로 변하는 계곡의 외딴집에서는 서둘러 등불을 밝힌다. 서부 개척기는 대이동과 유랑(roaming)의 시대, 어제의 양민이 오늘에는 무법자(outlaw)가 되는 거친 세상이었다. 우리말로는 네 개의 련(聯) 가운데 1, 2 만 옮겨져 유감이다.
 셋째 련 노랫말이 절절하다. 행여 집을 찾지 못할까 애를 태우는 늙은 어머니는, 등불을 켜고 아들을 기다렸지만, 사나이는 어머니가 이제 천국에 가 계심을 안다. 
   “내 죄를 모르시는 어머니는/ 하늘에서 이 몸을 기다려/ 
    새사람이 되어서 만나야지/ 인생의 경주가 끝나면.”
    마지막 구절은, “Up in Heaven When Life’s Race is Run.”이다. 
 인생을 달리기 경주로 읽는 시각은 시어(詩語)요, 일생에 저지른 죄를 용서받아야 천국에서 어머님을 만나 뵙는다는 믿음은 종교다. “죽어서 무슨 낯으로 조상님을 뵈 오랴?”하는 ‘배달민족의 종교관’과 일치한다. 성모 마리아가 아니어도, 무한 희생과 용서의 ‘어머니’는 인류 공통의 모태신앙(母胎信仰)이다. 넷째 련 마지막 줄에서 어머니의 사랑은 한 발 더 종교로 올라선다. “이 세상 그 어디를 방황해도, ‘등불’은 내 발길을 비추네(Guide Me).” 

 

   건국 이래 가장 추한 20대 대선이 끝났어도, 마음 편한 국민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초코파이(코로나 바람에 당선된 초선들) 국회라지만, 골라 뽑은 여당 대선후보가 ‘18’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라니. 뒤늦게라도 반성은커녕 패배가 애석하다며 울부짖는 여학생. 세상이 미쳤다. 분노유발과 선동을 ‘정치’로 착각하는‘아대(아스팔트 대학)’ 동문은 그렇더라도, 맹목적으로 따르는 저 물결은 레밍의 무리인가? 분노조절을 못 하니까 산에 불을 지르고, 세 살도 안 된 아이를 굶겨 죽인다. 이 악마의 불길을 잡을 방법은 없는가? 이식된 분노조절 장애는 고질이지 불치는 아니니 해답이 있으리라. 필자는 ‘가족의 재구성과 어머니의 복권’에서 희망을 찾는다. 신이 내렸어도, 내림굿을 받고 신과 대화법을 익혀야 무당을 한다.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도 결국은 같은 말로서, 종교적인 해탈 이후에도, 조금도 끈을 늦추지 말고 정진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아무리 가없는 어머니의 사랑도, 사랑하는 방법을 익히지 못하면 이어가기 어렵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베풀 줄도 아니까.
 몇 차례 산업혁명으로 인류는 엄청난 풍요를 얻었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잃었다.
 오순도순 모여 사는 방법을 배울 소중한 시간을 빼앗겼다. 팬데믹과 4차 산업은 더 이상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너게 할지도 모른다. 좋은 보육원이 평범한 양부모를 대신하지 못한다. 부모의 사랑과 체온 있는 훈육, 형제자매의 배려와 아웅다웅 다툼, 그 얼개 속에서 인간은 사랑을 주고받는 방법을 익힌다. 자유와 자율교육이 대세라고 하지만, 아름다운 구속이 몸에 배어있지 못하면, 인내는 증발하고 분노만 앙금이 되어 남는다. “보고 배운다.”는 말은 모성애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다시 한 번 어머니의 등불을 켜자.  

 

 

 

글: 임철중 
전 대한치과의사협회 대의원총회의장 
 임철중 치과의원 원장 

전 대전고등법원 민사조정위원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