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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효봉 기자의 지방 치과의사회 탐방기 <2>

[朝鮮齒界로 읽는 해방일기 4] 대구 · 청주편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조선의 치과계는 환희 속에서 당면 문제에 대응하느라 분주했습니다. 치과계 최초의 종합지로 1946년 5월 1일에 발간된 『朝鮮齒界』 창간호에는 당시 치과계 구성원들이 어떤 생각을 하였고 무엇을 위해 노력했는지 생생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 내용을 연재하면서 70년 전 선배들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당시의 맞춤법이 지금과 적잖이 다르지만 원문 그대로 두었습니다.  <정리: 조영수>


 

대구

3월 2일 대구 착, 3일 정오에 이두영씨를 방문... 씨는 경남 咸安 출생으로 경성치전을 맞치고 세브란쓰 병원에 근무 후 대구에 개업하야 20년이 된다고 한다. 당년 51세 담배를 조와하고 술은 한두잔 정도 頭腦가 緻密하고 이론이 탁월하야 만사에 실패는 없겠으나 경북치과의사회의 지도적 책무를 負擔한 앞 길에는 대범한 행정 수완의 발휘가 기대되는 바 크다.

이하는 치료에 분망하면서 往訪한 기자에게 준 談話다.

1. 경북치과의사회 결성에 대하야 = 현하 제 情勢로 결성하지 못 하고 과도적 대행기관으로 대구치과의사회가 그 기능을 대행하는 중인데 4월에는 총회를 개최하야 완전한 새 출발을 하게 될 것이다.

2. 대구치과의사회 위원명과 회원명
  위원장 이두영, 부위원장 김영조, 자재부장 최해운, 후생부장 구자철, 지방부장 최준향, 사회부장 金鍍泳. 회원은 이두영, 김영조, 최해운, 崔翔華, 白鳳龍, 김도영, 金泰漢, 郭學台, 구자철, 구자익, 金鍾來, 최준경, 李源太, 서영규, 한택교, 강신문, 박충호, 김영삼, 박재경 등 19명인데 앞으로 증가될 것이다.

3. 경북 치과의 지방 분포 현황 = 대구 19명, 김천 3명, 경주 1명, 상주 3명, 예천 1명, 달성 1명, 성주 1명, 경산 1명, 영천 1명, 임곡 1명, 고영 1명, 군위 1명, 선산 1명, 문경 2명, 안동 2명, 봉화 1명, 영주 2명, 포항 1명 등인데 其中 입치업자 9명이 포함되었으며 의성, 영양, 청송, 청도 등은 무의촌이다.

4.  대구 인구와 齒科醫 수 = 8․15 전에는 대구 인구 25만에 조선인 치과의 11명, 日人 27명 합해서 38명인데 현재는 戰災民, 민족반역자 들이 모여들어서 30만 인구는 될 것이다. 그런데 日人 치과의 철거로 조선인 치과의 19명뿐이라면 의료진 부족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으나 그러타고 해서 지방에 있는 치과의가 도시 진출을 계획하야 무의촌을 고의로 만들어 노코 오는 것은 반대한다. 戰災 齒科醫의 개업만은 환영하고 기대한다.

5. 日人 齒科醫의 악행 = 日人들이 치과의사회 입원 선출에 차별이 심하여 5 대 1 혹은 4 대 1로 독재를 爲主하고 보니 조선인 임원 중 나는 10년 동안 임원으로 있으면서 진심으로 협력할 수 없었다. 될대로 되라 하는 頹廢的 기분으로 우드커니 방관만 하고 있었다. 치과재료가 배급제로 되자 그들은 급수를 정하되 1급부터 6급까지 만들어가지고 日人 치과의는 대부분이 1,2,3급이요 조선인 치과의는 4,5,6급이 많았다. 日人은 新개업이라도 3급이나 4급을 주고 조선인으로 2.3급을 받은 사람은 五指를 넘지 못하였을 것이다. 나는 3급으로 장차 2급이 되겟지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엇는데 때마츰 회장 改選이 잇자 자재부 이사 中川이라는 日人이 출마 운동을 하고 그를 지지하는 某人이 차저 와서 中川이 조선인에 대한 동정이 많은 사람이니 회장으로 선출하자고 提議하기에 『그만한 인격이 없다』고 거부하였드니 그 말이 中川에게 들어갓든지 3급에서 5급으로 轉落되고 말엇다. 日人의 압박과 專制가 슬프고 억울하엿으나 엇지할 길이 없었다.

6. 日人 齒科醫의 器械, 재료 접수 상황 = 日人 치과의 소유 기재, 재료 판매는 대구 치과의사회의 斡旋을 받을 것이고 개인 직접 판매는 절대 엄금하여 기왕 판매하였을 때에는 그 매수품 종목, 가격 등 명세서를 본회에 보고하야 그 지령이 있을 때까지 책임보관하기로 결정하고 日人 치과의 집에 『후생회 치과의사부 관리』라는 貼紙를 부첫스나 그 결과는 失收에 도라갓다. 본회에서 접수치 못 하고 무자격자들이 매수한 것은 유감이다. 물론 조선인 치과의가 개인적 행동으로 買受인지 接收인지 한 것도 있기는 하다. 후생회라는 것은 의사, 치과의사, 약제사가 조직하야 의사는 日人 의사의 의료품을, 치과의사는 日人 치과의의 기계 재료를, 약제사는 日人 약방의 약품을 각기 접수코저 조직한 것인데 某件의 비난으로 해산하였다가 强化 재조직하게 된 것이다.

7. 치과재료의 前途 – 조선에 치과재료 생산기관이 없으니 외국품에 의존치 않을 수 없다. 더구나 日人들이 무자격자에게 재료를 방매하였으니 한심할 노릇이다. 미국 제품을 수입하면서 조선에도 급속히 생산 공장을 설치하지 않으면 建國保健에 일대 지장이 생기겠다.

8. 齒․醫 一元化에 대하야 = 일시 일본에서 부르지즌 齒․醫 一元化는 反動的 현상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엄정한 비판 하에 치과 수준을 향상시키는 진정한 齒科醫人이 되어야 하겠다. 일원화는 찬성이나 그러자면 치과의의 재교육도 필요할 것이다.

9. 치과의사회 運營上의 희망 – 우리는 무엇보다도  互惠相助의 정신을 가지고 동일 보조로 행동할 것이다. 딩파를 초월한 양심 협조와 열의를 가지고 전진하는 곳에 우리의 集團體는 건전히 성장할 것이며 치과의학의 발달은 태동한다.


청주

3월 22일 아침 6시 55분 발 부산행 46열차로 서울을 떠나 동 11시 30분 조치원 착, 12시 30분 조치원 발 충주행 私鐵에 승환하야 下午 1시 30분에 청주 도착,. 개업치과의 이세근, 박창희 양씨와 김정태씨(충북도립의원 치과) 세 분이 청주 5만 시민의 구강위생을 담당하고 있다.

이세근씨 = 경치졸업 후 성대부속병원 치과에 1년간 근무하고 고향 청주에 개업하여 7년이 된다 한다. 충청북도 치과의사회장으로 그 원숙한 수완을 발휘할 뿐 아니라 청주 사교계의 중심 인물로 그 활동이 기대된다. 다음은 氏와의 담화.

8월 15일 해방 직후 非치과의와 치과기공사들은 日人 치과의 소유 器械 재료를 매수하려고 청주에 집중하야 매일 가진 妙計를 0策하면서 日人치과에 출입이 頻繁하였다. 이 寒心할 현상을 挫折식힘이 급선무로 생각하야 10월 23일 충청북도 치과의사회를 결성하였다. 첫 사업으로 일인 치과 기계 재료를 가급적 속히 치과의사회에서 매수하야 道外 유출을 방지하는 동시에 미비 치과 及 戰災 치과의에게 충당하는 계획 하에 청주 내는 물론 道內 각지를 歷訪 매수에 진력한 결과 약 8할을 인수했다. 인수한 기계 재료는 旣定 방침대로 11월 24일 경 道內 회원에게 균등 분배하고 앞으로 부족이 예상되는 재료는 공동 구입을 하야 회원의 불안을 一掃할 준비를 하고 있다.
日人 치과의 퇴거로 인한 무의지구 23개소에는 爲先 입치사를 이동 배치하였고 청주에도 新 개업할 분이 두 사람 있다. 그러나 방방곡곡에 非치과의가 00하고 있는 형세이니 두통거리다. 당국과 협력하야 非치과의 근절에 노력하고 있으나 아직 그 효과가 없다.

 

충북치과의사회 임원
* 회장 이세근
* 부회장 박창희
* 이사 김정태, 민정식(충북)

 

박창희씨 = 경치 졸업 후 적십자병원 치과와 개인 치과에 약 6개월 근무하고 長家口에서 7년 성업 중 戰局이 일본에 불리함을 예측하야 작년 7월에 귀향, 11일에 개업 재출발을 하였다. 충청북도 치과의사회 부회장. 理想을 사랑하는 단정한 문화인. 아래는 張家口 消息의 一節

* 내몽고의 수도 長家口의 기후는 北鮮과 흡사하다. 인구는 약 40만 조선 동포는 2천 가량이고 日人이 2만이며 漢민족 중국인이 대부분이다. 蒙疆이라면 大同炭(셰계 제3위)과 아편으로 유명한데 조선사람은 아편 賣買에는 관계하지 않고 寫眞館, 밥화상으로 대ㅔ다수가 성공하였다.
장가구에서도 日人들은 日軍의 총검 보호로 호사스런 생활을 하다가 戰局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일인은 우선적 으로 암암리에 귀환식혔으나 조선인의 귀환은 극도로 억압하였다. 日人 치과의사 5명, 조선 치과는 나 한 사람뿐인데 의료관계자라고 歸鮮 허가 수속을 受理치 안는 것을 이 핑계 저 핑계 하여 간신히 귀향한지 한달이 못 가서 일본은 드듸어 패망하였다. 일본이 반공 旗幟를 휘날리든 長家口가 지금은 赤軍 근거지가 되었다 한다. *

 

李, 朴 양씨와의 화담을 맟이고 밤 9시 경 여관으로 간즉 다다미방이 몹시도 쓸쓸하다. 비록 한밤의 旅宿이지만 三更이 지나서 빗소리에 잠이 깨고 보니 애절한 감상이 가슴 깊이 슴어든다.

24일 새벽에는 여름비처럼 쏘다지고 6시 30분 경 청주역으로 향할 때는 紛紛한 눈보라로 化하야 앞길을 막는다.

8시에 청주를 떠나 조치원에서 대전 시발 서울행 131열차를 타고 보니 日氣 관계인지 승객이 적다. 눈은 오고 깨진 유리창으로 바람은 염체 없이 들어와서 車구석으로 몰녀 있는 승객들이 덜덜 떨고 있다. 소정리 통과할 지음에는 눈은 살어지고 또다시 비로 變하였다.

조치원, 천안서는 米穀 搬出 取締가 심하야 一卂이라도 발견하는대로 압수하드니 成歡, 평택, 사정리, 오산, 병점, 수원 각 역에서는 양심적 취체를 하는 모양이라 승객의 대부분이 1,2斗의 쌀을 가지고 승차한다.

쌀을 가지고 승차한 부인들의 만족한 얼골과 조치원에서 쌀을 빼앗기고 울면서 哀願하든 부인들의 悲愴한 얼골의 卵暗色이 눈앞에 錯綜하야 가슴이 앞으다. 모다 식량난의 비극이다.

수원을 지나서 비는 완전히 개이고 한강 철교를 통과할 때는 풀은 하날에 힌구름이 떠있다. 유유한 한강 하류에는 帆船이 그림같이 보인다. 春色은 자못 駘蕩하다. 식량난의 黑雲이 오늘 日氣처럼  해소될 날은 언제일가.

 

                                                  정리 : 조영수 <전 대한치과의사학회 회장>

 


■ '朝鮮齒界'는 해방된 조국의 첫 치과전문지로 1946년 5월에 탄생했습니다. 발행인은 황영기, 편집장은 최효봉 그리고 발행처는 조선치계사로 되어 있습니다. 표지까지 110쪽 정도의 분량이지만, 이 안에는 해방을 맞은 한국 치과계의 박동이 느껴지는 글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각 지역치과의사회 소식은 물론 치과의무행정에 대한 소감 그리고 당시의 임상과 치과기재상공에 관한 이야기까지.. 덴틴은 광복 70년을 맞아 이 소중한 사료들을 연재의 형식으로 독자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치과계 각 분야가 70연 전의 초심을 회복하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 연재를 기획하고 직접 정리까지 맡아주신 조영수 선생께 감사의 인사 전합니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