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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효봉 기자의 지방 치과의사회 탐방기 <1>

[朝鮮齒界로 읽는 해방일기 3] 부산 · 경남편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조선의 치과계는 환희 속에서 당면 문제에 대응하느라 분주했습니다. 치과계 최초의 종합지로 1946년 5월 1일에 발간된 『朝鮮齒界』 창간호에는 당시 치과계 구성원들이 어떤 생각을 하였고 무엇을 위해 노력했는지 생생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 내용을 연재하면서 70년 전 선배들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당시의 맞춤법이 지금과 적잖이 다르지만 원문 그대로 두었습니다.  <정리: 조영수>


 
3시간 연착, 17시간만에 부산에 도착하다

부산과 대구 치과의사회의 동향을 打診코저 2월 27일 아침 부산행 46열차를 타고 보니 입추의 여지없이 초만원이다. 이곳저곳 유리창이 깨져서 바람이 술술 들어오기는 하나 담배연긔와 떠드는 소리에 가슴이 메질듯이 답답하다. 15분 延發로 7시 10분 서울역을 떠나자,
『사람 떠러져 죽겟소, 조금만 들어갑시다』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닌다. 용산, 노량진, 영등포에서는 깨진 유리창으로 연달아 사람이 들어온다, 그래도 못 탄 사람이 수백명이다. 시흥이 가까워질 때 한 부인네가 땀을 뻘뻘 흘니며 애원을 한다.    

『조금만 비켜주세요』
『비키다니, 당신도 보다싶이 이러케 꼭 백여있는 형편에 어듸로 비킨단 말이요』
『그래도 좀 가게 해 주세요. 두 다리가 공중에 떠 있어서 못 견디겠어요』
『두 다리가 떠 있는 것은 당신 뿐이 아니요. 그러타고 날러 갈 수도 없으니 소변이 급하면 정거했을 때 유리창으로 내려서 일을 보쇼』
『그런 것이 아니라 앞 칸에 동행하는 사람이 있어서 갈여고 그래요』
『동행하는 사람은 내릴 때서 내리면 서로 맛날 것 아니요』
『어듸서 내릴지 몰르니깐요』
『아-니, 가는 곳도 몰은단 말요』
『그이가 내 차표까지 사가지고 앞간에 탓서요, 초행이 돼서 어듸서 내릴지 몰나요』
『허허, 어지간하군요. 그래 초행이고 차표를 누가 삿든지간에 가는 곳도 몰으다니... 딱하슈』

수원에서부터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해서 餠店, 오산, 서정리, 평택을 지나고 보니 그러케 많은 사람이 반수 이상 내리고 죄석이 넉넉하다. 결국 승객의 대부분이 쌀을 사려고 헤메는 사람들인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해방된 이 땅에 풍년이 들었다 해도 기근의 공포를 늣기게 된 모순을 어듸로 규명할 것인가.

수원 이남 각 역에서 엿, 떡, 김밥, 물, 담배, 술을 승객에게 파는 장사꾼은 특히 소년소녀가 만타. 학령기에 있는 아해들이 奸詐를 부리면서 장사를 하니 웬일인가.
영동, 黃捫, 김천, 大新, 牙浦, 구미, 若木, 倭館 등에서는 警官 由而 직원들이 총과 몽둥이를 들고 감시를 몹시 하는데도 쌀을 질머진 장사꾼이 많이 탄다. 부산으로 가는 쌀장사인 것을 나종에 알었다.

 

약 3시간 연착하야 밤 12시 5분에 부산에 나렸다. 역전에 나서니 밥장사 아주머니들이 『이리 오이소, 따신 밥 잡수이소』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괭장히 부산하게 들닌다. 그리고 쌀장사가 나올 적마다 『쌀 파소』 하고 덤벼드는 사람이 꽃 본 벌레갗다. 쌀 시세를 알어보니 大斗 고봉으로 1斗 3백 7십원이라 한다. 서울서는 대두 짝 까거서 1斗 3백원하는 것을 보고 왓는데 부산 時價는 왜 이러케 高騰할가. 왜놈에게 밀매하는 惡質 謀利輩가 아직도 있을가.

부산의 첫 밤을 다다미방에서 지내고 28일 정오까지 시내 구경(究竟)을 한 뒤 하오 4시경 초량町 金昌圭씨를 방문하였다.

초량역 못밋처 자동차 수리공장 앞에서 왼편 도로로 드러가서 바른편 약간 높은 곳에 동남을 향하야 건축한지 2~3년 될 듯 한 2층 양옥에 『김창규치과의원』의 표찰이 뚜렷하다. 本意를 말한즉 慇懃히 마저 주는 김선생의 태도가 사교에 능함을 증명하고 남음이 있다.

김창규, 金起煥, 申鐘胤 3씨의 초대로 興安閣에서 만찬회가 있었는데 그 席上에서 左와 같은 문답이 있었다.


기자(사진) = 貴道 치과의사회는 언제 결성되었는가.
김창규씨 = 작년 9월 23일 창립총회를 개최하야 역사적 新發足을 하였다.

기자 = 총회원 수 밋 각 지부별 회원 수는.
신종윤씨 = 부산 18명, 동래지부 6명, 진주지부 4명, 통영지부 4명, 사천지부 4명, 거창지부 8명, 마산지부 5명, 김해지부 5명이고 총회원수는 54명이다.   

기자 = 부산지부가 결성되지 않은 듯 한데.
김창규씨 = 불원간 결성될 것이다. 자금 그 준비 중이다.

기자 = 귀도 치과의사회 임원 씨명은.
김기환씨 = 회장에 김창규씨, 부회장에 김순배씨, 위원에 임흥준, 이원술, 신종윤, 朴貞夏 등 4씨와 나까지 다섯 분이다.

기자 = 8․15 전후 부산 인구와 齒科醫 수는.
김창규씨 = 8․15 前 부산 인구는 40만이고 齒科醫 수는 68명인데 그 중 조선인이 12명, 日人이 56명이었다. 8․15 후 日人이 철거한 대신 戰災 동포가 귀환하였으니간 인구는 여전히 40만 가량 될 것이다. 

기자 = 그러면 齒科醫가 넘우나 부족하지 않은가.
김창규씨 = 다소 부족함을 늣기나 日政 시대처럼 많지 않아도 의료上 그다지 지장이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日人은 체질 관계상 치아가 약하였고 구강위생에 대한 인식이 깊어서 환자가 많았으나 우리 동포는 비교적 치아가 건전한 까닭이다.

기자 = 日政 시대 日人 齒科醫들의 행동에 대하야.
김기환씨 = 日人들이 독재적으로 운영하는 치과의사회에 협력할 마음이 없어서 脫會하였드니 5~6년 전에 中本이라는 日齒人이 차저 와서 입회를 권함으로 할 수 없이 제입회는 하였으나 피압박민족의 슬픔을 늣기지 않은 날이 없엇다.
신종윤씨 = 日人치과의는 정치적 배경도 조코 수효도 많아서 필요 이상으로 압박을 받을 때마다 분하고 억울하였으나 엇지할 도리가 없었다. 다만 그들의 패망이 소원이었다.
김창규씨 = 나도 그 시절 資材部 이사로 있엇는데 職權을 행사할 수 없었다. 金배급, 통제품 배급의 등급은 영업세, 개업년수, 환자 수를 기준으로 결정하기로 하였는데 日人은 실적 이상으로, 조선인은 실적 이하로 차별이 심하였다. 치과의의 실적 보고는 형식적 受理에 불과하고 배급비율은 도 위생과 警部와 도치과의사회장, 전무이사 등 日人 간부들이 密議 결정하였고 나는 자재부 이사란 명목 뿐이지 발언권이 있으면서 발언도 못하였으며 발언을 한들 이무 소용이 없엇다. 이처럼 독재와 차별을 악독하게 감행하든 그들이 패망하는 것은 당연한 理致로 생각한다.

기자 = 日人 치과의의 기계 접수 현황은 어떠한가.
김창규씨 = 해방이 되어 경남치과의사회장 高橋를 방문하야 會 인계 기재 접수를 선언한 바 있었으나 惡種인 그들은 非치과의에게 高價로 기계를 放賣하야 의료계 혼란을 도모함으로써 끗까지 악행을 범하였다. 창립총회를 맛친 우리 경남치과의인은 9월 25일 성명서를 신문에 발표하고 道보건부와 연락하야 本會 접수위원이 활동하였으나 受苦만 하고 효과는 別로 없엇다.
신종윤씨 = 態野 한 사람만은 會에 와서 접수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부회장으로 있는 井山은 出征한 자식을 기달인다고 2월 24일까지 있엇는데 나종에 알고보니 자식을 기달인 것이 아니라 조선에 거류할 생각으로 있다가 그것이 容許되지 않을 것을 꺠닷자 器材를 暗賣하고 도망하였으니 비열하기 짝이 없다.

기자 = 그러면 잔류 日齒人은 없는가.
김기환씨 = 永野라는 것이 남아 있는데 永野의 妻가 조선 부인임을 핑게 삼어 거류하고 있는 듯 하다. 치과의사회로서는 감섭치 안코 있다.
김창규씨 = 또 하나 日人名으로 吉田實라는 자가 잇었는데 사실은 대만인이고 일흠은 巨濟呂熱通이라 하야 입회원을 제출해 왔기로 중국영사관을 통한 국제적 수속을 요구했다.

기자 = 부산 시내 여러 곳에서 『군정 경상남도 보건부 관리 치과의원』의 標札을 보앗는데 그것은 자격자가 운영하는 것인가.
김창규씨 = 아니다. 非치과의다. 한심한 과도적 현상이랄까... 앞으로 肅淸될 것이라고 밋는다. 道 보건부의 적극적 取締를 요망하고 있다.

기자 = 무의촌 대책 如何.
김창규씨 = 최근 무의촌에 배치코저 道 보건부에서 限地치과의시험이 있엇다. 치과의사회에서 무의촌 순회진료반을 편성할 생각은 가지고 있으나 구체적 成案은 없다.

기자 = 齒 ․ 醫 일원화에 대한 소감은.
신종윤씨 = 단연코 일원화를 주장한다. 美國은 치과가 일반의학보다 우위에 있다. 我國은 그 반대다. 치과의 수준 향상은 일원화에 있다. 
김기환씨 = 조선에 잇어서 일원화가 실현되면 齒科醫人이 치과를 이탈하지 않을가.
김창규씨 = 일원화의 목적이 달성되더라도 치과의인은 치과를 堅守함으로써 그 職域의 발달과 향상을 圖謀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원화를 실천에 옴기자면 교육기구부터 개편할 필요을 늣긴다. 그리고 개업 치과의의 재교육도 고려해야 된다.

기자 = 치과재료는 어느 정도 부족한가.
김창규씨 = 제일 긴급한 것은 金이다. 금 배금을 특히 요청하고 있다. 재료는 과거에 있어서 日人 본위로 배급한 관계상 모든 것이 缺乏 상태에 있다. 약품도 부족하다. 당분간은 지장이 없을 듯 하나 앞길이 우려된다. 급배급과 양품구입 건을 도 보건부에 연락 요청하고는 있다. 채료는 미국 제품의 수입을 촉진하는 한便 조선에도 치과재료 공장을 설치하는 것이 급선무다. 斯계界기 인사의 희생적 奮起를 바란다. 

기자 = 대단히 고맙습니다. 다음 기회엔 부산 전 치과의인의 당면 문제에 대한 고견을 듯고저 합니다.


김창규·김기환·신종윤은?

김창규씨: 경남 치과의사회장, 경남 전치과의인의 신망이 깊고 화술이 超衆하야 사교가로 유명하다. 謙虛한 태도 속에서 자연스럽게 빛나는 威嚴이 거물임을 증명한다. 초량 20여 초등학교 학부형회 연합회장으로 교육사업에도 공로가 지대하다. 동래 출생 당 45세. 부산에 개업한지 21년.

김기환씨: 경남치과의사회 재무위원, 경남 김해인으로 당 39세이고 부산 개업이 13년이라 한다. 평범하고 쾌활한 호인, 흥이 나면 사교 딴쓰로 萬人을 매료한다.

신종윤씨: 경남치과의사회 서무위원, 경남 구포인. 京齒 출신, 당 31세, 경치 시대부터 탁구선수로 유명하고 정구, 축구... 운동이라면 못 하는 것이 없으며 부산권투회 창설위원으로 활약하였고 현재 권투회원 3백명 중의 중진.

 

                                              정리 : 조영수<전 대한치과의사학회 회장>

 


'朝鮮齒界'는 해방된 조국의 첫 치과전문지로 1946년 5월에 탄생했습니다. 발행인은 황영기, 편집장은 최효봉 그리고 발행처는 조선치계사로 되어 있습니다. 표지까지 110쪽 정도의 분량이지만, 이 안에는 해방을 맞은 한국 치과계의 박동이 느껴지는 글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각 지역치과의사회 소식은 물론 치과의무행정에 대한 소감 그리고 당시의 임상과 치과기재상공에 관한 이야기까지.. 덴틴은 광복 70년을 맞아 이 소중한 사료들을 연재의 형식으로 독자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치과계 각 분야가 70연 전의 초심을 회복하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 연재를 기획하고 직접 정리까지 맡아주신 조영수 선생께 감사의 인사 전합니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