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송(chanson)은 현대 프랑스의 대중음악, 주로 서민의 노래다. 국민성을 닮아 다양하지만, 멜로디는 이탈리아처럼(canzone) 너무 밝거나 포르투갈처럼(fado) 애처롭지 않고, 일상의 대화처럼 높지도 낮지도 않은 음역으로 푸근하게 낭송(朗誦)한다.그 위에 특유의 비브라토와 비음(鼻音) 섞인 노랫말이, 일단 빠져들면 헤어나기 어려운 중독성과 이국적인 매력을 자랑한다. 그러나 바로 이 매력 포인트가 절대음감, 나아가 클래식 음악과 친하기 힘든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래서인지 프랑스에는 이탈리아나 독일, 심지어 오스트리아보다 훌륭한 작품이나 뛰어난 작곡가가 적고, 공연장이나 교향악단의 지명도도 뒤떨어진다, 라는 생각이 필자의 편견이었다. 대한민국을 한 단계 올려놓자는 ‘88 서울 올림픽 전야, 온 나라가 관광객 유치에 한편으로는 북한 테러 위협에 잠을 설치는 시점에, 흘러간 프랑스 육체파 배우 브리짓 바르도의, “개를 먹는 국민” 발언이 재를 뿌렸다. 당연히 이에 맞선 항의와 비난이 쏟아졌다. 영화의 원조이면서도 스크린 쿼터의 울타리 뒤에 숨어 국산영화를 보호하고, 이에 편승한 배우·감독은 평생 기득권을 즐기는 나라. 훌륭한 작품도 많지만 화려한 구도
조성진의 쇼팽은 TV를 통해서도 몰입하기에 충분했다. 콩쿠르 우승이라는 후광효과 뿐만은 아니다. 안방의 판단은 현장의 열기에 휩쓸리지(masking) 않아 보다 냉정하니까. 이 연주에 1점을 준 프랑스 앙트르몽 심사위원 입장에서 생각해보자.첫째, 천재적이고 아름다운 연주지만 왠지 바디 감(무게)이 약하고, 과외수업 모범답안처럼 매끄러워 개성을 엿보기 어렵다. 둘째, 절대평가가 아니라 연주자 끼리 상대평가이므로 10점 만점에 1점은 문제되지 않는다. 셋째, 문화와 예술의 중심인 프랑스 대표로서, 누가 뭐래도 내 판단은 옳다. 이상 세 항목을 풀어보자. 첫째 콩쿠르는 원숙한 비루투오소에 대한 평가가 아니므로 16-30세의 연령제한이 있다.디캔터에 붓고 10분여를 숙성시켜 와인의 깊고 독특한 맛을 음미하는 소믈리에가 아니다. 둘째 입상권 수준의 연주는 문외한이 들어도 어딘가 달라서, 아무리 상대평가라도 과락점수는 넘어야 옳다. 셋째 파리가 세계의 예향이라는 전제는 맞지만, 그 말이 과연 모든 파리지엥에게 통할까? ‘감성의 개입’이 의심되는 이유다. 프랑스인에 대한 필자의 선입견을 고백한다. GNP도 독일은 주변 국가를 의식하여 깎고, 프랑스는 라이벌 독일에 대한
올림픽 모토인 “빠르게·높게·힘차게”는 숫자로 기록되고 구기나 격투기도 승패가 분명하다. 그러나 피겨 스케이팅은 체조·다이빙처럼 심사위원의 주관적 판단을 모아 등수를 정하므로, 심판은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선수와 특별한 관계(Up close personal)가 없어야 한다. 위원 수도 충분히 잡고 그중에서 최고점과 최하점을 제외한 나머지를 합하여 평균치를 계산하는 등, 안전판도 마련되어 있다.김연아의 은메달(Sochi 2014) 당시 피겨의 전설 카타리나 비트와 미국·프랑스의 스포츠지에서 의문과 이의제기가 잇달았고, 프랑스 심판이 “러시아를 밀어주라는 자국(佛) 빙상연맹의 압력이 있었다.”고 폭로하여 메달색깔이 변경된 전례(S.L. City 2002)도 있었건만, 연아는 “점수는 심판의 몫”이라며 순순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미스코리아 심사도 위원 채점이 거의 일치하고, 시속 150km의 강속구에 구심 판정이 공 하나만 벗어나도, 외야석에서 야유가 터져 나온다. 광우병처럼 누가 거짓말로 오도하지 않는 한, 집단의 눈은 빅 데이터(Big Data)에 근접한다. “욕을 입에 달고 산다.”는 말이 있다. 말끝마다 ‘십 원짜리’ 추임새가 붙는데, 아이들까지 뜻도
파리 시내에서 IS가 무차별로 동시다발 테러를 감행하여 130명의 무고한 목숨을 빼앗아 갔다(2015. 11. 13). 만약 범인이 주목표인 축구장에 들어갔으면 더 큰 참사로 이어져, 수천 인명에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의 안위도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13일의 금요일 밤 벌어진 이 악마적인 만행에도 파리 시민들은 의연하였다. 지난 1월 풍자 주간지 샤를리 애브도 테러 당시 “내가 샤를리다!”라고 외치던 표어가 “나는 테라스에 있다.”로 바뀌었고 그것은, “너희들의 노림수에 굴복하여 우리의 ‘톨레랑스 정신’을 포기하지 않겠다.”라는 선언이었다. 참극의 현장 바타클랑 극장 앞에서 한 독일 피아니스트가 ‘Imagine’을 연주했다고한다. 국가의 안보를 책임지는 대통령의 IS 본거지 폭격은 당연하지만, 함께 사는 무슬림에게는 자유·평등·박애의 정신이 낳은 2백년 전통의 ‘관용’을 지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Imagin은 비틀즈의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 존 레논이, 베트남 전에 반대하는 반전(反戰) 운동과 평화 호소를 위하여 1971년에 작곡한, 인류를 향한 조용한 외침이요 유언이다. 그가 철학에 심취한 아나키스트인지, 종교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니힐리스트인지, 부
“런던에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의 ‘쥐덫(Mousetrap)’이 신기록을 세우며 공연 중이라지만...” 개업 첫 해에 대전일보에 기고한 칼럼 ‘추리 극’ 첫 구절이다(1979). 이 연극이 63번째 생일을(1952. 11. 25) 맞아 세계최장기록을 갱신했다.20세기 후반을 장식한 007 시리즈 첫 영화 ‘Dr. No’가(1962) 생각난다. 첫 장면이 킹스턴(Jamaica)대로를 걷는 세 맹인(Chigroe: 중국계 흑인)인데, 배경으로 나오는 노래가 ‘눈먼 쥐 세 마리(3 Blind Mice)’, 즉 쥐덫의 원작인 라디오 드라마(1947) 제목인 까닭이다. 작가 플레밍이 아니라 감독(Terence Young)의 아이디어로 안다.포켓북으로(Signet 1962) 읽은 직후에 본 탓으로 감흥은 덜 했는데(소설보다 나은 영화를 봤는가?), 판권은 1958년도이다. 사고과정(Thinking Process)을 주목해보자. “단막극 쥐 세 마리 – 연극 쥐덫의 히트 – 소설 속 세 사람의 눈 먼(假裝한) 범인 – 영화 배경에 노래 ‘쥐 3마리’를 삽입”, 이렇게 상품가치를 올린 007 영화는 상상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고, 반세기 동안 총 23편의
이승만 대통령 단골 성우인 구민씨는 기막힌 성대모사로, “본인보다 더 진짜 이박사목소리”였다. 교황과 르네상스의 나라 이탈리아는 뛰어난 화가들을 낳았고, 수백 년간 훼손된 그림의 복원기술을 활용, 공식적으로 명화를 모사하여 공급한다.붓의 터치와 질감까지 살려낸 호베마의 ‘미데르하니스의 가로수길(1689)’은, 지금 거실에 걸려 필자를 내려다보고 있다. 지난 9월 루브르에는‘모나리자’ 앞에 계속 5, 60명이 몰려, 접근하는 데에만 10분을 기다렸다. 1911년에 도난당했다가 돌아온 이 그림은 모두 석 점으로, 진품을 도저히 가려내지 못하여, 하나만 전시하고 둘은 수장고에 보관한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보면 가짜가 곧 악(惡)과 동의어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비록 무명(無名)일지라도 암암리에 소문 난 화가의 짝퉁은 마니아 사이에 고가로 거래된다고 한다. “고흐 풍(風)으로 요렇게 그려 달라.”는 호사가의 주문도 있다하니, 나름대로 흥미롭다. 천경자의 여인에 위작이 나오는 이유를 꼽아보자. 첫째, 화장한 얼굴, 그 것도 짙은 눈 화장(스모키)은 그 자체가 베끼기 쉬운 그림이다. 둘째, 파스텔 톤의 화려한 원색과 과감 담백한 붓 터치는 따라 그리기가 편하다.
원산지가 일본인 이지메는 힘없는 상대를 집단으로 괴롭히는 비겁한 폭력이다. 몸이 약하거나 선천장애로 가뜩이나 학교생활이 버거운 학생이 괴로움에 못 이겨 자살이 늘고 있다는데, 이 고약한 풍조가 한국에 들어와, 왕따 피해가 우려할 수준이라고 한다. 라면상무·땅콩공주에 이어 7년 된 장신구를 고쳐내라고 떼를 쓰는 백화점 고객에 이르기까지, 근래에 부쩍 늘어난 ‘갑질’ 사건도 그 뿌리는 같고, 서민 위에 군림하는 공무원은 그 짝퉁쯤 된다.이들이 질이 나쁜 이유는 스스로 풀어야할 스트레스를 ‘을’을 향하여 배설하는 것은 물론, 직·간접적인 이익을 챙기고 기득권을 누리며, 을에게 심성의 파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는 사실이다. 즉 이지메 같은 갑질은 분노조절장애의 화풀이는 물론 결과적으로 상대를 잔인하게 짓밟는, 지극히 악의적인 범죄행위인 것이다. 천경자 화백의 부음이 뒤늦게 전해졌다. 91세로 천수를 누렸으나 12년은 병고에 시달렸고, 미인도 위작(僞作)논란으로 화가에게 생명의 포기나 다름없는 절필을 선언한 이후로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을 터인즉, 개인은 물론 국가적으로도 애석하고 상실감이 크다. 천화백이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그림을 보고, “내
개그콘서트의 시사풍자 ‘민상 토론’은, 의견을 밝히기 거북한 주제에 교묘한 질문으로 패널을 괴롭히는데, 요즘 여야 공방이 첨예한 국정교과서 문제가 그렇다.대부분 몸을 사리지만 한때 1인 2역과 겹치기 출연을 불사하던 ‘전국’이나 ‘민(民)씨’동아리는 예외다. ‘국정’은 다양성을 무시한 독재라고 반대하면서, 찬성자의 입을 벌떼처럼 달려들어 틀어막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똑똑한 젊은이들에게 또다시 외면당할 악수다. 작년부터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논쟁은, 올 봄에 불이 붙어 8, 9월에 뜨겁게 타오르더니, 이제 서서히 잦아들고 있다. 결정 자체가 행정부 고유 권한이요, 야당과 운동권은 투쟁단계로 넘어갔기 때문이다.그간 언론에 비친 찬반논쟁은 극한 대결이요, 특히 정치인은 막말 수준이었다. 열기가 높은 이유는 양측 주장이 다 옳은 까닭이다. 국정화는 출판의 자유를 막는 반민주적 폭거라는 반대 논리도 맞고, 편향을 바로잡으려 해도 막무가내로 방해하는 집단 탓에 도저히 안 되니 극한처방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옳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가장 호탕하게 웃는다.”는 독일 속담이 있다. 논쟁 끝에 10월 말부터는 칼럼들이 과연 “마지막에 웃는 자”답게 정제되고 균형이 잡혀있
“It’s Daejeon!”은 대전을 상징하는 brand로서, 이 이름의 월간 소식지가 통권 139호를 자랑한다. “I ♡ NY” 만큼 기발하지는 못해도, “대전이로구나! 아무렴, 대전이지! 대전이잖아?” 어떻게 풀어도 마음에 든다. 우리나라 전복의 80%를 공급한다는 완도의 “건강의 섬, 완도”는 8년을 넘어 군수가 바뀌어도 계속 사랑을 받는다. 그래픽디자이너 밀턴 글레이저가 만든 로고 “아이 러브 뉴욕”은, 사랑에 빠진 남녀가 우리만의 나무에 “Tom ♡ Mary”라고 이름을 새기는 미국적인 관습과 추억이 있기에, 뉴요커들이 기쁘게 받아들여 어언 40년 된 명품 브랜드다.2002년 MB 취임 때 만든 “Hi Seoul”은, 그 뒤에 덧붙여 쓰던 “Soul of Asia”를 중국이 문제 삼았다는데, 아시아의 영혼을 자처하는 “한국 굴기(?)”를 남들이 환영할 리 없다. 그러나 불쾌하면 꼬리만 떼어내면 되지 “하이 서울” 자체를 버릴 명분은 못된다. “Hi Seoul”이 “Yes Tokyo”와 비슷하다고? 도쿄 로고는 샘날 정도로 훌륭할 뿐 아니라, ‘인사’와 ‘감탄’은 하늘 땅 만큼이나 다르다. YS가 소위 “역사와의 대화”끝에 이룬 업적(?) 중에 중앙
제2차 세계대전 역사에 소련 역할이 과소평가됐다는 주장이 있다. 일리는 있지만 대부분은 이념을 밥줄로 삼던 학자들의 마지막 몸부림이다. 히틀러에게 슬라브 족은 유태인처럼 하급 인종(Untermensch)이요, 공산당은 바퀴벌레보다 먼저 박멸할 인류의 적이니, 두 조건이 딱 들어맞는 스탈린의 소련은 바로 숙적이었다. 히틀러는 영국 정복을 뒤로 미루고 소련을 침공하였으니, 승패에 앞서 혐오의 대상이던 소련인민에게는 그야말로 생존이 걸린 투쟁이었다.비밀에 쌓여 정확치는 않으나 소련의 전사자 750만은, 한 달을 못 버틴 프랑스 20만 영국 27만, 늦게 참전한 미국의 40만(태평양전쟁 포함)에 비해 엄청나다. 패전국 독일(290만)의 2배가 넘지만, 그 숫자는 스탈린 손에 죽은 소련인민보다는 작을 것이다. 몇 천만의 인민, 특히 군의 핵심인 장교 수천 명을 숙청한 스탈린 군대는, 지휘관을 잃은 오합지졸로서 초전박살을 당했다. 소련에 올 인한 것은 히틀러의 선택이요, 소련 역할이 컸다기보다, 연합군 전쟁노력의 대부분이 결국 “소련 살려주기”였다. 전후 독일에서 돌아온 2백만 소련군 포로의 뒤 소식은 알 길이 없다. 넓은 영토와 큰 인구에 교통(도로·철도)·식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