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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중 칼럼

노 화가의 부음 2 : 제3의 가구(家具)

[임철중의 거꾸로 보는 세상] - <88>

 

   이승만 대통령 단골 성우인 구민씨는 기막힌 성대모사로, “본인보다 더 진짜 이박사목소리”였다.  교황과 르네상스의 나라 이탈리아는 뛰어난 화가들을 낳았고, 수백 년간 훼손된 그림의 복원기술을 활용, 공식적으로 명화를 모사하여 공급한다. 

 붓의 터치와 질감까지 살려낸 호베마의 ‘미데르하니스의 가로수길(1689)’은, 지금 거실에 걸려 필자를 내려다보고 있다.  지난 9월 루브르에는‘모나리자’ 앞에 계속 5, 60명이 몰려, 접근하는 데에만 10분을 기다렸다.  1911년에 도난당했다가 돌아온 이 그림은 모두 석 점으로, 진품을 도저히 가려내지 못하여, 하나만 전시하고 둘은 수장고에 보관한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보면 가짜가 곧 악(惡)과 동의어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비록 무명(無名)일지라도 암암리에 소문 난 화가의 짝퉁은 마니아 사이에 고가로 거래된다고 한다.  “고흐 풍(風)으로 요렇게 그려 달라.”는 호사가의 주문도 있다하니, 나름대로 흥미롭다.

 

   천경자의 여인에 위작이 나오는 이유를 꼽아보자.  첫째, 화장한 얼굴, 그 것도 짙은 눈 화장(스모키)은 그 자체가 베끼기 쉬운 그림이다.  둘째, 파스텔 톤의 화려한 원색과 과감 담백한 붓 터치는 따라 그리기가 편하다.  셋째, 고교 미술시간에 모사하던 고흐·세잔느·고갱 중에서 고갱이 제일 쉬웠다.  고갱의 타히티의 여인과 목이 긴 모딜리아니를 닮은 천화백의 여인은, 얼굴 윤곽이 아이들 그림처럼 천진난만하다. 

 어린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데에 70년이 걸렸다는 어느 시인의 독백도 있지만, 그 천진함은 위조 범에게 좋은 먹이가 되는 것이다.  그림을 쉽게 내놓지 않아 감정(鑑定)하기가 어려운 점이, 위작의 수요를 부추긴 탓도 있을지 모른다.  이처럼 회화는 위작 시비에 그치지만, 복제 가능한 판화나 청동조각은 문제가 더 복잡하여, 일정한 기준으로 프린트 또는 주조 횟수를 제한한다.  그러므로 정밀한 3-D 프린팅이 미술계에 미칠 변화는 예측하기 어렵다.  SF영화에서 보는 “로봇(cyborg)의 반란” 따위의 걱정인데, 둘 다 해답의 열쇠는 ‘영혼’에 있다. 

 미술의 감상은 화가의 시각적 체험을 공유하고 작품의 의도를 상상해보는 “예술 활동”이다.  보는 사람이 없는 그림은 듣는 이 없는 음악처럼 공허하므로, 미술은 감상으로 완성된다.  따라서 혼이 깃들지 않은 작품은 아무리 정교하고 아름다워도 예술품이 아니며, 작가의 심성과 열정은 감상의 중요한 포인트다. “사람을 알려면 주변의 지인을 보라.” 했다.  대인관계가 서툴고 성글던 천화백이 속을 내준 분이, 고 박경리씨와 김성환화백 아니던가?  작년 봄 덕수궁 ‘길례언니’ 앞에 선 순간 머리가 띵- 하던 느낌은, 이와 같은 장황한 설명도 필요 없다.

 

    혼이 실린 분신 93점을 홀홀히 기증한 천 화백에게, 서울시립미술관은 상설전시관으로 화답하였다.  마치‘주라기 공원’처럼 새로운 차원을 개척한 한국미술계의 진화(進化)다.  그녀의 독보적 채색화 같이 반열에 오른 그림은 투자가치도 크지만, 억만장자나 재벌의 몫이다.  다음은 기업·미술관·관공서 차례.  우리 보통사람은 춥고 배고픈 젊은 화가의 그림을 사자.  나름의 매세나 내지 투자다.  명화(名畫)를 원하면 훌륭한 복제품이 많다.  필자 응접실에는 피카소의 자화상(MoMA NY 회고전 포스터, 1980)과, 뉴올리언스의 벼룩시장에서 산 어느 여대생의 그림이 걸려있다.  

 가끔은 발 편한 차림으로, 아이 손을 잡고 미술관을 찾자.  정밀한 인쇄에 가격도 착한 국산 도록(圖錄)도 사자.  그림이 집집마다‘제3의 벽걸이 가구’로 자리 잡는 날, 천화백의 수난은 막을 내리고, 문화와 예술은 대한민국 제3의 기적을 이끄는 견인차가 될 것이다.

 

 

 

 

글: 임철중
전 대한치과의사협회 대의원총회의장
임철중 치과의원 원장
대전고등법원 민사조정위원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