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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중 칼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임철중의 거꾸로 보는 세상] - <145>


   “해동 육룡이 나라샤...”  미천한 조상 6 대를 미화하여 이성계의 쿠데타를 합리화하려고 만든 건국 신화다.  로마는 별로 영양가 없는 브리튼을 침공한 시저에 이어(55 BC) 스코틀랜드마저 정복하려 했으나, 픽트의 저항에 부딪혀 하드리아누스의 장벽(Wall) 까지 후퇴하고 만다.  벽 뒤에 숨어 수세로 전환한 끝에 식민지배는 끝난다(409).  보다 앞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북방 기마민족의 침입을 막으려고 만리장성을 쌓았지만 진나라는 15년 만에 무너졌다(221-207 BC). ‘정관의 치’로 대표되는 중국의 황금기 당나라도 3백 년을 채 못 채웠다(618-907).  이(異)민족이 지배한 요 서하 금 원(遼 西夏 金 元)의 360년과 만주족의 청나라 270년, 춘추전국시대와 위진남북조·5대 십국의 혼란기를 빼면, 대제국으로서 한(漢)족의 지배기간은 더 줄어든다. 

 장성 뒤에 숨어 폐쇄적으로 지키는 자세는 대제국의 위풍당당과 거리가 멀다.  ‘잠자는 사자’라던 중국은 아편전쟁의 결과 ‘종이호랑이’임이 드러나고(1860 베이징 조약), 서구열강의 반식민지로 전락한 채 근대화를 시작하여, 백여 년 뒤 마오의 공산국가로서 다시 선다(1949).  그러나 정권에 집착한 독재자의 노욕(老慾) 탓에 인류역사의 오점인 문화혁명이라는 홍역을 치른 뒤에야, “중국판 박정희” 등소평에 의해 비로소 현대국가의 허울을 갖춘다.  종합하면 한족으로서 당나라 이후는 별로 내세울 것이 없고, 청조 후반부터는 오욕으로 점철된 역사다.

 이제 패권국가로 올라서려고 동북공정·중국굴기라는 왜곡을 통하여 역사의 얼룩을 세탁하고, 문화적인 자긍심과 지배논리를 세우기 위해 남의 역사까지 훔쳐다가 중국판 용비어천가를 만든다.  속 빈 강정 씹는 소리 요란하듯, 허세에 찬 자존심은 작은 일에도 비정상적으로 분노한다.  단적인 예(例)가 바로 사드 사태다.


   아무리 의도는 옳았다고 해도, 박근혜의 파행적인 직무수행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고,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에서 문재인 당선까지의 과정이 법치주의에 합당한가? 라는 질문 역시 선선히 “예!”라고 대답할 수 없다.  노대통령의 비극이 예고했던 ‘노무현 시즌 2’가 실현된 ‘혁명’이라는 대답이 가장 정답에 가까울 것 같다.  혁명이라 함은 근본적으로 비합법이기에, 늘 명분 즉 합리화에 목이 마르다.

 박정희 대통령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도, 굶주린 국민에게 배부른 세상을 선사함으로서, 죽어서라도 쿠데타의 정당성을 찾겠다는 외침이었다.  이렇게 보면 ‘혁명’이라는 용어를 자주 입에 담았던 문대통령의 속내에 이해가 간다. 


   타 지역 사람들은 잘 몰라도 당사자들은 금세 알아듣는 것이 안동-대구-경주와 부산-김해-진영 간에 사투리의 차이다.  역사 왜곡여부를 둘러싼 국론분열이 국정 교과서를 계기로 달아오르면서 갈등이 증폭되어, 대한민국이 한번은 치러야 할 홍역이 왔구나 생각했으나, 탄핵과 조기대선 결과 일이 해결된 것이 아니라 없었던 것처럼 덮여 버렸다.  훗날 더 큰 불씨를 남긴 것은 아닌지.  그런 의미에서 취임 초부터 대통령이 직접 지시한 ‘가야사(史) 연구’에는 오해의 소지가 없지 않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공교롭게도 노무현·문재인 두 분의 출신지역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TK와 차별화하려는 PK를 위한 ‘용비어천가’나 ‘가야 굴기’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면 비약일까?  우리는 박정희 김대중 두 분 간에 악연이 빚은 영호남의 보이지 않는 서먹함으로 인하여, 동학운동의 상처로부터 신라·백제 갈등의 역사까지 들춰내는 “분열의 가슴앓이”를 겪었다.  전제군주 조선조의 사관(史官)들조차 정치가 역사의 기록에 관여하는 일을 극도로 경계하였다.  오이 밭에서 신발을 고쳐 신을 필요는 없다.





글: 임철중
전 대한치과의사협회 대의원총회의장
임철중 치과의원 원장
대전고등법원 민사조정위원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