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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중 칼럼

인공지능 1 : 왜 한국바둑인가?

[임철중의 거꾸로 보는 세상] - <102>

 

   해방과 함께 일본기원 초단면장을 들고 돌아온 조남철에게는, 한국기원 창설, 즉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국내 고수들 수준은 두 점 접바둑쯤으로 짐작한다.  네 귀와 변에 열여섯 점을 미리 놓고 흑이 천원에 첫수를 두는 신토불이 ‘순장바둑’은 살벌한 육탄전 전술에 강하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4백 년 전부터, 361로 어디에나 자유롭게 착수하는 전략적 포석 차원에 올라있었다.

 일찍이 도사쿠(道策)가 정립한 근대바둑을 슈사쿠(秀策)가 견실한 실리 운석(運石)으로 보강하고, 오청원·기타니(木谷) 합작품인 신 포석으로 화점(花點)이 부활하는 등, 최소한 두 차례 이상의 혁명(발상의 전환)을 경험하였다.  이처럼 도예(道藝)로 숭상하며 오랜 세월 갈고 닦은 일본과 한국의 실력 격차는 당연하였다.  오오다케(大竹)의 소위 우주 류(宇宙 流)에서 임해봉(林海峰)의 두터움으로 이어진 화려한 공중전은 물론, 중국식 포석도 3 연성의 변형이니, 모두 신포석의 연장선상에 있다.

 

   한국기원의 처음 20년은 조 국수의 독무대였는데, 그 아성을 김인 국수가 접수한다.  김인을 일본바둑으로 보는 시각이 있으나, 입단 후에 1년 유학이 전부이니, 순수 토종이 맞다.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며, 오다케·임해봉과 함께 당시 세계바둑계를 대표하는 긴치쿠린(金竹林) 삼인방 시대를 연다.  세계 최연소로 입단한(9세) 토종 조훈현은 일본으로 건너가 세고에의 제자가 된다.  군복무로 일본제패의 꿈을 접고 귀국(1972)하여, 질풍노도의 순발력과 천재성으로 김인 이후의 춘추전국시대를 평정하고, 무적의 전신(戰神)으로 군림한다.  일본 1인자 조치훈에 전적에서 앞섰다. 

 그를 이겨낸 사람은 바로 자신의 내 제자 이창호다.  조훈현이 날렵한 제비라면 이창호는 묵직한 돌부처요, 임해봉이 이중허리면 이창호는 3중허리였다.  그때부터 이창호 앞에서면 일본·중국의 고수들은 제풀에 무너졌다.  한국을 만나면 벌벌 떨던 중국축구처럼 “바둑 공한증(恐韓症)”과*, 쉬리·가을동화·겨울연가에 앞 선 “한류(韓流) 열풍의 시조”였다.  한국바둑이, 4백년 전통의 일본을 추월하고 13억의 중국을 눌러, 재위기간 17년 동안(1991-2006) 명실 공히 세계를 제패한 것이다.

 

   이창호가 전성기를 지나자 진짜 토종인 비금도의 섬개구리 이세돌이 등장한다.   한집만 남으면 곧 문단속에 들어가는 이창호의 장기집권에 지루해 하던 바둑계는, 이세돌의 치열하고 기상천외한 바둑에 열광한다.  승률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해도, 이세돌 대 쿠리의 10번 기가 기획된 이유다.  10번 기는 정상을 뽑는 쟁기(爭棋)의 하나로, 4월승(越勝)마다 치수가 바뀌는 잔인한 대결이며, 기성 오청원이 당대 모든 고수들을 무릎 꿇리고 17년을 풍미한(1939-1955) 이래 실로 60년 만의 이벤트였다. 

 예정된 열판을 단 8국으로 끝낸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으니, 알파고가 이세돌을 택한 가장 큰 이유다.   타이틀 획득 수는 조훈현 160 이창호 140회이며 이세돌은 조치훈과 함께 60회이고, 입단 기록은 조훈현이 9세 이창호 11세 이세돌이 13세다.   세계 랭킹은 중국의 커제가 1위 이세돌은 4위다.  결국 구글의 선택은, 40 여 년간 세계정상에 섰던 한국바둑에 대한 오마주요, 10번 기 승자 이세돌의 창의와 개성을 향한 거수경례다.  물론 상업적인 계산도 있었겠지만...    음울한 현실에서 미래에 희망을 안겨준 인류의 대표선수 이세돌과 한류의 만 만세다. 

 드라마 미생·응팔로 부푼 국민의 관심에 보답하고, 바둑계는 신 포석 이래 새로운 지평 ‘제3의 혁명’ 을 선물 받았다.  인간의 패배라는 그늘에 갇히지 말자.   여기서 한 단계 더 올러 서느냐 주저앉느냐는 인간이 선택하기 나름이다.  평생을 연마한 칼솜씨가 총알 한 방에 끝난다 해도(영화, 인디아나 존스), 펜싱과 검도는 여전히 멋지지 않은가?

                                           

*공한증(恐韓症): 중국 축구 대표 팀이 한국을 만나 1978-2010 년간에 11무 16패로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하였음(청소년 축구와 FIFA 비공인 시합, 두 번만 예외).


      

 

 

글: 임철중
전 대한치과의사협회 대의원총회의장
임철중 치과의원 원장
대전고등법원 민사조정위원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