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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중 칼럼

[임철중의 거꾸로 보는 세상] 아날로그의 귀환

 

예과 때 청량리 하숙집은 한 방을 둘이 쓰는 하숙비가 18,000원 씩이었는데(통상 15,000) 불평은 없었다. 집이 정갈하고 맛깔스런 개성 음식에, 밥은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일등급 경기미요, 아침마다 계란에 하루걸러 소고기 볶음이 나온다.

 

장성한 아들을 짝 지워 내보내고 나니 두 딸만 남아서 적적함을 달래려고 하숙을 친다고 했지만, 명문대생만 고르는걸 보면 은근히 사위욕심도 있었나보다. 알고 보니 김씨는 욕심을 부릴 만한 알부자였다.

 

개성에서 단신으로 월남하여 양복점으로 돈을 벌어 종로에만 지점 네 개에 공장까지 갖고 있었다. GQ나 이용화 양복만은 못해도 가봉을 (fitting) 두 번씩 하는 일류 맞춤복(tailormade)점이었다. 투철한 장인정신으로 열심히 일만 하면 양복점만으로도 부자가 될 수 있었던 아날로그 시절의 신화다.

 

개화기 신사복계는 공산혁명에 쫓겨 온 백계러시아 망몀객들 손에 있었다 한다.

그래서 맞춤양복에서는 귀족 내지 부자의 냄새가 난다. 가래떡을 굴려서 보풀과 먼지를 털기도 했단다. 라샤점(羅沙)에 가서 영국제 밀수입품 서지(serge) 기지(生地:옷감)를 두 마 세 치 끊어다 주면, 고급 안감을 대어 최고급양복을 지어준다.

재단 수가는 공임을 포함하여 옷감 값의 두배가 넘는다. 현 시세로 한 벌에 대략 백만 원쯤이다. 일류 양복점은 하루 일곱 벌만 주문받으면 돈을 쓸어 담는다고 했다. 한국인 체형에 대한 통계가 없어 변변한 기성복(readymade)도 없었으니, 남자라면 장가갈 때만이라도 꼭 한번 들르는 곳이 양복점이었다.

 

가격파괴 시대에 대량생산 대량소비를 위해서는 기성복이 정답이다. 국민 체형의 통계나 복잡한 사이즈의 조합(combination)은 컴퓨터가 순식간에 처리한다.

매장에 없는 물건은 전국 체인점을 조회하여 즉시 찾아내고, 유통구조 혁명으로 전화 한통이면 단 하루에 택배가 된다. 규모의 차가 현격하니 원단을 구입할 때 영세 라사점이나 양복점은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리고, 기성복회사는 주문생산으로 고급원단을 제조, 독점한다.

양복점 재단사는 기술과 인맥으로 버티어보지만 유행을 따르기도 벅찬데다가, 기성복회사는 물량과 PR의 힘으로 아예 유행을 창조한다.

드디어 라샤점은 자취를 감추고 양복점 숫자도 1/10 이하로 줄었다. 자존심 강하던 재단사도, 일 배우겠다던 시다와 직원들도 직장을 잃었고, 산뜻한 기성복 한 벌 값은 황금시절의 재단비보다 싸다. 보고 있던 2, 3류들도 이에 질세라 꾀를 낸다.

 

배껴 온 패턴과 값싼 짝퉁 원단을 들고 동남아에 가서 재봉해 온다, 처음에는 부도난 회사의 땡처리로 위장했지만, 이제는 공공연하게 일반화 된 9만원짜리 정장의 이력서다.

이제 일류 재단사의 한 벌 재단 수가(酬價)로 정장 열 벌을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노동집약적 기술을 요하는 정장이 이러하니, 글로벌로 값싼 노동력만 찾아다니면 되는 단순노동제품의 경우 가격파괴 현상이 상상을 초월한다.

다이소나 천원상점이 상가를 뒤덮고, 생활급을 보장하는 일자리가 점점 더 귀해지는 이유다.

아울러 회복의 기약이 없는 deflation-recession의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다.

무한팽창의 성장과 소득 수직상승의 시대가 끝나고, 가치 지향적 삶에서 의미를 찾는, 아날로그의 귀환에 시선을 돌릴 때가 아닌지.

    

입학시험 잘 봤다고 제일모직이 준 원단으로 난생처음정장을 맞췄다(1961).

재단사가 묻는다. “어느 쪽으로 모실까요?” “?” 남자에게만 달린 물건의 수납공간을 묻는 줄 어찌 알았겠는가. “...., 왼쪽이요.” 얼떨결에 대답은 했지만, 재단사에게는 역시 사람냄새 나는 배려가 있었다. 한쪽어깨가 조금 쳐지는 치과의사 직업병을 한 눈에 알아보고 바로잡아 주기도 했다.

대형 디지털 할인매장에 이런 배려는 없다. 개당 450만원까지 받던 임플란트가 88만원까지, 다함께 망하자는 타락과 가격파괴의 길을 걷는 동안,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위험(risk)에 대비한 보험성 지분은 어디로 갔나? 환자를 인간답게 배려하는 품위유지 지분은? 교합기능회복을 위한 다기능 교합기는 빼먹고, 기능공 식 패턴만 흉내 내고 있지 않은지? 다단계식 인센티브에 현혹되어 과잉시술로 이웃 동료의 신뢰를 갉아먹고, 구강건강의 미래의 진료영역을 서둘러 초토화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더 늦기 전에 전문인으로서, 아니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자. (대전`충남치과의사회 소식지 제2호에 게재)

 

 

                                                                                                                           

글: 임철중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졸업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조교수

대전광역시 치과의사회 회장

대전`충남 치과의사 신용협동조합 창설 및 이사장

대한치과의사협회 대의원총회의장

대한치과의사협회 치과의료문화상 수상

대한치과의사협회 공로대상 수상

대한치과교정학회 부회장

대전고등법원 민사조정위원

대전문화예술의전당 후원회 창립 및 회장

대전방송 TJB 시청자위원

대전광역시 문화재단 이사

임철중 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