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그나카르타는 영국 존 왕의 실정과 조세에 저항한 ‘귀족’계급의 요구사항에 왕이 서명한 인권장전이다(1215). “왕도 법에 종속” 함을 인정하고, 국법에 따른 과세와 재판의 근거를 문서화하였다. 그 후로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한 권리청원(1628)과 ‘의회주의’를 확립한 권리장전(1689)으로 이어져 민주주의 헌법의 토대가 되었다.
영국은 수백 년간 축적한 내공으로 성문헌법이 없어도 민주주의의 선도자가 되었고, 미국 독립 당시 헌법에 마그나카르타를 넣자는 주장도 있었다. 따라서 공산국가가 ‘민주주의’를 운운함은 참칭이다.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헌정’ 민주주의 비판처럼, 일당독재의 당규가 헌법 ‘위에’ 군림하기 때문이다.
2년 전 우리 새 역사교과서에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바로잡은 것도, 북한이 쓰는 ‘인민’ 민주주의라는 모순된 용어와 구별하자는 뜻이었다. 중국의 8천만 공산당원 대 14억 인구의 비율은, 제1계급 승족(僧族) 10만과 제2계급 귀족 40만이 1,800만 시민과 농민 위에 군림하던 프랑스혁명 전야를 닮았고, 당원을 대폭 줄이자는 당내 여론에(당원에게 충분한 특혜 보장?) 이해가 간다.
Constitution은 본질 즉 정체성이며, 헌(憲)은 법 헌 또는 표준 될 헌이니, 헌법은 법 중에 최상위 법, 표준약관이다. 헌법 위에 다른 규약이 있다면 민주주의 이전에 법치국가에 미달이며, 규약이 특정인물을 신격화하는 장치라면, 그건 국가도 아닌 조폭집단이다. 국민이 예측 가능한 사회 즉 사회적인 항상성을 위하여 징벌 권을 포함한 막강한 공권력을 국가에 위임할 때에는, 위임받은 자가 그 힘을 남용하지 않는다는 약속이 전제되어야하고, 그 약속을 확실히 하도록 헌법은 경성(硬性)법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행 헌법상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으로 규정된 헌법 개정 발의요건을 과반수로 완화하려는 아베총리의 주장은, 쿠데타처럼 ‘헌정중단’에 버금가는 ‘헌법경시’다. 다수결(종다수)이나 과반수 또는 3분의 2라는 투표기준은, 모두가 오랜 세월 시행착오 끝에 얻어낸 값비싼 지혜다.
북한은 지난 6월 최고통치규범인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을 39년 만에 바꿨다. 김씨 왕조의 권위 절대화 · 핵 무력 명시, 그리고 다른 간부의 부상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코미디다.
그러나 세상이 다 웃어도 일본의 아베는 웃을 자격이 없다. 얼마 전 한일축구 응원전에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플래카드를 두고 “그 나라의 민도(국민수준)가 의심스럽다”라는 일본 장관의 망언이 있었다. 이참에 일본이 민주국가로서 이웃과 평화 공존할 정치사회적 성년이 되었는지 한 번 짚어보자.
첫째, 북한의 신격화는 고작 70년 3대째지만 일본은 만세일계(一係)의 황실에 더하여 수천만의 신이 있다. 만신 또는 잡(雜)신교는 다름 아닌 ‘원시종교’를 뜻한다. 둘째, 유일한 천황의 신민이라는 사상은 쉽게 선민의식, 배타적인 민족 우월주의로 변신한다. 셋째 일본은 서구처럼 오랜 봉건사회의 경험덕분에 근대화의 우등생이 되었다는 뜬금없는 우월감이다.
주군을 위하여 목숨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무사도는 일본 봉건사회의 핵심인 독특한 기사도로 미화되지만, 한편으로는 체제유지를 위하여 순치된 극단적인 ‘인명경시’와 자학의 그림자다. 그 그림자는 카미카제 자살특공대와 옥쇄에, 천황의 개념도 생소한 오키나와주민 6만까지 집단자결로 이끌었다. 섬 하나 점령에 미군 12,500명과 일본군민(軍民) 20만이 사망했으니, 일본본토 공격에는 미군 백만과 일본인 몇 천만이 죽게 되리라는 예측이 나왔다.
이는 원폭 투하가 훨씬 더 인도적이라는 트루먼 대통령의 최후의 결단에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다. 결국 전승국(GHQ)이 강제로 이식했다는 ‘자학사관(史觀)’은 일본인 DNA에 이미 들어있었고, 그것이 원폭투하를 자초한 측면이 강하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중국공산당의 초헌법적인 당규나 세계를 웃긴 북한의 10대원칙도 아베가 주장하는 ‘헌법개정안’ 보다는 훨씬 덜 위협적이다.
AA의 쌍포(아베·아소)로 자칭 2,600년을 이어온 절대신 천황이 현실적인 정치지도자로 나서고, 전대미문의 정교(政敎)일치와 맹목적인 자학의 돌격정신이 점화되는 날, 70여 년 전 ‘대동아공영권’의 악몽이 몇 배의 위력으로 되살아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글: 임철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