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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중 칼럼

역사와의 화해

[임철중의 거꾸로 보는 세상]- ⑩

 

중국으로부터 국공(國共)전의 고참인 조선인 2개 사단을 넘겨받은 김일성은, 이를 주축으로 T-34탱크를 앞세워, 변변한 중화기조차 갖추지 못한 경비대 수준의 국방군을 기습, 남침한다. 무너진 전선을 구축하려고 북을 향하던 국방군 트럭행렬을 기억한다. 우렁차게 부르던 군가는, “인생의 목숨은 초로(草露)와 같고/ 이씨 조선 5백년 빛-나도다/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아 이슬같이 죽겠노라!“ 뜬 금 없이 웬 이씨조선? 조선은 엄격한 신분제의 절대군주 국가였다. 평민에게 국가란 바치고(세금) 봉사하며(, 군역) 때로는 매타작을 당하는 조직에 다름없었다.

 

왕실과 신료는 왜란·호란 같은 외침에 시달릴 때의 구심점에 불과하고, 말기에는 농업 생산성마저 떨어져 굶기를 밥 먹듯 했으니, 한겨레니 애국심 같은 말도 허사(虛辭)에 가까웠다. 일제에 강제합병 당하자 양반과 기득권층의 비분강개야 하늘을 찔렀겠지만, 평민의 생각은 달랐을 수도 있다. 다만 외침을 당했다는 사실과, 명성황후 시해·순종 황제 독살설 및 동양척식회사를 앞세운 수탈정책 등 천인공노할 만행은 민심을 격동시켰고, 곳곳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해방과 함께 등장한 갓 서른의 소련군 대위가 십여 년간 만주에서 활약한 김일성 장군과 같은 인물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모르는 당시 북한주민들은, 소위 김일성 장군의 영도 하에 남조선을 해방시킨다는 명분에 현혹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맞서 국방군의 사기를 높이려고 의병(義兵)에 빗댄 노랫말이, 군가에 나온 이씨조선일 것이다. 김일성의 진위는 논외로 하고, 중요한 것은 당시 남북주민 대부분이 자유·민주·공산주의라는 개념은 고사하고 글조차 깨치지 못한 문맹이었다는 사실이다. 전제군주제와 식민통치의 경험 밖에 없는 해방공간에서, ‘민족또한 비교적 낮선 개념이었고, 북한주민은 현재까지도 자유민주주의를 모른다.

 

철저한 자유 민주주의자였던 이승만 대통령은 실현수단을 교육입국에서 찾았다. 민주주의에는 기본교육이 필수이며, 역사적으로 우중(愚衆)은 독재자에게 철저히 이용당했음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과거 공산국가나 지금의 북한이 왜 철의 장막으로 국민의 눈과 귀를 가려야하는지를 설명해준다. 자신의 활동무대였던 하와이 교포사회에서 모금하고 인천의 인자를 붙여 설립한 인하공대나 한양 공대와 농업의 건국대처럼 대학의 특성화를 기획하고,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 중에도 대학생 징집유예를 고집한 이대통령의 선견지명에 새삼 머리를 숙인다. 결국 최단 시일에 문맹을 퇴치하고, 오늘날까지도 뜨거운 교육열기의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자치교육이다. 학급에서 가장 작고 어린 필자에게 반장은 그림의 떡이었는데, 초등 5학년 때 처음 도입된 자치(自治)일에는 하등 지장이 없었다. 선생님의 지시를 전달·수행하고 학급을 통솔하는 하향식 반장이 아니라, 급우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학급의사를 결정하는 상향식 민주주의를 처음 연습한 것이다. 그로부터 7년 후 4·19 혁명이 일어났다. 1960228일 경북고·대구고, 38일 대전고, 마산고·마산여고, 418일 고려대, 419일에는 대광고로 시작 서울대·고려대·건국대를 위시한 거의 모든 대학이 봉기하였다. 4·191960년에 고3이던 고교생이 주도한 반독재 의거였다. 자치를 처음 배운 우리가 주역이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요, 가르쳐준 이대통령에 대한 제자의 보은이었다고 믿는다. 이대통령은 부정선거 사실을 눈치 채자 곧 하야의사를 비쳤고(412일 국무회의), 부상학생을 찾아가, “불의를 보고 일어나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다. 내가 맞아야 할 총알을 너희가 맞았다.”라며 서러워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제 발로 물러난 최초의 독재자라는 사실은, 이대통령이, 자신이 가르친 학생들의 의거를 자랑스럽게 여겼음을 반증한다.

 

프랑스혁명 이후 명실상부한 공화정의 수립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는가?

돌이켜보면 민주주의의 기본지식이 전무하고, 정부수립 직후 3년의 전쟁 끝에 종전도 아닌 대치 상황에서, 우리는 참으로 탁월한 민주주의 교육의 지도자를 만났던 것이다. 반세기도 안 되는 세월에 경제에서 민주화의 기적까지 성취해낸 저력의 기초는, 그 짧은 기간에 다져진 것 아닌가? 건국 초기 12년을 부정적인 공백으로만 매도하니까, ‘백년전쟁처럼 다큐멘터리를 가장한 불량식품이 나도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통성 확립을 위한 역사와의 화해는 전 국민의 숙제지만, 특히 초대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어낸 4·19세대의 결자해지적 역할이 가장 중요함을 통감한다.

 

 

 

 

 

 

 

 

글: 임철중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졸업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조교수

대전광역시 치과의사회 회장

대전`충남 치과의사 신용협동조합 창설 및 이사장

대한치과의사협회 대의원총회의장

대한치과의사협회 치과의료문화상 수상

대한치과의사협회 공로대상 수상

대한치과교정학회 부회장

대전고등법원 민사조정위원

대전문화예술의전당 후원회 창립 및 회장

대전방송 TJB 시청자위원

대전광역시 문화재단 이사

임철중 치과의원 원장